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퇴사를 해봐도 출근은 하기 싫다

느린 일기 - 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by 블랙스톤

2023년 7월 17일 월요일

비 내리고 습기 차오르는 하루


비가 오는데도 빨래를 해야 하는 날이 있다. 분명 옷이 꿉꿉할 테고 냄새가 날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입을 옷이 없거나 세탁기가 꽉 차 있거나 내일부터 집을 비워야 하거나 하는, 여러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다.

연달아 이어진 여행은 행복한 추억을 주었지만 일상에는 악영향을 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출근이 이어졌기에 당장 내일 입을 작업복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분명 쉬는 일요일이 있었지만 자다가 일어나 보니 월요일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쉬는 월요일이란 것이고 불행인 것은 내일은 다시 출근이란 것이다. 분명 빠르게 마르지 않을 날씨이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부터 돌렸다.

-분명 쉬는 날인데 출근하는 날처럼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빨래를 돌리고 널어야 하니까.


일어난 김에 방 청소를 하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빗소리를 듣다가 책도 조금 읽었다.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성큼 가까워 오는 내일에 초조해지기만 했다. 한숨을 내쉬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나는 맛없는 음식을 먼저 먹어치운다. 그러고 나서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는 편인데 사실 일상에서는 그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하기 싫은 것들을 먼저 처리해보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의 빨래 같이 어쩔 수 없는 순간까지 미뤘다가 하기 싫은 것을 해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무리 급한 순간에도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하지 않을 핑계를 만들려는 나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싫은 일은 제일 먼저 붙잡아보곤 한다.

물론 그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음식과는 다르게 일이란 것은 미뤄둔다고 해서 계속 좋은 일일 수도 없고 빨리 해치우고 나면 다시 하기 싫은 일들이 생겨날 수도 있더라.


오늘만 해도 비가 그칠 듯 그칠 듯 그치지 않았고 동사무소, 구청, 보건소를 차례로 들러야 했기에 빗속을 돌아다녔다. 하루에 처리하기 위해 쉬는 날을 맞춘 것인데 비가 하루 종일 내릴 줄이야. 점차 젖어가는 양말과 신발을 느끼면서 더 이상 미루지 않아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집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 비가 그치기 전까지만.

젖은 양말을 벗겠다고 낑낑거리며 벽에 기대 있는데 뭔가 이질감이 들어 고개를 드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사라져 있었다. 아직 오전에 머물러 있는 시간. 항상 후회가 제일 먼저 찾아오기에 세탁기 돌리고 좀 더 잘걸 그랬다는 말과 욕이 버무려져 나오고 이후에 짜증이 뒤쫓아왔다. 열이 뻗치는 내게 젖은 옷이 차갑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한숨을 두어 번 내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지. 뭐.

억울한 마음은 뒤로하고 일단 씻었다. 씻고 나오니 이상하게 바닥이 더러워 보여 집청소도 후딱 해치웠다. 대략 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베란다에서 다시 내리는 비 사이로 걷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빗방울이 꽤 거세다. 그들의 바지단에는 튀어 오른 빗방울들이 한가득 매달려 있을 것이다. 젖어드는 바지와 신발을 끌고 그들은 어디론가 걷고 있다. 이 빗속을 뚫고 반드시 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왠지 그들은 모두 무표정일 것만 같았다. 입을 댓 발이나 내밀고 투덜거리던 나와는 다르게.


비에 가려져 그들은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 아득한 거리감 덕분에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비에 가려진 거리감 덕분에 그들의 몸짓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한참이나 집중해야 했고 나는 그들의 몸짓에 어떤 감정도 이입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마음을 쓰지 않았기에 나의 감정은 조금씩 휘발이 되었다. 가끔은 이런 단순한 환기에도 휘발되어 버리는 단순한 내 마음이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짜증과 억울함과 기타의 불합리하다 느끼던 감정이 휘발되자 창 밖의 이들을 바라보던 내 마음에서 또 다른 감정이 고개를 들어왔다. 아주 작은 감상이었다. 그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공통점에 대한 감상.


어쩌면 우린 어렸을 때부터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훈련을 받아왔는지 모른다. 조금씩 싫은 것들과 억지로 타협하는 것. 그렇게 조금씩 자라왔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하기 싫다고 십 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뛰쳐나와 다른 일을 하는 나는 언제쯤 철이 들고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떼온 서류와 함께 얼른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베란다에서 돌아선 나는 일단 컴퓨터부터 켰다. 서류를 맞게 잘 떼온 건지 신청서를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를 확인한다. 출발 전에 확인했던 부분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문제 될 부분이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신청서를 붙잡았다. 다행히 인터넷에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안내되어 있었다. 주의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 가며 신청서를 적는다.

