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설국, 시마무라의 사랑이 조바심치던 곳
나리타를 다시 찾은 건 이십 년 만이다. 사방엔 하얀 고요가 내려앉았다. 타인의 기억에 새겨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랑에 이끌려 설국 행 열차를 매년 타야만 했던 시마무라, 시마무라에 이끌려(사실은 게이샤 고마코에 이끌렸던 것이지만) 설국을 그리워했던 나와 젊은 날 한때를 보냈던 치바현의 작은 시골 마을을 다시 찾은 나, 우리는 기억을 남기고 기억 속에 갇힌다.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세 시간 만에 나리타공항에 착륙했다. 짐을 찾아 청사 밖으로 나선다. 겨울의 나리타는 혹독하다. 그리고 차분하다.
혼자가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혼자가 된 것에 대한 희열로 바뀐다. 여행이란 멈춤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시간에 떠밀리지 않는 것. 시간은 더 이상 다음 미팅을 위해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또한, 해치워야 하는 회식과 회의, 며칠 지나면 의미가 사라지는 알 수 없는 명함, 공통점이 없는 사람끼리 동질감을 찾으려고 수없이 맞부딪힌 술잔, 그것들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순수하게 텅 빈 시간 속을 나는 내 속도로 걷는다. 시간이 제 속도로 흐른다. 여기서 JR 신칸센을 타면 설국까지 한 시간 사십 분에 닿는다. 먼 그리움이 이다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맹랑하게 느껴진다.
그리움이란 다른 그리움에 밀리며 사라지는 것. 나를 밀어냈던 그가 시마무라에게 밀린다. 시마무라는 위선적이지는 않았지, 적어도. 그러나 모른다. 솔직함으로 후벼지는 심장이 더 큰 상처를 입는지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이 허용한다고 했던가. 한 사내의 솔직함과 우유부단함을 지켜보면서 문득문득 절망과 마주했을 고마코의 시간은 한 줄의 미사여구도 허용되지 않을 폭력이었다. 솔직함의 광기와 달콤한 위선, 에로스와 타나토스, 그 변곡의 능선이 좀 더 아름다우면 안 될까.
짧게 끝나버린 인연도 그리움을 남기는 건지, 이기적이며 외설스럽고 독선과 위선을 품은 남자가 시마무라 앞에서 모습을 감춘다. 비열하고 종잡을 수 없던 한 남자가 떠난다.
도쿄 서쪽으로 한 시간 사십 분 거리의 니가타현, 츠치타루역이다. 마침내 설국, 시마무라의 사랑이 조바심치던 곳이다. 갈피를 못 잡던 그의 마음과 달리 공기가 비명처럼 날카롭고 차다. 이미 한 뼘은 쌓인 눈 위로 눈발까지 날리고 있어 몸이 저절로 떤다.
선명함뿐 아니라 모호함을 위해서도 눈은 내린다. 하필 흰 눈이 그렇게 쌓인 날, 그를 찻집에 남겨두고 거리로 나왔다. 폭풍이 대지에 앉은 눈을 한 번에 일으켜 세웠다.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듯 걷는 내 느린 발자국 위로도 눈이 덮였다. 맹렬한 그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걸었다.
내가 설국을 만난 건 믿기지 않지만, 초등학교 때였다. 학교에서 단체구매로 문고판 고전문학 전집을 샀는데 거기에 설국이 있었다. 연애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이에 읽은 설국은 내게 활자 이상의 의미가 없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읽은 후에도 고마코와 요코 사이에서 혼돈에 빠진 시마무라 때문에 나는 좀 언짢았었다. 여전히 소설에 대해 단편적인 이해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전무용비평가라는 그의 직업을 떠올리게 된 정도가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그리고 그를 비평이라는 명철함이 요구되는 영역보다 무용이라는 예술 장르에 가까이 두면서 그의 우유부단함을 심미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던 기억이다. 지금도 시마무라는 내게 지루함을 주는 남자다. 이 결정력 부족한 사내가 노벨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서사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그 모호한 태도가 깊고 푸른 설국에서 조우한 까닭이다. 두 살에 고아가 되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시마무라는 야스나리의 분신일지 모른다. 고독의 분신.
츠치타루역에 쓸쓸함을 묻고 수도사의 그것처럼 느리고 유장한 걸음으로 에치고 유자와로 돌아왔다. 시마무라를 사랑했던 가와바다 야스나리, 그가 설국을 쓰는 동안 찾았다는 에치고 유자와 온천에 몸을 담근다. 따스한 수온이 깊숙이 전신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윽고 감미로운 게이샤의 목소리처럼 섬세해진 물이 몸을 간지럽히고, 냉기에 노출되었던 혈관으로 졸음이 타고 오른다. 온천수의 하얀 김을 따라 그가 휘발한다. 머리칼과 눈동자, 핀셋으로 집은 듯한 콧날, 하얀 살점들, 그리고 그의 외피를 감싸고 있던 체크무늬 모직 셔츠와 두툼한 청바지, 앞코가 닳아 너절해진 가죽 구두…. 망각을 부추기는 흰 눈 속에서 나는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