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데 노바 / 아베이루 / 상 벤투 기차역과 렐루 서점
20년 만의 폭우 속 포르투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아니 지난밤부터 내린 비가 계속되고 있다. 숙소에서 준비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소품 가게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조용히 내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한다. 빗물이 길바닥을 휩쓸고 무섭게 내달린다. 가게 주인은 살면서 처음 보는 폭우라며 나를 못 나가게 한다. 가게 안에서 발이 묶인다.
갑작스럽게 뭔가를 마주할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할까. 건너편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뗏목을 구하든지 누구 등에 업히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니면 모든 경우의 수를 끌어안기로 하고 저 휩쓸리는 폭우 속으로 걸어 들어가든지. 세 평 남짓한 가게 안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일들이 '갑자기'인 경우가 많다는 생각에 봉착한다. 나는 지금 불안한가, 흥미로운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할 일을 찾아 나서야 하나… 결국 나는 비가 그칠 때까지 가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삶은 현실의 조건에 좌우된다. 꼼짝할 수 없다는 한계. 성장기에는 부모라는 한계, 성인이 된 후에는 주머니 사정에 부딪혀서 우리의 삶은 축소된다.
폭우가 내게 적의를 드러내는 중이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나는 더 이상 초조하지 않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삶은 보다 윤택해질 테니.
30여 분 지나자 빗발이 약해진다. 오후 1시다. 가게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황톳빛 빗물이 흘러내리는 언덕을 거슬러 오른다. 택시 몇 대가 사람 없는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빈 택시를 보자 마음이 흔들린다. 예정했던 도시 아베이루에 다녀올까…. 아베이루는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운하 마을이다. 아베이루에서 30분쯤 차를 몰면 줄무늬 마을, 코스타 데 노바에도 갈 수 있다. 해무 속에 선명한 색을 드러내고 있을 코스타 데 노바가 몹시 보고 싶다. 몸을 숙여 택시비가 얼마나 될지 묻는다. 어림하여 80유로쯤 나올 것이라 한다. 여행자센터에서 운영하는 투어를 예약하면 50유로에 다녀올 곳을 왕복 택시비로 160유로를 쓰게 생겼다. 폭우 속에서 할 일도 없고, 여행자센터 투어는 비로 취소되었으니 그곳에 가려면 돈을 투척하는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못 올 이 시간을 위해 돈을 쓰기로 한다.
줄무늬 마을 코스타 데 노바
택시가 빗속을 질주한다. 나는 기사에게 코스타 데 노바와 아베이루 운하 마을, 돌아오는 길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는 상 벤투 역에 들러 달라고 부탁한다. 택시 기사는 유쾌한 사람이다. 코스타 데 노바 가는 길에 미터기가 95유로를 넘는다. 그는 80유로라고 말했던 것에 미안해하며 미터기를 끈다. 택시 기사는 나의 하루를 책임질 듯이 운전하는 내내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낸다. 자신의 이야기, 가족 이야기, 내일은 가족 모임이라 일을 안 할 거라는 가장인 그의 소소한 삶의 얘기들. 옆집 아저씨 같은 그의 수다가 은근히 재미있다. 코스타 데 노바에 도착했을 때 다시 소나기가 퍼붓는다. 그러나 동화 같은 코스타 데 노바! 비조차 보석처럼 반짝인다. 우리는(어느새 우리가 되었다^^) 함께 차에서 내려 부랴부랴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안개 잦아 우중충할 수 있는 마을을 산뜻하게 치장해 주는 줄무늬 주택들, 코스타 데 노바.
아베이루 운하 마을
줄무늬가 선명한 코스타 데 노바를 지나자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베이루다. 바다 안쪽으로 이어진 운하 위에 아베이루 전통 배 몰리세이루가 흔들리며 떠 있다. 사공이 우리를 손짓으로 부른다. 나는 택시 기사와 만날 지점을 약속한 후 헤어져 배를 타는 대신 아베이루 시내 구경에 나선다. 비와 안개로 뒤덮인 바닷가 마을 아베이루. 텅 빈, 그림 같은 작은 마을을 흐느적흐느적 누빌 수 있는 건 분명 호사다. 그러나 흩뿌리며 내리는 비와 바람 사이를 걷는 일이 쉽지 않다. 산책은 짧게 끝난다.
포르투로 돌아가는 길, 기사가 도로변에 차를 세우더니 한 곳을 가리키며 포르투 특산 과자점이라 한다. 7유로를 내고 과자 한 박스를 산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감과 고구마를 섞은 듯한 잼이 들어 있다. 적당한 단맛에 바삭거리는 식감이 아드레날린을 자극한다.
폭우 속이 아니라면 아베이루에서 기차로 상 벤투 역에 내려 숙소로 돌아갈 수 있지만 난 이미 택시 안에 있다. 내일 남부 알부페이라로 가는 기차는 캄파냐 역에서 출발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는 상 벤투 역을 자칫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숙소에 도착하기 전 상 벤투 역 앞에 차를 세운다. 택시비로 200유로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린다(200유로라니! 속이 쓰리다). 여기서 숙소가 있는 오포르토 Oporto 거리까지는 걸어서 5분, 상 벤투를 둘러본 후 렐루 도서관까지 들러 숙소로 귀환하기로 한다. 렐루 서점도 숙소에서 멀지 않다. 비는 좀 약해져서 맞고 다닐 만하다.
포르투갈의 베니스라는 아베이루 운하마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 상벤투와
해리포터에 영감을 준 렐루 서점
비 오는 날의 역내는 어디나 어수선하다. 어디론가 떠나고 또 돌아오는 사람들의 비 묻은 발자국과 특별한 기억을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로 상 벤투는 어수선하다. 역내에는 포르투갈 역사를 표현한 2만 개가 넘는 아줄레주 타일 벽화(타일 위에 푸른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가 장식되어 있다. 고개를 꺾어 천장까지 닿아 있는 아줄레주를 감상하고 밖으로 나온다. 상 벤투 앞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14세기로 퇴행한 느낌에 빠진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고풍스러운 외관의 건물과 마주친다. 이 고급한 질감의 풍경이라니! 포르투에는 전쟁의 상흔도 없어서 도시가 옛 모습을 그대로 안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방'이라는 애칭의 렐루 도서관. 작은 공간이 책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아쉬운 건 책을 모두 테이프로 감아두어서 사거나 펼쳐 읽을 수가 없다. 도서관이라기보다 책으로 장식된 공간이라 불러야 맞지 싶다. 도서관 입장을 위해 예약은 필수다. 온라인 예약이 성가신 나는 예약하기 위해 줄을 길게 서고, 예약 후에도 서점 입구에 또다시 줄을 선다. 여행 성수기가 아닌데도 1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렐루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 후 유명세가 더해졌다니, 렐루보다도 한 사람 위대한 작가의 무게가 더 실감 나는 장소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초입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로'에 다녀온 나로서는 렐루의 감동이 좀 덜한 게 사실,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책방은 아르헨티나의 엘 아테네로다. 엘 아테네로는 오페라 극장을 서점으로 개조한, 책과 사람이 대접받는 공간이었다.
날은 어둑한데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비를 맞으며(우산은 아베이루 바람에 날이 꺾여버렸다) 오포르토 거리를 향해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