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톱 옆에 거스러미가 돋았다. 손끝을 움직일 때마다 미세한 걸림이 반복됐다. 피부보다 신경이 먼저 그 자리에 닿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까슬한 지점을 더듬었다. 불편을 확인하는 손놀림이 어느새 습관처럼 변해간다. 예고된 상처보다 당장의 거슬림이 더 참기 힘들었기에, 나는 결국 손을 댔다. 아주 조금만 뜯어내어 정리할 생각이었다.
항상 그 ‘조금’이 틈을 만든다. 가벼워진 의도는 서둘러 행동을 부른다. 설령 그것이 내 살을 스스로 찢는 일이라 해도. 뜯겨나간 자리에 속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통증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서서히 차오르는 아릿함은 뜯어내는 순간의 쾌감 뒤에 숨어 기억을 교묘히 미화한다. 다른 도구를 찾아 정성스레 다듬는 일은 당장의 불편을 가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욕심은 늘 정석보다 빠르다.
그래서 후회는 항상 같은 방향으로 굴러간다.
휴대폰 화면을 넘기는 짧은 순간에도 엄지 끝은 욱신거리는 자리를 문지른다. 거슬림을 제거한 자리에 통증이라는 또 다른 거슬림이 들어선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통증은 잊히고, 더 강렬한 감각들이 그 위를 덮는다. 새살이 돋고, 다시 거스러미가 일어난다. 나는 불편을 견디지 못한 대가로 상처를 얻고, 또 잊는다.
통증은 아픔을 각오한 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방비한 생활의 틈으로 기어이 스며들었다. 잊고 지내다 손에 닿는 작은 물방울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반응한다. 뒤늦게 도착한 통증은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집요하게 대가를 요구한다. 언젠가 새 살이 차오르고 다시 메워질 것을 안다. 하지만 ‘언젠가’와 ‘지금’ 사이, 그 벌어진 시차 속에 고통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간격 속에서 벌겋게 노출된 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 또렷해질 뿐이다.
잘라내고 나서야 비어버린 자리가 비로소 보인다. 사소한 상처 하나가 하루의 집중을 흩트리고 다른 기억마저 덮어버린다. 깔끔해지려 뜯어냈는데, 남은 것은 텅 빈 허전함과 욱신거리는 뒷맛뿐이다. 후회는 질문을 끌고 온다.
나는 왜 기어이 뜯어내려 했을까
단지 지저분해 보였기 때문일까
혹은 내 손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통제감이 필요했나
손끝 하나로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다는 해방감
스스로를 수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감각의 확인
내가 뜯어낸 것들과, 내가 원치 않았음에도 어느 순간 뜯겨나간 것들. 대체로 더 오래 아픈 쪽은 후자였다. 상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기어이 흔적으로 남는다. 몸이 아니라 말투에, 관계의 거리감에, 혹은 침묵의 두께에. 나는 늘 그 울퉁불퉁한 흔적들을 매끄럽게 정리하고 싶어 했다.
더 단단해지기 위한 과정, 더 잘 자라기 위한 조치일 거라 믿었다. 단단함이 곧 안전인 줄 알았다. 단단해진다는 말은 종종 굳어진다는 말과 혼동되었다. 굳음은 매끄러움이 아니라 마찰을 낳는다. 나의 가장자리가 무뎌지는 대신, 딱딱해진 껍질이 타인의 연한 곳을 긁고 지나가게 된다. 단단해진다는 건 모난 부분이 다듬어지는 과정이 아니었다. 모남은 그대로 남은 채, 그것을 숨기는 기술만 능숙해질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무르고 여린 것들에 마음이 기운다. 쉽게 상처 나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들. 불편하고 성가시면서도 이상하게 미워지지 않는 것들. 애틋함으로 정의하기엔 섣부르고, 동정이라 하기엔 나와 너무 닮아서 거스러미처럼 신경이 먼저 닿는 것들. 스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물성이 생긴다. 무게가 생기고, 손이 가고, 결국은 다듬어져 본래의 모양을 잃는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많은 것들을 말끔하게 만들었고, 말끔해진 자리만큼 오래도록 허전해했다.
내 결핍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거스러미처럼 돋아난다. 투박하고 거친 결핍의 돌기들은 다듬으면 더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만, 손을 대는 순간 남는 것이라곤 개성 없는 표면뿐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깎아내면 정돈은 되겠지만, 동시에 어떤 고유한 울퉁불퉁함도 소거될 테니까. 그리고 그 사라짐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나만 안다. 내가 무엇을 덜어냈는지, 무엇을 각오했고, 무엇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는지.
그런 불퉁함을 ‘특별함’이라 부른다면, 나는 굳이 정리하지 않고 그것을 내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수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여기서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작업이 된다. 하루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벌어진 틈을 닫고 드러난 붉은 살을 덮으며 다시 돋아난 돌기를 손끝으로 확인하는 일. 그 작업이 세상의 언어로 설명되는 순간, 변명이 되거나 과장이 되거나, 혹은 타인의 값싼 호기심이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말보다 손끝으로 먼저 처리한다. 흔적이 티 나지 않게, 통증이 소란스럽지 않게, 내일을 아무렇지 않게 맞이할 수 있게.
상처를 다듬는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 내면에는 통증을 무화시키는 단단함과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섬세함이 동시에 자라난다. 단단함은 방패가 되고 섬세함은 촉수가 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 둘은 종종 같은 무표정을 하고 있다.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는 조심성은 다정함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홀로 상처를 봉합해 온 습관은 타인의 상처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태도로 굳어지기도 한다. 특별함이란 타고난 재능처럼 반짝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공들여 손본 자리에서만 만져지는 고유한 결이다. 남들은 모르는 방식으로 유지해 온 균형, 타인은 짐작하지 못하는 온도 속에서 홀로 견뎌낸 시간들.
어쩌면 고유함이란, 상처가 휩쓸고 간 빈자리를 끝내 무엇으로 메꿨는지 보여주는 치열한 수선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맡기지 못해 결국 자기 손으로만 감당해 온 시간의 지층. 겉으로는 매끄러워 보이는 얼굴과, 그 평온을 지탱하기 위해 물밑에서 반복해 온 조용한 수선. 우리는 상처 그 자체로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다루는 방식으로 서로 달라진다. 그 차이는 대개 침묵 속에 잠겨 있어 끝내 타인에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깊은 결핍에서 자라나 끝내 살갗으로 돋아난 거스러미를, 무심한 척 뜯어낸다. 손끝에 남은 아릿한 통증은 익숙하게 삼키고, 표정을 단정히 갈무리한 채 또 다른 내일로 건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