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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찾아서, 카스티야 라 만차 기행(3)

콘수에그라

by 명진 이성숙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콘수에그라


셋째 날


푸에르토 라피세에서 꿈같은 하루를 즐긴 후 다시 가방을 챙겨 싣고 콘수에그라로 향한다. 콘수에그라는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여 덤벼들었던 풍차가 있는 마을이다. 카스티야 라 만차는 스페인 면적의 15.7%를 차지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스페인에서는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과 안달루시아 지방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자치 지방이라고 한다. 라 만차는 아랍어로 마른땅(Dry land)을 뜻한다. 드라이브 내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마른 평야와 낮은 구릉뿐이다. 이 황량함과 광활함이 주는 자유가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까...

벤타 델 키호테가 있던 푸에르토 라피세에서 콘수에그라까지는 20여 분 거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게으름을 부린 터라 좀 바빠졌다. 아침을 먹고 떠나려면 오전 10시는 되어야 한다. 오후에는 차를 반납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탄데르까지 기차여행을 하기로 했으므로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콘수에그라 가서 아침을 하자.



마을 입구부터 돈키호테 그라피티가 동네 벽을 장식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풍차는 산 꼭대기에 늘어서 있다. 다행히 길은 아스팔트로 잘 닦여 있어 산 위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겠는데, 주차장 앞에 다다르니 길을 막아 두었다. 공사 중.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간다. 주차장에서 꼭대기 풍차까지는 1km. 소설에도 등장하거니와 라 만차 지역은 바람이 많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1월의 바람이라니, 춥다. 모자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 찌르고 나는 뒤로 걷는다. 덜 춥다. 잠시 후, 바람이 쌩쌩 소리를 내며 귀 옆을 지난다. 다시 돌아선다. 하아~ 이렇게 춥고 비 오는 날 산에 오다니! 콧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콧물과 비바람과 전쟁을 치르듯 풍차를 향해 간다. 하긴, 바람이 많아야 풍차가 돌겠지...

라 만차 지역은 예로부터 보리와 밀 농사가 활발했고 수확한 곡식을 빻느라 풍차가 발달했다. 지금은 포도도 이 지역 대표 농산물로 자리 잡았다. 산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시멘트로 발라둔 물웅덩이가 있다. 풍차는 척박한 이 땅에 양수기 역할도 했던가 보다. 산 아래서 보이는, 능선 따라 나란히 늘어선 풍차들은 흑백 사진처럼 단순하고 담백하다. 저들을 거인이라 착각하여 결투를 벌인 돈키호테를 떠올리자니 싱겁기 그지없다. 콧물을 닦으며 드디어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가까이 와보니 풍차 크기가 만만치 않다. (흠, 싸움을 걸만하군!) 멀리서 작게 보이던 성곽도 가까이 가니 제법 크다. 이른 시간이라 성문이 닫혀 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너무 추운지라. 겉돌이만 한다. 이 성은 거인이 사는 집이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두 번째 거인의 몸통에 달린 문을 연다. 돈키호테 기념품과 샤프란 차를 파는 노인이 있다. 쬐꼬만 병에 든 샤프란이 33유로란다. 비싸게 느껴진다. 샤프란은 갖고 싶고... 나는 25유로에 흥정을 붙는다. 단박에 거절이다.


할아버지~ 나도 여기서 샤프란 팔고 싶어. 금방 부자 되겠는 걸?

안 돼 절대 안 돼, 샤프란은 라 만차 특산이야. 다른 데서 못 사, 2유로 깎아줄게.

나도 안 돼, 돈 없어.


노인과 나의 기싸움:)이 이어지다 우리는 27유로에 극적 타협을 본다. 값을 깎인 것이 억울한 노인이 돈키호테처럼 소리를 지른다.


마담~ 너무 싼 거야, 마담~ 너무 많이 깎았어, 마담~ 돈 많으면서 너무해... 마담~

ㅎㅎㅎㅎㅎ


겨우 6유로 깎은 걸 갖고 왜 저런담! 이 할아버지 악은 쓰는데 노기는 없다. 문을 나서는 내게 그가 행운을 빌어준다.


마담~ 해피 뉴 이어!

유 투 써얼!


유쾌한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

비바람에 눈물 콧물 범벅해 가며 다녀온 콘수에그라다. 살아 있는 날동안, 저 풍차들을, 이 바람을, 마담을 외치던 귀여운 노인을 잊을 수 있을까. 마드리드를 향해 차를 모는 내내,

눈앞엔 온통 한 폭 그림이 펼쳐져 있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비바람 헤치고 이틀을 달려 돈키호테 루트를 돌았다. 약간의 문학적 사치를 누리고자 시작한 여정인데 기대 이상으로 많이 거두었다. 예기치 않은 쌍무지개를 만났고 샤프란도 얻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는 한 사람 인걸의 장엄함도 보았다. 한 사람의 전기에 깊이 빠져본 적 없는 내게 '알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이런 걸 풍경이라 해야 하나 그림이라 해야 하나. 나로선 신박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이다!


라 만차 평원의 농가 모습. 마음의 평안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사람들, 인도는 이보더 더 평온하단 말인가. 구릉 위로 솟은 건물이 한 채도 없다.


일러스트 한 폭


풍차 아래로 라 만차 평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마드리드 가는 길,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아침을. 바람에 치여 제대로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컵을 붓드느라, 저 빵조각을 입에 넣느라 참으로 처절한 노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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