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하루

느린 일기 - 아직 나를 토닥이는 빗소리가 남아있다

by 블랙스톤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하루종일 흐림 그리고 부슬비


일기가 점점 밀리고 있다. 이제는 일주일에 거의 한 편도 겨우 쓰는 듯하다. 몸이 피곤하니 머리도 멍해져서 그저 그런, 매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다시 직장인 마인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 느낌이 왔던 것들을 자꾸 잊어서 작은 메모장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닌다. 그 작은 메모장을 실수로 작업복과 함께 담아서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덕분에 메모장이 얼룩지고 땀에 불어 약간 울룩불룩해졌다. 그걸 보는데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 아직 열심히 하고 있나 보다.


메모를 통해 일기를 적기 시작하면서 퇴근할 때면 메모장을 들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적곤 한다. 그러다가 뭔가 일기를 쓰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그럼 그냥 손이 가는 대로 계속해서 아무거나 적는다. 그런 아무 말 대잔치 속에서 하루의 일기를 챙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수첩에 적어놓은 메모들을 볼 때마다 밀린 숙제를 보는 기분이라 씁쓸해진다.

하아, 이 나이에 밀린 일기라니.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쉬는 날이어서 느지막이 일어났고 눈도 뜨기 전에 들려오는 빗소리에 가만히 눈을 감은 상태로 한참이나 더 누워있었다.


나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언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배가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뛸 수가 없어서 그대로 비를 다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옷을 벗을 겨를도 없이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 보니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은 당연히 집에 없었고 동생은 진작 하교했다가 학원에 간 상태였다. 몸에 착 달라붙은 옷을 벗는데 하나씩 옷을 벗을 때마다 텅 빈 집에서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뜨거운 물로 씻고 장롱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푹 덮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부모님은 감기 기운이 있거나 체한 기가 보이면 항상 땀을 낼 수 있도록 두꺼운 이불을 내주시곤 했다.

-약을 먹고 한참 땀을 내고 나면 금방 배가 고프고 아픈 것들이 나아지곤 했다.


그 계절이 겨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여름도 아닌 그사이의 어디쯤이었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도 왠지 땀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창가에 타타타탁 하고 부딪히는 빗소리가 약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닥타닥하고 들려오는 그 소리가 왠지 내가 덮고 있는 이 두꺼운 이불을, 이불을 감싼 창문을, 토닥토닥 소리를 내가며 가만히 두드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을 토닥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참이나 자고 일어나니 이불에는 땀자국이 한가득이었고 하늘은 개어 있었다.

그 비가 나를 토닥이다가 이불에 스며든 것만 같아 한참을 쓰다듬었다.


그날 이후로 빗소리가 토닥이는 소리처럼 들릴 때까지 숨을 죽이고 들어보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가끔 나는 충동적으로 우산을 쓰지 않고 빗속을 걸어보곤 했다. 어차피 학교는 교복을 입고 다니니 사복쯤 얼마든지 젖어도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걷는 빗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떠다니곤 했다

소나기에 급하게 뛰어가느라 놓쳐버린 물건들처럼 그저 처마 밑에서 밖만 내다보는 사람들,

경사진 언덕에서 빗물에 떠내려가는 물건들처럼 흔들리며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들,

가다가 멈추고 멈췄다 뛰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한편에 아예 자리 잡는 사람들,

그 사이로 흐르는 그 어수선함, 그게 마음에 들었다. 무엇 하나 능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사람들의 그 어설픈 모습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 사이를 차분히 지나다 보면 그런 사람들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떠 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떠다니는 말풍선이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이래서 비가 오면 머리에 꽃을 달고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그 재미있는 놀이를 이제는 할 수가 없다.

비를 한참이나 맞고 나면 몸이 아픈 것도 문제지만 이제는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더욱 크다.

-웃어넘기던 일들이 웃어넘길 수 없는 일들이 되면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다.


가끔은 내가 무엇과 머리숱을 바꾼 것인가 고민해보곤 한다.

-기억이 켜켜이 쌓여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쌓여 인생이 되는 걸 생각한다면, 내가 머리숱과 바꾼 것은 '나'를 지탱하는 축이겠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자라나라! 머리머리!


그래도 아직 나를 토닥이는 빗소리가 남아있다.

토닥이는 빗소리와 켜켜이 쌓인 추억 같은 이불속은 내게 빛바랜 추억 속을 가만히 더듬어 색을 칠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곤 한다.

그래.

오늘은 게으름을 피웠다.

하루 종일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게으름 피운 걸 좀 길게 써봤다.

그래도 이불속은 너무 따뜻해서, 추억까지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 빗소리에 감사했다.

하루 동안 켜켜이 쌓인 추억 속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느낀 날이었다.





오늘 일은 내일로 미루자
막연한 미래도 이 불안한 현실도
하루만 더 뒤로 미루자
-바이브 Vibe, 『ABOUT ME』앨범, 2018.10.10,
「쉬고 싶다」중에서





몸도 마음도 다시 회사에 다니듯이 그저 습관적으로 살아가려 할 때 다행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의자에 앉아 내 방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저 소리에서 느껴졌던 따뜻함, 그래. 그런 걸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일을 그만뒀던 거다. 그저 일만 하고 살고 싶지 않아서.

그럼에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해야 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것 이외에 앞으로의 것들까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하나를 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를 해야 하고, 그 또 다른 하나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하나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처음의 하나를 위해서 참고 견디고 버티는 거다. 그렇게 버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가족일 수도 애인일 수도 꿈일 수도 있겠지. 결국 내게 휴식이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강철도 끊임없이 때리기만 하면 끊어져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