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여행

느린 일기 - 가장 어리던 시절 가장 어리숙했던 모습을 함께 기억하는

by 블랙스톤

2023년 7월 9일 일요일

시커먼 구름 잔뜩 가끔 빗방울이 톡톡


미리 예정되었던 남해 여행을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친구들은 숨 쉬듯이 뇌를 거치지 않은 헛소리를 신나게 내뱉는다. 비가 오든 말든 일단 모여서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리다가 미리 잡아놓은 펜션을 향해 달린다.

노래가 신나지 않는다고 선곡 담당하는 녀석을 타박하다가 휴게소에 들러 간단하지만 비싼 음식도 좀 먹고, 추억의 여행 노래를 합창하며 춤도 추고, 비가 내리지 않는 곳에 내려 잠시 풍광도 둘러보았다. 어차피 세시까지만 펜션에 들어가면 되니 새벽에 출발해 서울만 빠져나오면 그때부터야 여유만만하게 가기만 하면 된다.

-서울은 매번 출발할 때마다 너무 막혀서 여행 기분을 잡치게 한다. 해서 새벽에 야반도주하듯이 출발하면 텅 빈 거리에 괜히 들뜨곤 한다.


내비게이션에서 알려주었던 도착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지만 크게 신경 쓸 것 없이 내려가다 맛있다는 음식도 좀 찾아봤다. 비가 와서 많은 곳을 둘러보기는 힘들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차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맞춰 감상에도 잠겨보고 추억에 잠긴 김에 친구들의 전 여자친구 이야기도 좀 꺼내보고.

일단 다른 것은 다 둘째치고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의 시간 동안 현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저 눈 뜬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내가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과 낄낄대며 놀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다.

일상에서의 우리는 이제 나이와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릴 적에 본 만화, 개구리 왕눈이의 여자친구 이름이 아름이냐 아로미냐로 진지하게 다툴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다.

-애처럼 굴어도 순수하게 받아주는 이들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물론 얄미울 때가 더 많지만.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떠나는 여행이라 조금 물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 중간에 끼었던 일상이 오히려 꿈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혼자 지내는 시간을 좋아한다. 더불어 일 년이면 서너 번씩 함께 여행을 가는 이 친구들과의 시간도 굉장히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이들과의 여행은 추억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기에 더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이들과의 대화는 항상 어디로 튈지 몰라 긴장이 된다. 한 번도 좋은 말은 해주지 않고 계속 툴툴대고 서로 찔러대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같은 편에서 서서 방법을 함께 찾아준다. 내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이들과의 시간이 나쁠 리 없다. 게다가 그런 이들이 말이 통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오늘도 네비를 잘못 봐서 펜션 앞을 두 번이나 돌았다. 바로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욕들과, 지도를 못 보면 네비 목소리라도 잘 들어야 하는데 죽어도 남의 이야기는 안 듣는다는 외침과, 저렇게 길을 못 찾으니 인생도 저 모양으로 꼬였다는 내 귀에 다 들리는 중얼거림과, 다음 여행에는 꼭 나를 두고 오자는 다짐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룸미러 안의 녀석들은 일사불란하게 핸드폰으로 주소를 확인한 후 다시금 욕과 함께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적고 보니 전혀 같은 편이 아닌 것만 같다 전화해서 욕이나 한 사바리하고 끊어야겠다.


언제나 내 편인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가끔은 가족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난 우리 가족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그래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나면 괜히 스스로 서러워지곤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침을 흘리고 자다가 볼에 교과서가 붙은 상태로 깨어나던, 멋진 폼으로 운동해 보겠다고 하다가 엉뚱하게 팔다리를 부러 먹던, 첫사랑에 실패하고 펑펑 울던, 입대하던 날 논산훈련소까지 따라와서 길 잃어먹던, 가장 어리던 시절 가장 어리숙했던 모습을 함께 기억하는 '애송이' 같은 친구들 앞에서는 조금 편하게 행동할 수 있다. 서로의 멍청한 면을 정확하게 보며 자라온 이 친구들은 나에 대한 기대감 수준이 굉장히 낮기도 하고.


