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토보소/ 푸에르토 라피세
라 만차 기행 루트:알칼라 데 에나레스- 엘 토보소 - 푸에르토 라피세 – 콘수에그라 – 마드리드
둘째 날
차를 돌려 엘 토보소로 향한다. 돈키호테가 사랑했던 둘시네아의 집이 그곳에 있다. 동네 입구에, 돈키호테가 둘시네아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장면의 청동 조각이 있다. 문득 둘시네아가 되어 누군가의 사랑의 맹세를 받고 싶어 진다. 오, 나의 둘시네아! 오 나의 돈키호테여!
돈은 남자를 뜻하고 키호테는 미치광이 또는 정력이 세다는 뜻의 은어다. 둘시네아는 알듯이 창녀다. 당시 창녀들에게 많이 쓰인 이름이 둘시네아란다. 그러나 이런 사실로 소설 속 환상을 깰 필요는 없다. 돈키호테는 이미 우리의 영웅이고 둘시네아는 그의 공주일 뿐이다.
엘 토보소에 도착하자 오후 4시가 넘는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굵은 비가 내린다. 길에 마주치는 사람도 없다. 동네를 이리저리 헤매며 둘시네아의 집을 찾는다. 어렵게 둘시네아 박물관 앞에 도착했으나 오늘은 일요일. 일요일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2시. 낭패다. 월요일 휴장이니 다음 날 가기도 틀렸다. 중세 시대 성을 재현해 두었다는, 그러니까 창녀 둘시네아가 아니라 공주 둘시네아로 되살려진 그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던 나는 크게 실망한다. 성벽 앞을 서성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애써 돌려 나온다.
다음 행선지는 푸에르토 라피세다. 돈키호테가 기사 서품식을 거행한 여관 벤타 델 키호테를 보러 간다. 차를 세운 곳은 까사 루랄 라 띠아 로라 Casa Rural La Tia LOLA 주차장이다. 푸에르토 라피세는 그야말로 스페인의 남부 시골 마을. 아니 중세 시대 시골마을이라 해야 하나. 낡은 집과 골목이 천 년 전 가옥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어느 골목에서라도 돈키호테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 까사 로라 하우스를 지나 좀 더 들어가면 돈 키호테가 머물렀던 여관 벤타 델 키호테가 보인다. 마당에는 우물과 돈키호테 조각상, 그리고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식당이 있고 2층엔 세르반테스 기념관으로 그의 유품과 집필실이 있다. 둘시네아 집을 못 보고 온 마음에 벤타 델 키호테에서 긴 시간을 보낸다. 운전하느라 점심도 거른 참이다. 1층 와이너리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하기로 하고 식사를 주문한다. 맥주와 와인, 물 한 병, 서비스로 나오는 올리브 열매 한 접시, 이름을 알 수 없는 요리 두 가지를 시킨다. 후식으로 특산 과자와 설탕이 잔뜩 올려진 튀긴 빵까지. 흐흠, 점심 거른 보상을 아낌없이 한 저녁이다. 흐뭇하다.
여기서 콘수에그라 까지는 북쪽으로 20여 분 거리, 저녁을 마치고 콘수에그라로 내달릴지 하루를 이곳에서 묵을지 생각한다. 이 작은 마을에 호텔이 있을까… 돈키호테를 닮은 깡마르고 긴 얼굴을 가진 식당 직원에게 묻는다. (정말이지 너무나 닮아서 같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마을에 숙소는 두 군데. 호텔 하나와 게스트 하우스가 있단다. 자고 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인터넷을 뒤적이니 호텔은 마을 중심에서 850 미터 떨어져 있고, 게스트 하우스는 이곳에서 100 미터 거리라고 쓰여 있다. 가격은 같다. 가까운 곳으로 하자. 숙소 예약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눈앞에 대형 쌍무지개가 떠 있다! 나는 더 이상의 감탄사를 찾지 못하고 허겁지겁 카메라를 꺼낸다. 쌍무지개라니! 이곳에서 쉬기로 한 건 행운인가 보다. 내 심장이 흥분한다. 돈키호테 머리 위로, 내 머리 위로, 마을을 감싸며 떠 있는 라만차 대평원의 대형 무지개를 향해 나는 얼마나 많은 셔터를 눌렀는지 모른다. 다가올 날들에 행운을 빌면서. 어릴 때 마당에서 보던 무지개, 그리고 몇 차례 하와이 여행에서 만난 무지개 외에 이리 크고 선명한 무지개를 보기는 처음이다. 숙소를 찾아오니 마을 초입에서 만났던 까사 로라다! 행운이 겹치는 것일까, 까사 로라는 스페인 농촌을 맘껏 느낄 수 있도록 정성껏 꾸며져 있다. 밤하늘 별조차 선명하다.
*내일 아침 일찍, 콘수에그라 풍차마을로 향한다.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여 전투를 벌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