생존을 위한 선택 -① 한국에서 느리게 살 수 있을까?

부록

by 에퀴티

'어릴 적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을 못 견뎌했다.'

수업 시간은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삶에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내용을, 강압적으로 의자에 앉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잡생각을 해도, 공책에 낙서를 해도, 짝꿍 옆구리를 찔러서 장난을 쳐도, 졸다가 깨어도 수업은 끝나지 않았다. 자습은 혼자라서 더 버거웠다. 한참을 공부한 것 같아 시계를 들여다보면, 시침은 꿈틀거릴 뿐이고 분침은 반 바퀴도 채 돌지 않았다. 책에는 의미 없는 밑줄만 늘고, 공책에는 낙서만 쌓여 갔다. 대학에 가서 학년이 올라가서도 교과 과정의 의미는 옅어지고 최소한의 시간만 할당하고 제친다. 그리고 탈출구를 찾는데 그것이 취업이었고, 그때부터 시간은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초고속사회에 살게 되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자 멍하니 보내던 시간은, 온갖 상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시간이 빨라지니 끊임없이 무언가를 많이 만들어내지만, 대신에 다른 부분들을 닳게 만든다.'

일을 열심히 할수록 소중한 동료가 생기고, 돈이 다달이 입금되고 직급은 올라가는데 그만큼 책임감과 스트레스가 따라온다. 돈 쓰는 재미를 알아서 술, 담배와 함께 유흥을 탐닉할수록 몸과 마음은 추해진다. 가족이 늘어날 때마다 행복한데 그걸 지킬수록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집이 전세에서 자가로 바뀌어서 안정화되었는데 원금과 대출 이자가 옥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움은 점점 줄어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된다. 노후만 경제적으로 해결되면 된다고 말로만 되뇌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이제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느끼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그런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꿀잠에서 깨어 시간을 확인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눈가가 절로 환해져 다시 잠에 든다. 햇살을 받으면서 기분 좋게 산책하는데 시간이 남으면, 벤치에 눌러앉아서 여유를 즐긴다. 거실에 둘러앉아 차와 다과를 먹으면서 아이들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다. 차를 한잔 더 마신다.

하지만 어릴 적 버릇처럼 멍하니 앉아 온갖 상상에 잠기고 싶을 때면, 가족들은 나를 괜히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본다.


느림은 사전적으로는 '어떤 동작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긴 것'이다. 삶의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무엇이든 천천히 하는 것이다'.

대표적 동물로는 거북이, 나무늘보, 달팽이가 있으며, 대부분 초식동물이고, 느림보 친구들은 남들한테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줄 수밖에 없기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각자의 특징이 있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인간한테 친숙한 동물로 사랑받는다.


거북이는 '토끼와 거북이'이라는 동화에서 나오듯이 느리지만, 천천히, 묵묵히 스스로의 속도로 경주에서 이긴다. 옛날부터 장수를 상징하며, 실제로 수백 년 까지 사는 종도 있다. 딱딱한 등딱지가 있어서 외부 위험으로부터 견딜 수 있다.

나무늘보는 움직임만 느린 게 아니라, 한 끼를 소화하는데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배변을 1주일에 1번 하며, 잠을 하루 20시간까지 자기에 삶 자체가 느리다.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고 나무에 매달려 생활하면서 천천히 움직여 포식자의 눈에 감지되지 않는다.

달팽이는 작고 천천히 여유롭게 움직이며, 체유 유지 및 외부 자극과 세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부드럽고 젖은 피부를 유지한다. '달팽이집'이라는 동요에 나오듯이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존재이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고, 힘들면 언제든 쉴 수 있다.


초고속사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거나 빠르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느리게 살고 싶어 한다. 제대로 느리게 살기 위해서는 사회를 저속사회로 변혁하던지 가족, 친지와 떨어져 별도의 공동체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의 초고속사회는 느림을 멋지게 덧칠하여 노동력이 이탈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유혹한다.

'느림은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과정이며,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한 선택이다.'


이제 삶에서 느림을 추구하려 하지만, 이미 초고속사회에 깊이 물든 탓에 기존의 삶에서 무엇부터 늦춰야 할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한다.

직장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데 회사는 목표를 달성하라고 하고, 기한을 정해준다. 느리게 하면 야근을 해야 하고, 동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마저도 싫으면 생까는 독고다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연봉은 깎이고, 동료들도 기피하여 외톨이가 된다. 조직 개편할 때마다 깍두기가 되고,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대상자 1호가 될 수 있다.

가정에서 청소를 하루 종일 할 거냐에 대한 비아냥을 견뎌야 하고, 요리하는 중간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배달 음식을 시켜서 의욕 상실하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으면, 그러려면 따로 살라고 타박이다.


이제 현실의 벽 앞에서 개인이 느리게 살려면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찾아보고 스스로를 냉정하게 점검한다.

① 안정적인 소득 또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니?

☞ "우리 가족 먹고살만한데, 대출이자와 교육비가 걱정이야"

☞ "저축은커녕, 집세 내기도 빠듯해"

☞ "부모님한테 얹혀살고 있어"

② 실패해도 회복 가능한 배경이 있니?

☞ "부모님이 건강만 하시면 바랄 것이 없어"

☞ "내가 가장이라 한 달이라도 월급이 밀리면 끝장이야"

☞ "내 "부모님 쪽쪽 빨수록 급속히 늙어만 가셔"

③ 경력 공백이 용인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니?

☞ "후배들한테 미안할 뿐이야, 월급은 2~3배 받는데, 후배들이 일을 훨씬 빨리해"

☞ "치열하게 공부했으면 느리게 왜 사니?"

☞ "일자리 좀 찾아 줘요"

지금 나이에 전문직을 할 수도 없고, 부모님은 자식만 바라보고 사시니, 방법은 하나다. ①번이다.

먼저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재테크를 잘해서 하루빨리 안정적인 자산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때가 되면 제대로 느리게 살아보자.




이제 반려동물한테 느린 삶을 대리 만족한다.

'반려견은 느리게 살아 오래 살고, 야생견은 빠르게 살아 일찍 사라진다.'

※ 반려견(10~15년) vs 야생견(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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