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그러진 복숭아

나의 젊은 아버지가 거기에

by 날개


내겐 복숭아에 얽힌 두 개의 기억이 있다.

까슬 대는 복숭아털을 씻어내면 껍질 안에서 금방이라도 꿀 즙이 솟구칠 것 같은.

큰아이 출산을 한 달쯤 앞두었을 무렵, 우리는 여주에 잠시 머물렀었다.

장호원이 가까워서 장날이면 반찬거리보다 복숭아를 더 많이 샀고 첫 출산의 두려움을 복숭아의 단맛으로 달래곤 했다.

내 동그란 배를 만지면서 엄마는 복숭아 같다고 하셨다

“ 아기 살결이 곱겠다. 복숭아 많이 먹어서…….”

엄마의 기억 속의 복숭아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셨을까? 내가 물었던 것 같은데 대답은 못 들은 것 같다. 지우고 싶은 기억일 테니…….


여덟 살의 여름방학, 처음 맞는 방학이 뭔지도 모를 때 선생님은 방학은 집에서 공부하는 거라고 하셨었다.

조용하다. 더워진 햇살이 머리맡에까지 밀려 들어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문 앞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노란색 옆얼굴은 햇살이 더해져 더 노랗게 보였다.

두 살 막내는 아직 깨지 않았고,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인지 아침이었는지 동생 잘 보고 아버지 아침밥 챙겨 드리라 했던 것 같은데.

햇살 속으로 다가가 쪽마루에 걸터앉는 내게, 아버지는 물을 달라고 하신다. 벌써 며칠째 말이 별로 없다.

부엌으로 향하는 내게 아침 먹고 막내 업고 어디 좀 가자고 하신다.


엄마가 차려 놓았는지, 아버지가 차려 놓았는지, 상 위에는 밥 한 그릇과 내 수저가 올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아침을 잘 못 드시는 걸 알지만 물그릇과 함께 아버지 밥을 퍼 상 위에 올려놓았다. 밥상을 들고 온 나를 한 참 건너다보시던 아버지는 수저는 드셨지만, 밥은 못 드신다. 물만 한 모금만 드시고…….

어서 먹고 막내 깨면 업고 나오라시며 마루에 나가 걸터앉으신다.


나도 그날은 밥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는 게 맞을 거다. 마침 막내가 깨면서 칭얼거린다. 내 등에 막내를 업혀 주시는 아버지의 손은 파르르 떨었던 것 같다. 골목을 막 벗어나는데 옆집 무당 아줌마가 인사를 건넨다.


“오늘 처음 갔는데 자리 나 잡았을까나?”


아버지와 무당 아줌마를 번갈아 보던 내 눈에 햇살을 등지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어른들이 말하는 간장병이란 말 때문인지 간장색처럼 검어 보였다.

무당 아줌마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내 등을 토닥인다.

앞 장 선 아버지를 따라 신작로 아래로, 영등포 시장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막내의 칭얼거림은 울음으로 바뀌었고 내 등은 막내의 눈물인지 내 땀인지 미끄덩거렸고, 급한 마음과는 달리 자꾸 길가에 앉아 쉬는 아버지


깡마르고 간장색의 아버지

밥도 안 드셨는데 배만 볼록 나온 아버지.

계단을 내려갈 때는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내가 손을 붙잡아야 했다

바들거리는 찬 손을.

시장 안에서 아버지는 같은 길을 여러 번 걸었다.


시장은 너무 컸다. 골목 여러 개를 지나 시장 안도 아니고 도로도 아닌 곳에 앉아 있는 엄마를 찾아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새에 앉아 있는 엄마를 찾았다.

아버지는 막내를 토닥이듯 나를 밀면서 가서 아기 젖 먹여 오라 하시고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신다.

엄마는 하얀 복숭아가 가득 담긴 그릇 앞에서 뭔가를 골라내고 있던 엄마는 밥 먹었냐 물으셔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막내의 울음은 엄마의 젖을 물고서야 그쳤다.

엄마는 뒤 돌아앉아 연신 땀을 닦으며 내게 깨진 복숭아 하나를 내미신다.


“껍질 벗겨서 먹어 깨졌어도 달아”


커서야 알았다. 곱게 자란 엄마는 임질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복숭아 한 접의 무게를 감당 못 해서 한 번, 간신히 일어서서 앞을 볼 수 없어 또 한 번, 두 번이나 내동댕이쳤던 복숭아를 싸게 팔고 있었다는 것을.


불은 젖만큼이나 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았던 걸까? 서른여섯 젊은 아버지.

혼자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선 엄마의 미숙한 첫걸음이었다는 걸.


불은 젖 물리고 닦아 내던 것이 땀이 아니고, 어쩌면 몰려올 앞날에 대한 두려움의 눈물 같은 것이었다는 걸. 남편 앞에서의 마지막이 되어 버린 응석이 돼버렸다는 걸.


그 눈물이 미안해서 골목으로 숨은 젊은 아버지의 등 뒤로 쏟아지던 햇볕 속에 까슬 거리는 복숭아털이 뽀얗게 내려앉고 있었다.


복숭아 과즙 같은 찐득한 눈물을 닦고 있었을 나의 젊은 아버지가 거기에…….


아직도 그 골목에 서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