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메리 Jan 02. 2024

한쪽소설-잘생긴 남자가 날 고발했다.

빛좋은 개살구

또 사무실에서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내가 이사원에게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냐고 나무라는 소리를 다른 직원들이 다 들어버렸다.

김주임이 싸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려고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왔다.


"박주임, 좀 괜찮아?"

"어휴. 김주임님, 아시잖아요. 걔 답답한 거. 어떻게 1년이나 됐는데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죠?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럴 수 있죠? 4년제는 어떻게 나온 건지 속이 터져요."

"답답하긴 하지. 그래도 잘생겼잖아. 좀 봐줘. 그 얼굴로 저렇게 죄송하다고 하믄 화가 다 풀릴 것 같더만."

"얼굴요? 참나! 그것도 처음에만 그랬죠! 지금은 하나도 안 잘생겨 보인다 고요! 미안해하는 것도 다 연기 같고요! 막 일부러 실수하는 거 같고요! 나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 같다니까요? 좋게 좋게 말해서는 절대 안 고치고 화를 내야 알아먹는다니까요? 머리에 머가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뽑았는지 저주를 내리고 싶어요. 아마 실력은 안 보고 얼굴만 보고 뽑았을 거예요. 진짜 이러다 화병 걸려 내가 먼저 죽을 거라구요!"

"그래, 그래. 박주임. 고생하는 거야 알긴 알지. 그래서 어리버리한 이사원 가르칠 사람은 똑 부러진 박주임밖에 없다고 다들 그러잖아. 이사원 그나마 이만큼 키운 것도 박주임이고."


잔뜩 토로하는 나를 김주임이 토닥여주면서 공감해 주니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방금 전 이사원이 그 큰 키로 울상을 하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이 생각나 괜히 안쓰러워졌다.

솔직히 잘생기긴 했다.

어깨도 넓고 다리도 길고 목소리마저 좋았다.

그래서 처음 내가 사수로 배정되었을 때는 설레기까지 했다.

혼자서 사내 로맨스를 꿈꾸며 출근날이 즐거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설렘은 딱 2달로 끝이었다.


가장 처음 이사원의 어리버리함을 느꼈던 건 탕비실 커피를 사 오라고 시켰을 때였다.

이사원은 당당하게 커피 원두를 사 왔다.

너무 황당해서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이사원은 자기가 커피를 좀 아는데 이 원두가 가격 대비 맛이 정말 좋다고 드셔보시면 정말 반하실 거라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홀리해서 나도 모르게 "어머~ 그래? 몰랐네~ 이사원이 잘 아는구나~"라고 하이톤으로 대답하며 "호호"하고 웃었다.

속으론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본능적인.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만큼 잘생겼다.

하.지.만. 탕비실 어디에도 원두커피 기계가 없는데 어떤 뇌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커피 원두를 사 올 수 있는 걸까?

결국 그 원두는 내가 집에서 먹겠다고 덕분에 맛있는 커피를 알았다며 고마워 하기까지 한 후, 다시 정확한 오더를 줬다.

맥심 노랑 커피믹스와 카누 오리지널을 사 오라고.

다른 건 안된다고.

이사원은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이 너무 가치 있게 느껴져 나는 그 쓸모없는 커피 원두와 퉁치기로 했다.

그렇게 그 실수는 신입사원의 흔한 에피소드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이사원은 꾸준히 사소하게 내 인내심을 시험했다.

우선 엑셀 프로그램을 아예 사용할 줄 몰랐다.

요즘 세상에 어떻게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없이 취직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렇지만 이사원의 얼굴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처음엔 웃으며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내 일도 있는데 이사원에게 언제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나.

그래서 내가 일 하는 걸 보고 배우라고 했는데, 내가 일하는 게 너무 빨라서 하나도 모르겠단다.

그래서 그럼 동영상을 찍어도 되니 찍어서 나중에 보고 공부하라고 했다.

