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하루

느린 일기 - 언젠가는 선물 같은 날이 찾아올 거라고

by 블랙스톤

2023년 8월 7일 월요일

햇빛이 쨍쨍했다가 점심부터 구름이 잔뜩, 덕분에 내 얼굴에 비가 줄줄


인천으로 출근해 조회를 하는데 팀의 일산 쪽 현장에 인력이 부족해져 지원을 나가게 됐다. 급하게 공구를 차에 싣고 이동하는 중 이상하게 신호에 많이 걸렸다. 처음엔 답답한 마음에 발을 구르다 생각해 보니 내가 급할 이유는 없더라. 괜히 사고라도 내면 더 늦어지니까 안전하게만 가자 싶었다.

그러고 나니 하늘이 유난히도 높고 파란 것이 보였다. 바람도 살살 부는 것이 꽃이 산들산들 몸을 흔들고 마침 차 안의 라디오에서도 보사노바풍의 재즈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잘 모르지만 보사노바가 조금 느긋한 느낌이라는 건 알기에 천천히 따라 흥얼거리며 더 기분이 좋아졌다. 현장에 들어가면 이런 기분을 잊게 되겠지만 지금은 왠지 소풍을 가는 듯한 가벼운 느낌이 나를 들뜨게 했다.


일산 현장은 백화점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이라 했다. 하루 만에 가벽을 세우고 외부 작업을 끝낼 예정이라 아주 바빴다. 백화점이 한 달에 한 번 쉬는 것도 신기했지만 작업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선풍기 하나 틀어주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탁 트인 공간에서 작업자 몇몇을 위해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벽을 세우기 전에도 다른 쪽에 먼지가 날리면 안 되기에 비닐 천막을 덮은 상태였는데 가벽을 세우고 나자 안쪽은 완전 찜통이 되었다. 장갑은 이미 다 젖어서 손에서 헛돌기 일쑤였고 무조건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기에 최대한 빨리하고 탈출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다행히 관리자 측에서 일찍 끝내도 하루치 일당은 챙겨줄 테니 확실히 일만 마치고 일찍 퇴근해도 괜찮다는 소리를 해주었다.

-계속 서두른 탓에 더위는 피하지 못했고 오죽하면 같이 일했던 친구는 더위를 먹어 다음날 출근하지 못했다.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에 먹구름이 살살 끼더니 바람은 불지 않고 계속 어둡기만 했다. 습기가 가득 차올라서 햇볕도 없이 찜찜한 더위가 느껴졌다. 조금 웃겼다. 분명 외부 온도가 35도라 했는데 그럼에도 작업장 안쪽보다 선선한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시원한 가게에 앉아 있다가 돌아가는 길은 최대한 느긋하게 걸었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작업장 안으로는 급하게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백화점 안은 서늘했기에 작업장에서 땀이 차면 잠시 비닐 너머로 나와 백화점을 바라보았다. 작업하는 구역은 여성복 층이었는지 불이 꺼진 백화점 내부에 화려한 여성복을 걸친 마네킹이 보였다. 괜스레 서늘한 곳에 서서 이곳을 가만히 지켜보는 듯한 저 마네킹을 보고 있으면 속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가슴 안에 가득 찬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비닐 안으로 들어선다. 그저 빨리 작업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점심때 인도와 도로 사이에 이름 모를 꽃 몇 송이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작업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는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 차 대낮임에도 상당히 어두웠다. 물론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혹은 밤처럼 어둡지는 않았지만 뭔가 세상이 조금 흐리게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흐려진 세상에 인도와 도로 사이의 경계에 선 앓고 있는 꽃은 이상하게 눈에 잘 띄었다.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이 흐려지건 꽃이 선명하건 어쨌든 나는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으니까.

한참 일을 하다가 잠깐 쉬러 나왔을 때 바닥이 살짝 젖어 있고 비는 이미 그친 상태였다. 우연히 시선이 그 들꽃에 스쳤다. 그 사이에 비 몇 방울을 맞았다고 허리를 슬슬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게 또 신기했다. 폭염에 앓다가도 비 몇 방울에 다시 허리를 세울 수 있다는 것. 괜히 들꽃에 '질긴 생명력'의 이미지가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러 들어가면서도 괜히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들꽃이었다. 왠지 화려한 마네킹보다 아직도 허리를 다 세우지 못한 들꽃이 더 마음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마음에 드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은 사라진 상태였고 흰구름만 하늘에 가득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상당히 밝아졌다. 밝아진 하늘과 뻥 뚫린 도로를 배경으로 들리는 경쾌한 힙합 음악은 내게 어깨춤을 선사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깨춤이 멈추지 않았다. 차 안에 가득 찬 음악과 퇴근의 즐거움이 나를 계속 춤추게 했다.

땀을 너무 빼서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은 날이었지만,

너무 더워 혀를 쭉 빼고 일한 덕에 먼지를 적잖이 먹은 날이었지만,

이동할 때마다 시원한 차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겨우 몇 방울의 비에도 고개를 조금씩 세우던 들꽃처럼 나는 꽃이 아니지만 오늘의 기억을 그리 나쁘게만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 몇 방울, 몇 곡의 신나는 노래, 오전에 잠깐 보았던 파스텔톤 풍경, 몇 분 되지 않는 그것이 오늘을 빛이 나는 하루로 기억하게 해 주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날은 빛나는 것이 그 몇 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기껏 하루를 잘 포장해 놓고 바로 초 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놈인가 보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들꽃을 떠올리며 그동안 망설이던 이 기록의 이름을 '느린 일기'로 정하고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았지만 내 가슴이 조금 후련해졌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김영랑,『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중에서

-위, 35년 원문, 아래, 현대어 번역

-원문은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을 더 따스하게 한다. 꼭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





사소한 일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소중한 것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빛나고 있는 것들이 내 삶 곳곳에 숨어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선물처럼 찾아올 그 순간들은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나를 기쁘게 한다. 그저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우리는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다시 내일을 살아간다. 같은 하루를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건 문제가 있다지만 우리는 그날의 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이 오늘 같을 리 없고 매번 운이 좋을 수는 없으며 항상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안다. 그럼에도 가끔씩 아주 운이 좋은 날이 찾아오기에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선물 같은 날이 찾아올 거라고.

그날에는 평생 함께할 인연이 있을 수도 있고 상상도 하지 못할 횡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감사한 은인을 만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으며 그토록 바라던 한 번의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를 그저 넋 놓고 기대만 하며 살아가다가는 지쳐서 금방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 항상 오는 것이 아니기에 가끔 복권을 구매하고 지갑에 넣어두듯이 그저 기대감 하나를 가슴속 깊숙이 넣어두길 바란다. 오히려 잊고 지내길 바란다.


그리하여 언젠가 일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저릿함이 느껴질 것이다. 아,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내게 운이 따르는 기분 좋은 날. 그 기분 좋은 저릿함을 느꼈다면 조금만 더 세심하게 하루를 살펴보길 바란다. 나처럼 등을 곧추세우기 시작한 들꽃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혹은 당신의 인연이 곁에 있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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