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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해야 Johaeya Jul 02. 2023

아스팔트와 죽순 이야기

[들개와 노견] 2부 4화 _섬 출신 들개와 도시 출신 노견의 난리동행




          땅속 깊은 곳에 대나무 싹들이 태어났다. 몸을 한껏 부풀려서 지상으로 도약하는 날,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모두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 위 천장이 아스팔트라는 것을 알게 된 죽순1은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접는다. 하지만 덩달아 동요한 녀석들이 너도나도 단념할 때 죽순2는 계속해서 지상으로 뛰었다.


남쪽 섬나라에 봄이 오고 무지개색 꽃잎들이 바닷가 마을에 날릴 때 죽순1과 그 무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죽순2는 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어느 날 천장이 벌어지고 갈라진 틈으로 마침내 죽순2가 머리를 내밀었다. 이때, 길을 지나는 개 한 마리가 죽순2를 보고 멈춰 섰다.


개          다른 놈들은 땅속에서 죽었는데 넌 무슨 수로 이 딱딱한 아스팔트를  뚫은 거야?


그러자 죽순2가 답했다.


죽순2     ...... 아스팔트가 뭔데?




          무지해서 살아지는 날들. 요즘 나의 일상이 그렇다. 용기가 부족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매일 망고와 씨름이다. 폰이 울린다. 나의 루바다.



“뭐해?”


“나 가출해.”


“뭐?!”


“바빠서 이만 끊겠습니다.”



루바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공손하게 전화를 끊는다. 죽순이 하늘을 향해 박치기를 멈추지 않았던 까닭은 체력도 자만도 아닌 오직 ‘모르기’ 때문이지 않았나. 모르는 게 힘인 나의 시절, 내 손끼리 하이파이브를 하고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데 바퀴가 돌자 엉덩이에 못이 박히는 것처럼 아프다. 이런 젠장, 뒷바퀴의 고무가 몰랑거린다. 가출도 안 되나요? 물방울이 바위도 뚫는다는데 뚫고 싶은 망고 마음은 안 뚫리고 자전거 바퀴나 뚫리다니. 나의 무모한 헤딩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대로 페달을 밟는다. 바람 빠진 자전거를 타고 안장에 엉덩이를 튀겨가며 죽기 살기로(기어가 없다) 오늘 낮에 망고와 머물렀던 목장으로 다시 간다.



아...... 혼자다. 세상을 다시 만난 출옥자의 기분이 이럴까. 나 혼자,라는 감정이 낯설고 감격적이다. 쓸쓸하지만 참 반가운 자유로움, 자식 둘(망고와 우유)을 집에 던져 놓고 해외여행 온 철없는 애 엄마처럼 신이 난다. 심신이 가뿐해져서 눈물이 날 것처럼 좋은데 목장길 끝에 산책 중인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누더기 체육복을 입은 여자(나)는 목장갑을 낀 채 머리를 산발하고 바람 빠진 자전거를 붙잡고 실실 웃고 섰는데...... 여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비켜 가는 남자의 뒤로 노을이 번지고, 한라산 너머에 비행기가 지난다. 벌건 하늘에 새하얀 달과 별이 까만 밤보다 먼저 걸린다. 눈에 박힐 듯 내 세계가 뚜렷해지는 이 순간, 지금이 만족스럽다. 그리고 바다로 고개를 돌리자 보고 싶은 무언가가 자꾸만 물결에 어른거린다. 짧은 혼자,를 마치고 긴 같이,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출을 접고 집으로 달린다.



가출길에 만난 노을과 달과 별과 비행기






          새벽 3시, 오늘도 녀석이 운다. 동네에서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며 마당으로 뛰쳐나가던 나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집안에서 버틴다. 집과 집 사이에 거리가 있고, 마을 사람 대부분 낮에는 부지런히 몸을 쓰기에 밤중에는 숙면으로 귀가 어둡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부리는 여유다. 살기 위해 내 사고도 내가 편한 대로 진화한다. 망고를 통해서 낮과 밤을 살피고 마을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으니 고마운 노릇인가. 덕분에 동네 적응도 빠르다. 개 자체를 못마땅히 보는 어르신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망고를 데리고 지나면서 고개 숙여 먼저 인사를 건네면 모른척하지 않으신다. 바닷속 깊이 마을이 잠든 시간, 나는 울부짖는 망고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잠을 청한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새로운 마을길을 망고와 걷는다. 돌아오는 길은 익숙한 바닷길, 아는 길이라고 녀석의 발걸음에 자신감이 붙는다. 집에 돌아오니 뒷다리를 죽 늘어뜨리며 기지개를 켜는 망고, 늦봄의 볕이 드셀 만큼 열띠다. 그런데 돌담에 얼굴을 묻고 이웃집을 살피던 망고가 갑자기 으르렁댄다. 이 집에 와서 지금껏 조용하다가 남의 집에 얌전히 있는 개들에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지켜본다. 이런 식으로 밥값을 하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아서 헉헉대는 녀석에게 바가지에 물을 퍼서 뿌려준다. 내리는 비는 아무렇지 않게 맞으면서 몸에 몇 방울 떨어지는 물줄기에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 망고. 여기 트라우마 하나 추가요, 하는 순간 망고가 제집으로 쌩 들어간다. “옳지, 이럴 때 필요한 게 집인 거야!” 오호라, 물방울 트라우마 발견에 귀가 훈련까지 덩달아 되니 나는 몹시도 흡족하다.