오늘까지 작성해서 보내야 하니 급한 건 알지만 틀렸는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어떻게 바로 보내.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는 꼭 뭔가 사달이 나기에 틀리지 않게 더 주의해야 한다. 건성건성으로 했다가 괜히 노력만 하고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된다. 그건 또 싫다.

-하기 싫은 걸 두 번 하는 꼴은 내가 못 본다. 하기 싫으면 정확하게 한 번에 끝내야만 한다. 아님 욕 나온다.





붉은 여왕이 소리쳤다.

“어서! 어서! 더 빨리! 더 빨리!”

두 사람의 발걸음은 너무 빨라서 발을 땅에 딛지도 않고 바람을 가르는 듯이 보였다. 그러다 엘리스가 온몸에서 힘이 다 빠지려는 즈음에 갑자기 멈춰 섰다. 앨리스는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져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붉은 여왕은 엘리스를 일으켜 세워 나무에 기대게 하고선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좀 쉬어라.”

엘리스는 주위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우리가 내내 이 나무 아래에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게 아까 그대로잖아요!”

붉은 여왕이 말했다.

“물론이지. 그럼 어디를 기대했는데?”

엘리스는 여전히 숨을 가쁘게 내쉬며 말했다.

“글쎄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빨리 달리면 보통 다른 곳에 가 있거든요.”

붉은 여왕이 말했다.

“굼벵이 같은 나라구나. 여기선 보다시피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적어도 이것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고!”
-루이스 캐럴, 번역 김경미,『거울나라의 엘리스』, 비룡소, 2010, 「살아 있는 꽃들의 정원」중에서





제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정도로 달려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빚을 져가며 집을 사고 직장에 매달리며 차를 굴린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올려 가치를 높인다. 연봉을 높인다.

앨리스처럼 이곳을 그저 스치지나가 현실로 도망가고만 싶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고 누군가를 따라 현실로 돌아가면 그저 낮잠을 자고 있었을 뿐인, 그런 꿈속의 공간이길 바란다. 그런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충실히 오늘의 일을 하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든다.

어쩌면 우리는 이 이상한 나라에 너무 충실해졌는지 모른다. 숨이 턱까지 차야 이제 좀 한 것만 같은 그런 노력들이 우리에겐 너무 당연하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생이란 이름으로 밤까지 공부를 하고 학교와 학원을 오간다. 남들은 다 하는데 나는 안 할 수가 없으니 계속한다. 남들 다 하니 나도 하는 그런 세상에서는 갑자기 안 한다고 손을 놓는 놈이 이상한 거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버리고 말 거다.


나는 그런 게임에서 뒤로 밀리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죽어라 뛰기도 싫었다. 전형적인 불평분자였던 나는 안 뛰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닌 상태로 떠밀리며 설렁설렁 뛰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이미 삼십을 넘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보지도 못했으며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대로는 떠밀려서 육십, 정년까지 가고 나서 일에서 쫓겨난 후에야 해야 할 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 같아 무서워졌다.

겁을 잔뜩 먹은 나는 뭔가를 해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해본 사람이나 잘하는 거더라.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취미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더라. 동호회를 몇 번 나가보고 모임도 찾아다녔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무언가를 배우고 금방 열정을 잃는 일들이 반복됐다.


그리고 나는 마흔, 무언가 중요한 나이가 되었다.

남들이 다 중요한 나이라고 말해주었고 마흔쯤에는 다들 결혼하고 애도 있는 나이더라. 요즘에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흔에 도달했다는 거다. 다시 한번 겁이 났다. 그리고 야간 근무를 하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던 그 추운 겨울 새벽길에 가로등 아래 혼자 있는 내 그림자와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새벽 골목을 혼자 걷는 것이 고요해서 좋으면서도 뭔가가 뒤에 있을 것만 같아 무서웠다.


하기 싫은 거만 평생 하다 죽을 거라면 해보고 싶은 것은 좀 찾아보자. 뭔가를 나도 잘하는 게 있겠지. 뭔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도 있겠지. 하는 게 힘들면서도 재밌어 죽을 만큼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꼭 영화나 책에만 있을 리는 없다. 내게도 그런 게 하나쯤은 있겠지.

그렇게 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벗어난 곳도 이상한 나라겠지만 뭐 어떤가. 한 번 해보는 게 어려운 거지 두 번부터는 쉽더라. 정 안되면 다 때려치워보지 뭐.

-그렇게 나온 곳에서도 나는 출근 중이다. 지긋지긋해하면서. 아, 새로운 일 배우기 드럽게 힘들다.

-그래도 뭔가 가슴 한 구석은 좀 편안하다. 뭔가를 내 의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아직 세상에 덜 맞아서 그렇겠지. 자조적으로 혼잣말을 하면서도 괜히 실실거린다. 솔직히 좀 재미있다.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는 이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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