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아요

느린 일기 - '햇볕에 녹아 방바닥에 흘러내렸다'라고 표현할 만한 하루들

by 블랙스톤

2023년 8월 14일 월요일

은은하게 구름 낀 날씨, 그래도 여름이라 더움


현장에 자재가 떨어진 데다 주문도 늦어져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일종의 휴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집에 늘어져 있었다. 해가 쨍쨍했다면 '햇볕에 녹아 방바닥에 흘러내렸다'라고 표현할 만한 하루들. 더위에 늘어진 몸을 겨우 일으켜 일단 찬물로 샤워부터 하고 컴퓨터에 앉았다. 웹서핑을 좀 하다가 책상 옆에 놓인 책도 좀 읽고 다시 보기로 보고 싶었던 스포츠 경기를 보았다. 그러다 졸리면 침대에 누워 낮잠도 자고.

-바야흐로! 이것이야말로 휴가! 더워서 내내 헥헥거려도 좋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도 아직 쉬는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에서 기분 최고다!


모르는 사람에게서 카톡이 왔다. 친구 목록을 정리하다 누군가 싶어서 연락했다고. 이게 뭔 헛소리야, 피싱인가? 싶으면서도 혹시나 아닐까 봐 답을 했다. 링크가 같이 날아왔다면 무시했겠지만 일단 그런 건 아니었고 혹시나 내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 누군지 확인이나 하자 싶었다.

자기가 운동하는 사람인데 회원인가 싶었단다. 그러려니 하면서 누군지 확인해 보겠다고 프로필을 찍어보니,

얼레? 이쁘고 몸매 좋은 사람이 나오더라.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군.

-이 대목에서 조금 서글퍼졌다. 단호하게 확신할 수 있는 포인트가 이런 거라니. 참.


이후의 대화는 뻔했다.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편할 때도 있으니 톡을 하자. 나이는 어떻게 되냐. 지역은 어떻게 되냐 등등. 인적 사항 질문으로 들어오면서 그냥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웹서핑에도 책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설마 싶어서 뒤져보니 일 이야기가 아닌 카톡은 삼일 만에 피싱이 처음이더라.


갑자기 웃음이 났다.

너무 친하다 보니 오히려 술 먹자 외에는 연락을 안 하는 동네 친구들,

민감한 이야기도 곧잘 할 수 있지만 그러다 보니 헛소리는 하기 꺼려지는 친한 대학교 애들,

-잘못 이야기하면 소문 퍼진다. 오히려 민감한 이야기는 덮어주면서 헛소리 찍찍하는 건 그냥 퍼지더라.


오늘은 무얼 먹었고 어떤 걸 느꼈으며 뭘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걱정 폭풍이 돌아올 수 있다. 동네 애들에게 말할 수도 있다만 술자리에서 갱년기 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실제로 이전에 살가운 카톡 몇 번 했더니 바로 뭔 일 있냐고 카톡 오더라.


소소하게 일상을 이야기해 본 것이 참 오래됐다. 주변에 오래된 관계의 사람들 밖에 없기 때문인지 할 말이 없으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내 주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십 년 이상 만난 이들이기 때문인지 목적성이 뚜렷하다. 동네 친구들은 힘든 이야기, 대학 친구들은 우스갯소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 그럼에도 나는 크게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런 것들에 둔감했기에 현재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거긴 하겠지만 현실을 직시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소소한 이야기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한 이야기들이 쌓이면 무엇보다도 무거운 문제로 변하게 되니까. 변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는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공책과 펜을 꺼냈다. 메모해 둔 것을 꺼내 일기의 뼈대를 잡고 거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적어 넣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다 보니 금세 분량이 늘어난다. 일기는 일기에서 끝나지 않고 푸념과 하고 싶은 것과 원하는 것들로 뻗어나갔다. 한참이나 적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적나라한 욕망이 득실거리는 공책을 덮었다. 일기는 조금 욕망이 가라앉으면 다시 글의 형태로 수정해서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개운해져 크게 기지개를 켜다가 웃음이 터졌다. 원인을 알고 일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니 개운해지는 게 조금 우스웠다. 임시방편이라 생각하고 혼자서 마음을 털어내는 메모를 하기 시작한 게 벌써 오 년이 넘어간다. 어딜 봐서 이게 임시방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구름이 꼈음에도 날이 밝아 잠깐 동네 산책을 하고 저녁을 먹고 씻고 누웠다. 그리고 가만히 오늘을 회상해 보았다. 나를 돌아보았고 후회했으며 사람이 필요하다 느껴놓고는 혼자서 일기에다 하고 싶은 말을 우다다 적어내고 편안해졌다. 후회도 빠르고 풀어내는 것도 너무 빨라서 오늘을 되돌려보았을 때 나조차도 이게 뭔가 싶었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마음을 풀어내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힘들어하는지도.