밥값인가 시비인가



오전 10시 반. 출근하기 전까지 1시간 반의 여유가 있다. 기초 체력 저질이던 내가 근무 전 생긴 짧은 틈에 이렇게나 기뻐하다니. 이것이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다. 아침 할 일을 모두 끝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내 식사를 잊었다. 밥 준비를 내려놓고 체중계에 올라간다. 줄어든 체지방과 늘어난 근육량을 보니 망고 다이어트(개 산책)에 신뢰가 오른다. 어찌나 고마운지 집안에서 망고를 흘겨본다. ‘고마운 거 맞아, 내 눈을 오해하지 마.’



옆으로 드러누운 채 저도 따라 나를 보는 망고......에게 순간 마법에 걸린 듯이 밖으로 빨려 나간다. 그러자 웃는 얼굴로 내 얼굴에 '뽀뽀'를 주는 망고. 녀석을 만나고 하루에 손을 열 번도 넘게 씻는데 이제는 얼굴도 수십 번 씻을 생각에 꽥 소리를 지른다 “야, 그만 발라!” (나는 개 알레르기가 있어서 바로 씻지 않으면 눈이 붓고 얼굴과 목의 피부가 뒤집어지며 콧물이 쉬지 않고 쏟아진다. 이 사실을 우유를 데려온 후에 알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망고에게 발린 침이 초미세 입자 미스트처럼 내 마음을 기분 좋게 적신다. 살아생전 이렇게 큰 혀에게 발리다니, 스타에게 어렵사리 받은 사인처럼 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런 눈으로 보기 있기, 없기?






          오랜만에 만실이다. 객실마다 여행에 들뜬 사람들이 가득하고, 로비에는 취객들로 인산인해다. 체크인을 받는 기계처럼 수없이 입을 쓰니 목이 아프고 오래 선 종아리는 마비가 와서 터지기 직전이다. 같은 일을 10년째 해도 이 일은 여전히 힘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날은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황은 매뉴얼과 경험(짬밥)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망고와의 시간은 답이 없다. 알아도 모르겠고 중간쯤 온 것 같으면 다시 시작이다. 녀석이 웃고 있어도 그 안이 보이지 않고 고충은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루바에게 의지하거나, 부족한 체력은 체력 강장제에 의존하여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한 마디로, 오늘의 만실은 산책보다 쉬웠다.



퇴근을 하니 밤 11시, 망고가 산책을 나가자고 보챌까 봐 차에서 내리기가 겁난다. 끝도 없는 산책의 굴레...... 하지만 반기는 망고를 보니 껌껌한 밤바다를 뚫고 어느새 밖으로 나간다. 밤바다를 향해 망고가 절룩거리며 뛴다. 나도 퉁퉁 부은 종아리로 뛴다. 왜 뛰는지 모르겠다. 뛰고 있기 때문에 뛴다. 순간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대나무에 발이 걸린다. 낮에 보았던 녀석이 반나절 새 많이도 자랐다. 망고보다 더 질긴 녀석이 여기에 있구나 싶다. 살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살아지는구나. 망고를 졸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망고가 또 멈춘다. 이번에는 왜일까 궁금하지 않다. 반달 아래에 봄과 여름이 섞인 촉촉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이 바람을 밤새도록 맞을 수 있어. 네가 나에게 늦게 오더라도, 나는 너에게 뿌리내리고, 무엇에도 아랑곳 없이, 아스팔트를 뚫은 대나무처럼 끈질기게, 너만을 기다리는 죽순이가 될 거니까.'



아스팔트를 뚫은 대나무
달려라, 망고!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종일 세지더니 저녁쯤에는 폭우로 변한다. 휘몰아치는 강풍에 야자수의 목이 꺾일 듯하고 나는 망고 생각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가보니 비를 피해 제집 안에 있을 줄 알았던 망고가 홀딱 젖은 채로 잔디밭에 웅크리고 누워 있다. 천둥 아래 쏟아지는 세찬 비가 망고의 몸을 사정없이 때린다. 망고야, 하고 부르는데 반응이 없다. 순간 번개가 번쩍! 녀석을 훤히 비추는데...... 망고가 미동도 않는다.






*[들개와 노견]은 총 20화로 매일 오전 10시에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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