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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찾아서, 카스티야 라만차 기행 (1)

세르반테스 생가, 알칼라 데 에나레스

by 명진 이성숙


라만차 기행 루트:알칼라 데 에나레스- 엘 토보소 - 푸에르토 라피세 – 콘수에그라 – 마드리드


라 만차 기행 첫날


일찍 서두른다는 것이 결국 9시가 되어서야 호텔을 나선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8일 간을 걸었더니 체력이 떨어져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아직 여정이 길게 남았는데 벌써 지치다니 걱정이다. 컨디션도 보살필 겸 라만차 여행은 자동차로 떠나 본다. 카스티야 라만차는 톨레도를 기점으로 마드리드 남쪽에 넓게 펼쳐진 지역이다. 돈키호테 배경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고는 해도 아직 대중적 여행지는 아닌 모양으로 기차나 버스로 다니기는 좀 불편하다. 여러 날을 투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나처럼 바쁜 여행자라면 렌터카 여행이 좋겠다.

렌터카 오피스를 찾아 예약해 둔 자동차를 빌린다. 폭스바겐, 이틀간 보험료 포함 158유로. 보험은 풀 커버리지다.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 카스티야 라만차지만 가는 법이나 위치 등 정보가 미약하다. 이것저것 뒤적여 보다가 나는 일단 지도를 펼쳐 동선을 정한다. 라만차 여행출발점을 톨레도로 하는 사람이 많지만 톨레도는 미리 하루를 비워 다녀왔으므로 나는 세르반테스 생가가 있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향한다. 문제는 목적지 주소를 모른다는 것. 세르반테스 생가 주소를 못 찾은 나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라는 도시 이름만 지도에 찍어 길을 나선다. 빗발은 굵었다 가늘었다 하면서 운전하는 나를 쉬지 않고 따라온다.


세르반테스 생가, 알칼라 데 에나레스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는 마드리드 스페인 광장 남쪽으로 1시간 정도 운전하면 세르반테스의 고향 알칼라 데 에나레스다. 나는 고속도로 M-30을 따라가다 A-2로 갈아탄 후 사라고사 방향으로 조금 더 달린다. 28번 출구로 내려와 차를 세운다. 빗발은 굵어져 차창을 사정없이 때리고 도시는 낯설다. 상점은 닫혀 있고 행인은 보이지 않는다. 무작정 차에서 내린 나는 큰 도로를 벗어나 작은 길을 찾아 들어간다. 마을 안으로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걷다 가벼운 옷차림의 청년과 마주친다. 낯선 곳을 찾을 때는 발보다 입이 낫다. 나는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가, 세르반테스 생가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 영어를 잘 이해 못 한(내 영어 발음이 나빠서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세르반테스만 알아듣고서 길을 알려준다. 그의 말이 재미있다. 이 모퉁이를 돌아 쭉~ 가다 보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볼 수 있다. 그곳이 세르반테스 하우스라는 것. 10분을 더 걸어 모퉁이 두 개를 돌았을 때 사람들로 술렁이는 골목이 나타난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1965년, 이 집을 시에서 사들인 후 현재의 세르반테스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입장료도 없다.

길가 벤치에는 돈키호테와 배불뚝이 산초가 앉아 손님을 맞는다. 이들 사이에 끼어 사진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은 모두 4층.

집안에는 그와 가족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세르반테스의 서재가 그가 집필하던 당시 모습대로 전시되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세르반테스’ 스케치 액자와 돈키호테 줄거리를 그린 세르반테스의 그림을 발견한다. 이번 여행의 소득이다. 세르반테스를 시인 소설가 극작가로만 알고 있던 내가, 세르반테스가 그림도 잘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발사 겸 외과 의사였던 그의 부친이 환자를 보던 수술 의자와 침대가 있는 방을 지나 소박한 주방을 들여다본다. 지금과 달리 16세기 스페인에서 외과 의사는 상류층의 직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은 순수 기독교 혈통이 대접받던 시기다. 하급 귀족 가문 출신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던 세르반테스의 집안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던 듯하다. 세르반테스는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가난하고 불운했던 그의 전기를 잠시 들춰보자. 구글 검색창에 미겔 데 세르반테스를 입력한다. 1554년 빚으로 재산을 차압당한 가족이 이후 13년 동안이나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다닌다. 1570년 그의 나이 22세 때는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여 왼손 불구가 된다. 1575년에는 해적에게 잡혀 5년간 노예 생활을 하기도 한다. 전쟁 후 세금 징수원이자 성당의 밀 배급업자로 가난하게 살아가던 그는 세금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세비야의 한 감옥에 수감된다. 훗날 누명을 벗고 출소한다.

1585년 소설 『라 갈라테아』를 발표하나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1605년 감옥에서 자신의 불행에 영감을 얻어 쓰게 된 이야기, 『라만차의 현명한 신사 돈 키호테』가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역시 생활에 도움은 못 되었다. 1615년, 그는 『돈 키호테』 2부를 세상에 내놓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1616년 4월 23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오늘날 <돈키호테>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고전이라 한다.

“죽을 땐 현명한 사람이 되어 죽고 살 때는 미친 듯 살라”는 돈키호테의 묘비명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현실이었으리라. 미쳐서 살았고 제정신으로 죽은 세르반테스다.

해설자도 없고 벽면에 붙여 둔 설명은 스페인어 일색이다. 나는 ‘봉사 단청 구경’하듯 혼자서 이 방 저 방 돌아다닌다. 희한한 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든 게 이해되는 듯한 친숙한 느낌 속 브라우징이었다는 것이다. (전기 부분은 위키백과 참조)


세르반테스 생가 박물관 입구의 산초와 돈키호테 청동상


세르반테스 부친은 치과의사 였다. 그가 사용하던 치과 환자용 침대다.


그림을 그리는 세르반테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초상화


세르반테스 하우스 입구.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세르반테스 생가 박물관이 있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의 주택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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