대신 회사 자료가 들어있으니 유출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사원이 내가 하던 엑셀 작업을 그대로 따라 하는 연습을 하다가, 그걸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다.

자기가 엑셀을 이만큼이나 다룰 줄 안다는 게 너무 뿌듯했단다.

그래서 자랑하고 싶었단다.

내가 자료 유출하지 말라고 했건만.

다행히 중요한 개인정보나 기밀정보는 포함되지 않아서 단순 경고만 받고 끝났다.

상사한테 잔소리는 잔뜩 먹었지만.


또 한 번은 연말을 맞아 고객들에게 감사 표시로 달력 보내는 업무를 시킨 적이 있었다.

봉투에 달력을 넣은 후 내가 인쇄해 준 주소지를 잘라 붙이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사원은 회의실 구석에 달력이 잔뜩 쌓여있는 걸 눈으로 보고도 그냥 빈 봉투를 송부해 버렸다.

주소지 잘라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버거웠나 보다.

이사원은 한없이 가벼운 봉투를 잔뜩 들고 우체국으로 가서 송부한 후 아무 생각 없이 임무를 완수했단 뿌듯함만 가지고 돌아왔다.

그 일로 고객들 문의 전화가 빗발쳤고 당연히 사수인 나만 상사한테 잔뜩 깨졌다.


어쨌든 그렇게 자잘한 사건들이 지속되다 보니 나는 이사원을 절대 믿지 않게 되었다.

모든 일을 더블체크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즉시 지적했고 조용히 지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잘생긴 얼굴도 나긋한 목소리도 더 이상 나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사원이 노력하는 것은 알기에 마냥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미운 정도 정이었다.


아까도 화가 나 소리를 쳤지만 김주임과 이야기한 후 너무했단 생각이 들어 이사원을 불러냈다.

회사 1층에서 비싼 커피를 사주며 말을 꺼냈다.

"이사원, 아까 사무실에서 소리 지른 거 미안해. 속상했지."

"네... 죄송해요. 제가 자꾸 실수해서..."

"아냐, 아냐. 이사원 노력하는 거야.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냥 조금만 더 신중하게 하면 잘하게 될 거야."

"그게..."

갑자기 이사원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이사원 왜 그래. 내가 그러는 거야. 하루 이틀이야. 미안해. 앞으론 나도 소리 안 지를게."

이사원은 계속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런 이사원이 너무 안타까워 나는 그의 옆자리로 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잘하면 되지."

그동안 이사원을 미워했던 게 괜히 더 미안해졌다.

앞으론 좀 더 잘해주리라 다짐하면서 이사원을 달래주었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고 있는데, 감사과에서 나를 호출했다.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갔는데 분위기가 심각했다.

감사과장님은 나를 구석진 회의실로 데리고 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주임님, 블라인드 보셨습니까?"

"네? 무슨 블라인드요?"

"어제 블라인드에 박주임님이 갑질에 성추행을 했다고 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사원 몸을 더듬고 사무실에서 욕하고 소리 질렀다고 하던데요. 아무리 이사원이 잘생겼어도 그렇지. 왜 그러셨습니까."

"네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그런 적 없어요!"

"그건 지금부터 조사할 거니까 차차 알아보면 될 거고요. 우선 박주임님은 이사원한테 사과해야 할 거고, 일단 여기 계셔야겠습니다. 요즘 MZ세대들 이런 거에 민감한 거 아시죠? 뭐, 박주임도 MZ세대니 잘 알겠네요."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돼요. 이사원이 그래요? 제가 그랬다고? 제가 솔직히 소리는 좀 질렀지만 욕이라뇨? 성추행이라뇨?"

"아,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박주임님 어떻게 할지 정해질 때까진 여기 계십시오. 휴대폰도 저 주시고요. 저도 가뜩이나 바쁜데 이런 일 터져서 짜증 나거든요. 어휴..."

감사과장이 내 휴대폰을 들고나간 후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 07화 한쪽소설-우렁각시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