이제는 마흔,

서로가 모두에게 든든한 등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기.

그 등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를 알고 있는 시기.

그 얼굴에 흐르는 것들을 보이는 것이 왠지 자존심 상하는 시기.

그런 자존심을 세우지 않을 수 있는 친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

우리는 서로가 소중한 것을 알기에 조금은 함부로 대하고 소중히 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

물론 쉽진 않아서 우리끼리도 상처를 받고 입히기도 한다.

-이 부분이 가장 힘든 것이 누구보다 친하지만 말하지 않아 몰랐던 것이 묵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함께 한 시간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기에 아직은 시시덕거리면서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얻게 된 지위나 체면 따위 이 녀석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매번 낯선 골목을 지나고 어떤 것이 있을지 모르는 곳을 향하는 여행이 무섭거나 힘들지 않고 그저 우습고 흥미진진할 수 있었다. 추억과 웃음이 반복되는 여행을 위해서라도 그저 참기만 해야 하는 일상을 지나갈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철없이 모여서 낄낄대며 다닌다고 혼나기는 한다. 나잇값 좀 하라고. 그건 이미 그른 것 같아요. 어머니.


세 번째로 펜션 앞을 돌 때쯤에는 손을 사용하기 시작한 놈들 때문에 뒤통수에 불이 나기 시작했고 내 입도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훈훈하게 끝낼 수가 없게 만드는 놈들이다.

-역시 친구보다는 가족이 최고다! 아니, 입구가 없잖아! 이 자식들아! 좁은 골목에 뒤차가 쫓아오는데 여기서 어떻게 비켜줘! 사장님한테 전화하라고! 나 괴롭히지 말고!





하루하루 내가 무얼 하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거진 엇비슷한 의식주로 나는 만족하더군
은근히 자라난 나의 손톱을 보니 난 뭔가 달라져가고
여위어가는 너의 모습을 보니 너도 뭔가 으음
꿈을 꾸고 사랑하고 즐거웠던 수많은 날들이
항상 아득하게 기억에 남아 멍한 웃음을 짓게 하네
그래 멀리 떠나자 외로움을 지워보자
그래 멀리 떠나자 그리움을 만나보자
어떤날,『어떤날 II』앨범, 1989.06.20.「출발」중에서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이란 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살아갈 힘을 얻게 한다. 하물며 그것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더 큰 힘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과의 여행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다른 이들과의 여행도 여행 자체로 신나는 일이지만 오래된 친구들과의 여행은 그 느낌이 남다르다.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에 추억이 가미된 신기한 기분. 어딜 가도 옛이야기들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줄줄 새어 나오고 여행지에서 웃긴 표정으로 찍힌 사진 하나에 몇 시간이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웃어댈 수 있는 이들. 몇 십 년째 같은 추억 이야기를 하며 웃어대는 우리들이다. 그런 새로운 추억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앞으로 있을 일들까지 떠올리며 배꼽 빠지게 웃곤 한다. 서로의 흑역사가 다 추억이 되는 시기가 온 것에 신기해하면서.

함께 한 시간만큼 함께 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추억에 매몰되어 그저 과거만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가끔씩 이렇게 서로를 회복시켜 주는 여행을 종종 다니며 그저 곁에 서로가 서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함께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또 그것이 새로운 추억이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을 그리며 일상을 살아갈 힘이 되어 줄 것임을 알기에. 현실에서는 항상 곁에 있지는 않아도 함께 할 여행을 그리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 한편이 든든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 믿음직스러운 친구 놈들아.

뒤통수 좀 그만 때려! 나 운전자라고!

-이번에 간 펜션은 마을 공용 주차장을 이용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차는 진입할 수 없었다. 그럼 내 뒤통수는 왜 얼얼해진 거냐. 그러니까 빨리 펜션에 전화해 보랬지. 어휴. 화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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