-혼자 있음에도 심심하지 않다. 멍 때리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공상이나 망상도 좋다.

-나는 혼자 있는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다.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는 완전한 휴식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잠들기 전 가만히 침대에 누워 많은 상상을 한다. 공상과 망상과 상상의 경계에 선 많은 생각들은 나를 웃게 하기도 하고 후회하게도 한다. 오늘도 그런 잡생각을 하다가 꿀잠 잤다. 피싱 덕분에 내 인간 관계도 돌아보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혼자 낄낄 대며 이런 저렁 상상들을 할 수 있었다. 안녕히 주무시라 인사하고 침대에 누워 혼자 낄낄대는 나를 보는 것이 익숙한 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가끔 들리는 듯했다. 뭐 어떤가. 나는 혼자서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데 그래도 혼자 키득댈만한 시간을 주었으니 피싱이 개똥보단 나은 건가?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친절한 말을 의심하는 건 참 나쁜 일인데 모든 걸 의심해야 잘 사는 세상이 되었다.

-그건, 좀 슬퍼.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박철,『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문학동네, 2001,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중에서





이십 대 초반에 참 좋아했던 시다. 현실을 살아가는 낭만과 그 낭만의 옆에 선 현실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낭만을 꿈꾸지만 낭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살아가지만 현실만으로도 살 수가 없는 사람, 그렇다고 뫼르소 같은 이방인은 아니고 그저 이것저것 다 맛보고 싶은 사람이다. 낭만도 한 스푼, 현실도 동떨어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 즐거움 듬뿍. 옆에서 보기엔 변덕이 심하고 이도저도 아닌 불분명한 인간이겠지. 하지만 복잡한 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나. 나는 이런 내가 충분히 재밌고 즐겁다.


휴가임에도 어디에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온전히 내게만 시간을 주었고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낭비했다. 아주 과소비했다. 밥 한 번 먹는데 한 시간씩 소모했고 책을 펼치기 위해서는 이삼십 분이 필요했으며 씻겠다 화장실로 가다가도 괜히 베란다를 한 번 내다보고 어항을 들여다보았다. 씻고 내 방으로 돌아오는데 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낌없이 시간을 소모하고 나서도 내게는 아직 휴가가 넉넉했다. 그 넉넉함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가끔 과소비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거나 나에게 상을 준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나에게 주어진 과한 시간은 여유로 남고 그 여유가 내게 한 스푼의 낭만을 선물한다.


베란다 밖 구름 사이로 은은하게 비추는 햇볕이 우연찮게 덩그러니 놓인 벤치에 가 닿는 것을 본다. 벤치에는 지팡이를 짚고 앉은 할아버지가 계셨고 갑자기 눈이 부신 할아버지는 옆에 놓인 중절모를 쓰셨다. 그 중절모는 쓰는 모습이 너무 익숙했다. 모자를 익숙하게 쓰는 모습에서 짙은 세월이 배어 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어항에 물고기 하나가 바닥의 조그마한 돌을 계속 툭툭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지들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는데 혼자서 떨어져 나와 돌을 미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왜일까 생각하다가 드디어 돌을 밀어낸 물고기를 보았다.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고기는 얼른 돌이 밀려난 자리에 안착해서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다. 지느러미조차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그 얕은 구덩이에 한참이나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어쩌면 무리 지어 살고 있는 물고기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나는 그 모습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내가 본 것들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그런 것들을 보고 나중에 상상하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것을 부풀려 그럴듯하게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영진설비를 찾는 시인의 낭만과는 다르게 내 낭만은 이처럼 사소한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라난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현실도 놓칠 수 없고 그런 현실과 낭만을 버무려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즐거움도 놓칠 수가 없다. 어렸을 때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보며 시작된 이야기에 대한 동경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며 느끼는 즐거움이 이렇게나 크기에 쉽게 놓지 못하고 일부러 계속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그리하여 오늘도 참 즐거운 하루였다. 오늘의 일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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