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닭 2

경우가 있어야지 경우가.

by 날개



저녁 해가 뒤꿈치에 매달린 하루를 질질 끌며 신작로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산 91번지의 풍경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해와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퉁퉁거리는 소리로 부산하다. 물 나오는 시간이라 물초롱 옮기는 소리도 묻어 여간 소란한 것이 아닌데......
어라? 조용하네.
수돗가에 세워 놓은 물초롱의 길이가 다른 날보다 길다. 여름인데 하루 걸러서 물이 나온다. 물 쓸 일이 많아서 그렇다 치고 계속 물 지게 지고 나르는 사람들은 있는데 물초롱은 한참을 요지부동이다. 새치기의 수법은 몇 가지 있다.

짝이 맞지 않은 물통 2개를 대놓고 옮길 때 하나씩 짝이라며 끼워 넣는 것과 아예 한 통씩 따로 놓고 나중에 짝을 맞춰 받는 경우. 그런데 을범이 엄마처럼 저렇게 수도꼭지 앞에서 대놓고 받는 것은 오돈이 엄마 말마따나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다

물호스 잡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새치기가 있고 없고 했다.
주인아저씨면 줄이 금방금방 줄고 주인 여자가 잡으면 한없이 길게 늘어서 있어야 했다.
수돗가 아랫골목의 젊은 여자들은 주인 여자에게 아첨을 떤다고 오돈이 엄마는 곧잘 욕을 해댔다.
어둑어둑 해는 지는데 물초롱은 움직이지 않으니
내 뒤에 서 있던 정화가 훌쩍인다.
저녁밥 안쳐야 하는데 물이 없다고.
그때였다.
을범이 엄마가 방금 지고 갔던 물지게를 비우고 곧장 앞으로 가는 것과 동시에 신작로 저 아래에서 기생오라비라고 아줌마들이 흉보던 을범이 아버지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도 새치기 때문에 오돈이 엄마랑 대판 했었는데 을범이 엄마가 불룩 나온 배로 밀어대는 통에 빼짝 마른 오돈이 엄마가 벌렁 나자빠졌었다.
오돈이 엄마는 신작로가 떠나갈 듯이 욕을 퍼부었고 을범이 엄마는 남편 손에 끌려 집으로 갔었다.
우락부락한 을범이 엄마는 남편에게는 꼼짝 못 한다며 욕을 하던 오돈이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경사진 신작로 위쪽이 수도꼭지가 있어서 물초롱은 아래에서 올라가야 했다.
아줌마! 방금 받아 갔잖아요? 이 아래는 초롱이 꼼짝도 안 하는데 연달아 받아가면 우린 언제 받아요.
두 짐만 더 받고 그만 받을게. 어제 물이 안 나와서 집에 물이 떨어져서 그랴.
우리도 물이 별로 없단 말이에요.
그사이 또 한 짐을 지고 간다.
호스를 쥐고 있는 주인 여자가 못 들은 척한다.
산 91번지의 주인은 수돗물을 파는 저 내외이다.
우선순위라는 것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자기에게 반찬이라도 가져다주는 사람부터 물동이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아줌마 새치기는 주지 마세요. 우리도 저녁해야 한다고요. 쟤는 아까부터 울고 있단 말이에요.

정화를 가리키는 내 손이 달달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을범이 엄마가 다시 물지게를 바꿔지려는 순간 물동이를 발로 냅다 차 버렸다. 물동이 하나가 쏟아졌다.( 흐미, 아까워라 물)
악에 받친 나를 보자마자
이노무 기집애가?
손이 올라간다. 살짝 피한 나는 나머지 한통마저 냅다 쓰러 뜨렸다.
일단 물이 쏟아진 빈 초롱 두 개가 신작로를 빠르게 굴러내려가고 내려놓았던 빈 물초롱도 들어서 집어던져버렸다.
와당탕 통타당. 퉁. 퉁. 퉁
신작로에 있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나의 욕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오돈이 엄마한테서 들었던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쏟아냈다.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비집고 들어 온 것은 남편의 손이었다.
우락부락 달려들던 을범이 엄마의 얼굴이 금방 울상이 되었다.
또야? 창피하게.
을범이 엄마는 멱살이 잡혀 골목 안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한다.
오죽하면 애가 저럴까? 지랄을 해도 너무해. 사람이 경우가 있어야지, 경우가.
주인 여자도 호스를 주인아저씨에게 뺏겼다.
나는 아직도 벌렁대는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 물초롱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거기.
보따리를 머리에 인 엄마가 서 계셨다.
하이고. 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