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일기 - 돌아와야 또 놀러 갈 수 있으니
2023년 7월 5일 수요일
눈 떴을 때부터 잠이 들 때까지 계속 비
돌아와 봐야 일하기 바쁠 거라는 걸 알기에 돌아오기 싫었지만 돌아와야 또 놀러 갈 수 있으니 별수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고민은 고민이고 노는 건 노는 거라서, 아주 돌아오기 싫어서 돌아버릴 뻔.
하루만 더를 되뇌던 여행이 끝났다. 돌아와 출근한 지 하루가 지난 둘째 날, 비가 하루 종일 내린다.
여행 중에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양말이 충분히 젖은 상태로 출근해 일하며 말리고 다시 충분히 젖으며 퇴근하는 하루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비가 오니 시원하겠지 싶었던 것은 내 상상뿐이었다. 비가 오니 습기가 가득해졌고 아직 온도는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고 창문 없이 뻥 뚫려 있는 현장이라 비에 젖으면 안 되는 부분에는 외부에 비닐을 감싸놨다. 그야말로 비닐하우스 혹은 뚜껑 닫은 상태로 가열된 냄비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더운데 습기 찬 현상, 이런 곳을 우리는 사우나라고 부르곤 하지 않나? 돌아오기 싫은데 돌아와 보니 날씨마저 돌아버리게 하는 날이었다.
더우나 마나 일은 해야 하고 시간은 지나간다.
물을 몇 통이나 먹어가며 일을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워낙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몸에선 쉰내가 풀풀 풍겼다. 스스로 땀 냄새가 고약하게 맡아질 지경이면 옆에 사람은 숨도 못 쉬겠다 싶어서 지하철 차량 칸 사이의 연결통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환승할 역에 도착해서 유리문을 열고 얼른 내리는데 노약자석의 할아버지가 코를 감싸 쥐셨다.
환승을 위해 움직이면서도 할아버지가 내뱉은 나지막한 욕설이 귓가에 맴돌았다. 모르는 이의 욕설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남을 생각한 배려가 그 상대에게는 배려가 아닐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내 냄새를 맡아봤다. 욕을 먹어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나라는 냄새나는 아저씨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왜 그 열차 사이에 가만히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면 당연히 욕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 욕을 뱉은 당사자가 나이 지긋한 노신사이기에, 산전수전을 겪었을 노인이기에 웃음이 나는 거다.
하긴 이런 냄새가 갑자기 코에 바로 꽂혔는데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백전노장이신 거다. 나에게만 들릴락 말락 한 그 낮은 욕설은 최대한의 인내심이었을 거다. 그 할아버지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왠지 우스워서 집으로 가는 내내 혼자 키득거렸다.
냄새나는 아저씨가 혼자 연결통로에 서서 키득거리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기피대상이 되었다. 도착역에서 내리며 혹시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길까 기대했지만 내가 혼자 히죽거리는 모습에 사람들이 거리를 둬서 별 일 없이 내릴 수 있었다.
상황과 상황이 만나고 저마다의 사정들이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든 생길 수 있는 게 사는 거다. 새삼 작은 상황들이 맞물리면 그것이 사건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하루였다. 그런 작은 이야기들이 내게 생각할 거리와 추억들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의 날씨와 힘들었던 근무는 벌써 희미해졌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하고 나오는 길에 새삼스럽게 희한한 깨달음을 얻게 된 이 냄새나는 상황이 하루를 재미있게 했다. 그리고 난 이 냄새나는 하루를 한동안 기억하고 우스갯소리의 대상으로 삼게 되겠지.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하루가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이 냄새나는 하루에서 만약 할아버지께서 대뜸 소리를 질렀다면 전혀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내게 고의성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혼잣말로 갈음해 주신 할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건 전적으로 할아버지 덕에 얻게 된 재미난 하루니까.
이 웃긴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어 지하철에서 내려 바로 어머니의 세탁소로 갔다.
어머니는 비와 땀에 말랐다 젖어버린 옷과 소금기 떨어지는 마빡을 가지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코를 막고 다급하게 손짓하셨다.
손님 찾아갈 옷에 냄새 묻히지 마!
훠이! 훠이!
-왠지 울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직업정신이 아주 투철하신 어머니다. 정말.
-한편으로는 '아들을 쫓아낼 냄새인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혼잣말하는 걸로 끝내신 거지? 대단하신 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재미를 말할 곳이 없어지자 조금은 시무룩해졌다. 일기에라도 꼭 써야지 싶어 집에 가는 길에 열심히 메모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고민해 봤자 도움이 안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세상은 살아가게 되어 있어.
생각하면 할수록, 모든 일은 그 자체로 놔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놔둬야 해.
왜냐면 만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거니까.
거의 항상 그래.
영화『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중에서
어떻게든 흘러가고 그렇게 흘러가 만나는 곳들마다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된다. 고민하고 방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고민은 있을 테고 심지어 종교에 귀의한 스님이나 신부님도 고민은 있을 테니까. 그래서 조금 가볍게 생각하려 노력 중이다. 하루를 최대한 충실하게 살고 도저히 견디기 힘든 날에는 미친 듯이 욕을 하며 지낼 생각이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다 보면 또 다른 뭔가가 보이겠지. 발판이 너무 낮아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발판을 더 쌓는 수밖에는 없으니.
어차피 고민은 해결이 어렵기에 고민이 되는 거고 이번 경우는 그저 내가 일을 잘 배우지 못해 생기는 일들이니 해결 방법은 명확하다. 내가 일을 잘하면 된다! 아니, 이렇게 명확할 수가. 잠깐 허공에 욕 좀 하고. 일 못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싶지만, 어쨌든 그게 잘 안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시선은 조금 다른 곳에 두고 최대한 시간에 기대에 버티고 배우는 수밖에. 어쩔 수 있나. 느리면 느린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 거다. 멈추지만 않고 꾸준하게 그리고 시간에 눌려 문드러지지만 않게. 힘들 때면 처음 시작했던 바다를 떠올리면서 그렇게 차근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