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편지

너는 어른이 되었어?

by 소서


나는 이제 스물아홉이 돼


스물아홉 해라는 시간이 선명하게 감각되지는 않지만 네가 떠난 뒤의 변화를 조금 더듬어보자면 이제 나는 길을 걸을 때 목적지를 먼저 생각하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걷는 게 편해졌어. 웃음을 짓다가도 문득 공허가 찾아와 웃는 시간이 예전보다 짧아진 것 같고, 이렇게 시작보다 끝을 먼저 들여다보느라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졌어.


끝을 짐작하기 시작했던 때가 어른의 도입이었을까


감정의 진폭을 느끼는 건 예전과 그대로인데 그 뒤에 찾아올 공허와 침묵을 대비하려 애쓰게 됐고, 치솟는 걸 참고 억눌러보기도 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아무도 모르게 울었던 날이 늘어났고, 그러다가 나만 그 ‘아무’ 속에 속하지 못하고 그때의 슬픔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겨우 그친 울음을 되돌려 놓기도 했어.


예전의 우리는 목적지 없이 발이 닿는 곳으로 움직였고, 그렇게 도착한 곳을 목적지라고 이름 붙였는데.


책임보다 감정이 앞섰고,

끝보다 지금이 중요했고,

나와 너보다 우리를 더 사랑했던 때가 있었는데.


우리의 다른 점은 놀이가 되었고, 나는 나라서, 너는 너라서 그렇게 이유 없이 서로를 사랑하며 딱 들어맞는 퍼즐처럼 자라나면서 그렇게 우리를 우리로만 가득 채웠던 날들이 있었지.


온전히 벅차오른 것을 기꺼이 쏟아내며 우리로만 세상을 채웠던 그때의 찬란함이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빛을 품은 채 선연해.


사랑받기 위해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됐던 때가 가장 사랑스러웠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네


나는 어느덧 자라서 발을 내밀기도 전에 길을 잃을 걱정에 몇 번을 검색해 보고, 다름이 비교의 형식으로 다가와 어느 밤의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놓기도 하고, 빛나보이는 누군가의 모양에 나를 억지로 끼우며 튀어나온 모난 부분을 쉽게 미워하기도 했어.


질투와 열등감, 비교와 부러움은 예전엔 사랑의 다른 얼굴처럼 스치다 사라졌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가시 돋은 덩어리처럼 안쪽에 남아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어. 숨이 막히는 날이 잦아졌고, 그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무섭기도 해.


고통에 익숙해지는 느낌을 너는 몰랐으면 좋겠는데,

이런 게 어른이라면 그냥 덜 자란 채로 남아있길 바랄 정도로 별로인 것 같아.




감정의 진폭은 그대로인데, 예전이 옹달샘이었다면 지금은 흙탕물 위에서 파동 치는 기분이야.


들여다보려 할수록 더 흐려지고, 맑았던 때는 까마득해서 막막하고. 어디서, 언제부터 오물이 묻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시간이 흘렀고, 나는 걷기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길도, 발도 모두 더러워져 있었어.


다들 이렇게 산다고 스스로 다독여 보고 속여도 봤는데, 여전히 내가 가장 지저분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없앨 수 없나 봐. 이런 모습으로 껴안았다가, 내 기억 속 깨끗하게 기억된 너에게 내 얼룩이 묻을까 봐 이젠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돼 버렸네.


지금의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때를, 그때의 우리를, 그때의 나를 사랑했던 기억으로 숨 쉬고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인간은 어른이 되면서 아가미가 생기는 존재인 걸까. 행복했던 순간 하나를 숨구멍 삼아, 그 기억에 기대어 호흡해야만 살아가는 물고기처럼. 예전에는 온몸으로 가득 숨 쉬며 살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언가를 필요로 해야만 숨이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두 다리가 있어서 나아갔고, 팔이 있어서 껴안았고, 가슴이 있어서 사랑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이 감각들까지도 무게가 달려서 한때는 버거움에 무너지기도 했어.


우주를 껴안아 보려고도 했고, 한 사람으로 온 마음을 가득 채우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시 그런 날이 올까? 공허와 상실의 결말이 악몽처럼 천장을 채워 밤을 더럽혀 놓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울음을 뱉어내는 것뿐인 날에 가끔 네가 생각 나


성장은 커지는 일이라고 믿었는데,

나는 왜 점점 작아지고 약해져만 가는 것 같지




너는 어떤 어른이 되었어?


나의 어른으로 가는 과정은 이렇게 못나고, 어지럽고, 두려움과 자책으로 얼룩져버렸지만 너의 길은 그렇지 않았으면 해.


너의 방에 찾아오는 밤은 아무것도 없이 포근하고,

다음 날의 햇살이 싱그럽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어.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줬던 너를 난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나는 그러지 못하면서도, 너는 그러길 바라는 이 마음조차 내 이기심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


내가 가진 이기심이 때로 너의 눈부심을 질투하는 가시가 되어 널 향해 날카로움을 세웠고, 그 날카로움이 끝내 나를 겨누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모든 순간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내 영원의 끝이 내일이 될지, 몇십 년 후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마냥 춥기만 한 시간 속에서도 추억 속 너와 나눴던 그 온기를 되돌리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이 차오르고 어쩌면 그렇게 평생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내가 내는 이런 미약한 용기들도 어린 너에게 매달아 놓고 끝내 놓지 못해서 미안해. 미련만 되새기고 한 문장의 인사조차 너에게 쉽게 건네지 못하게 된 겁 많은 나를 용서해.


그래도 너만은 이 모든 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사랑의 한 형태였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너는 영원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_


충만히 사랑하고, 끊임없이 달리고,

미련 없이 온몸으로 주저앉고,

온 우주를 껴안으려 팔을 뻗고,

폐부 가득 들이찬 숨을 망설임 없이 내쉬면서

그렇게 순간을, 생을, 영원을 사랑하고

그 과정을 지나가는 모든 모양의 너를 스스로 사랑해 줘


나를 사랑하는 법은 잊었어도 너를 사랑했던 일만큼은 습관처럼 남아 있어서 그저 너의 영원을 응원하며 나의 영원을 살아내 보려고 해.


그 속에 어린 내가 있을 테니 이게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해서,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너를 통해 나를 사랑해서 미안해


그냥 난 이런 어른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잘 지내

이 말이 네게 부담이 되지 않길 바랄 정도로

여전히 너를 많이 생각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