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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Jan 08. 2024

정신과 8번째 진료-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져 간다.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2주가 쏜쌀같이 지나갔다.

약을 증량하고 난 효과는 이번에도 확실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바로 효과가 나지?

이게 맞나?

너무 놀라운데?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여태 내가 해왔던 수많은 고뇌와 고통은 뭐였단 말인가!

너무 허무하다.


이번 진료를 받으러 정신과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서 가서 의사에게 지금 상태를 설명해주고 싶었다.

정말 가벼운 마음이었다.

밝은 기운으로 인사하며 들어서는 내 모습에 의사도 즐거웠는지 덩달아 밝아졌다.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솔직한 내 마음을 쏟아냈다.


- 이게 약 효과가 이렇게나 차이가 있을까 싶은데요.  정말 효과가 좋았어요.  확실히 조금 달랐거든요?  제가 원하는 모습은 아닌데요.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은 아닌데 조금 제 성격? 성향대로 지낸 것 같아요.  원래는 하고 싶은 말을 안 하려고 꾹꾹 참다가 결국 못 참고 터트려서 회사에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는데,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을 거의 바로바로 가볍게 다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속은 시원해요.  그리고 전에는 그렇게 못 참고 말하면 후회랑 자책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하고 싶은 말 다 하는데도 후회를 안 해요.


- 그러시군요.  후회와 자책을 안 하신다고요.


- 네.  그런데 이게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은 아니거든요?  저는 이렇게 초연하게 그냥 모든 걸 참고 지나가고 싶거든요.  주변이 어떻든 혼자서 이렇게 평온하게 있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게 할 말을 다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자연스러운 어쩔 수 없는 제 성향인가 봐요.


- 네.  제가 봐도 지금 모습이 좀 자연스러운 것 같거든요?  약이 개인마다 맞는 용량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용량이 환자분께 맞는 것 같네요.  회사분들 반응은 어떤가요?


- 회사 사람들은 재밌어하죠.  전에는 꾹 참았다가 터지는 거라 좀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고 그래서 싫어하는 거 같았는데, 이제는 가볍게 툭툭 웃으면서 말하니까 그냥 웃겨해요. 


차분하게 말하는 의사의 눈가에 웃음 주름이 가득 맺혔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지만 의사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게 확실했다.

전에도 부드러운 웃음을 짓긴 했지만 오늘 같은 만연의 미소는 아니었다.

나와 어울리는 모습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는 보람을 느껴서였을까?

환자가 진료를 받을 때마다 점점 나아지는 것만큼 보람되는 것도 없겠지. 

그러면서 의사는 혹시 모를 약에 대한 부작용을 확인했다.


- 여전히 잠이 많이 와요.

- 이 약이 잠이 오게 하는 약은 아니거든요?

-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걸까요?

-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약 자체가 졸리게 하는 약은 아니에요. 그래서 아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어요.

- 그렇군요. 


나는 약을 먹으면 되게 졸린데 나만 느끼는 현상인가 보다.

내가 교대근무를 하는 걸 알게 된 후로 의사가 저렇게 확실하게 말하는 걸 보면 약의 부작용이라기보다는 내 생활 패턴 때문인가 보다.

잠자는 시간이 맨날 부족하니 여유 시간만 생기면 잠을 자려는 본능일 수도.

전에는 항상 생각이 많아서 뇌가 풀로 돌아가느라 피곤에 절어서 살았다면, 지금은 생각이 줄어서 잠을 자는 건가 보다.

어쨌든 잠이 온다는 건 나한테 필요한 기능이라 나쁘지 않다.


짧은 진료가 끝나고 다음 일정을 잡으려 할 때 물었다.

다음에는 한 달 후에 와도 되냐고.

그런데 의사가 멈칫하더니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당분간은 2주 간격으로 보자고 했다.

아... 이런 걸 조절해 주는 게 의사인가 보다.

환자는 빨리 치료받고 빨리 끝내고 싶어 하지만 의사는 진행 경과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조절해 주는 역할.

하긴 내 맘대로 가능했으면 애초에 환자가 아니었겠지. 

나를 환자라고 부르는 것도 전혀 신경이 안 쓰이는 걸 보면 정말 달라지긴 했다.


그래도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내 자연스러운 모습의 차이는 좀 아쉽다.

나도 우아~하고 고상~한 그런 여자가 되고 싶은데...

아무래도 나는 그런 사람은 못 되려 나보다.

내가 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질 못하니 여태껏 나를 사랑할 수 없었나.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런 내 모습.

이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활달하고 정신없고 재미있는 사람.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과 7번째 진료-약 증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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