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복

느린 일기 - 서로 간에 적정한 거리를 잘 지켜주는 이들, 친구

by 블랙스톤

2023년 9월 1일 금요일

구름은 없지만 하늘이 높지도 맑지도 않은 그저 그런 날씨


십 년 정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좋은 인연도 몇 생기기 마련이다.

-좋은 인연'도' 몇뿐이라는 게 서글프지만 말이다


회사를 그만둔 시점에서 자주 만나기는 힘들지만 어찌 됐든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이 만나지는 이들이 있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이기에 서로 간에 적정한 거리를 잘 지켜주는 이들이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민감한 것들을 묻거나 따지지 않는 이들. 서로 도울 수 있는 것들을 내밀하게 보여주고 나서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부담스러울 때까지는 나서지 않는 이들. 오래 본 만큼 오래 묵는 감정이란 것이 좋은 쪽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건 그나마 성향이 비슷하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비정기적으로 일 년이면 두세 번씩 만남을 가지고 있다. 만남의 끝 부분에 한 가지 내기를 걸어 그 내기의 결과에 따라 다음 모임을 주최할 이들을 뽑는 형식이다. 오늘은 저번 모임 때 했던 내기의 결과를 책임지는 날이다. 자주 만나기가 힘들다 보니 보통은 다 같이 좋아하는 스포츠의 결과를 두고 다음 술자리 내기를 하곤 한다. 이번에는 WBC 일본전을 두고 내기를 했고 그 결과에 따라서 진 팀이 술을 사기로 한 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뒤 탈 없는 공짜가 아니던가. 이긴 팀에 속한 나는 이미 정당한 대가가 지불된 상태이기에 아주 기분 좋게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오늘은 큰 무리 없이 일이 진행됐고 탈 없이 일이 끝났기에 기분도 좋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던 큰소리가 없었으니 마음도 편했고.


거의 반년 만에 만난 이들은 여전했다. 다행히도 아직 유쾌하고 회사의 일을 사적인 부분으로 끌고 오지 않았다. 퇴사를 했음에도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가장 최근에 결혼한 동료는 아직 깨를 볶고 있었고 그전에 결혼한 동료는 육아의 힘듦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고 있고 제일 먼저 결혼한 동료는 다 한때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총각들은 그런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뭐. 어쩌라고.

-이제는 소개해 줄 여자가 마누라밖에 없는 이들은 영양가도 별로 없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회사와 누군가의 연애, 그리고 스포츠에서 주식과 출산과 육아, 그리고 예전만 못한 체력에 대한 한탄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처한 현실도 달라졌다. 우리는 예전처럼 주말에 가끔 운동장에 모여 운동을 하지도 않고, 스크린 야구를 즐기지도 않으며 공터에서 캐치볼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각자가 새로 시작한 골프와 게임과 달리기와 아이와 놀아주기 위한 소소한 마술 정도를 서로에게 소개하며 놀려댔다. 하다못해 세탁기의 기능과 전자레인지의 새로운 활용법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즐거워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작은 것들에 새로운 재미를 붙여 간다는 것과 같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보며 괜히 미소가 나왔다.

언제든 다른 일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20대를 지나 슬슬 일에 적응을 마쳐 조금은 일이 지겹다고 느끼는 30대를 지났다. 그리고 완숙한 일솜씨와 함께 할 줄 아는 건 그 일뿐이기에 나가면 춥다는 걸 가장 많이 체감하는 40대가 되는 것.

현실이 조금 안정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

이제야 조금 현실에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다.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주 작은 평화가 생기더라.

-포기 혹은 체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지만 뭐 어떤가. 일부분을 체념하고 더 큰 부분에서 평화와 행복이 생긴다는데.

-이런 교환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나이 듦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뭔가 어그러진 나이 듦을 가지고 있다.


나이 마흔 처먹고 회사를 때려치워 버린 내게 이들의 안정감은 내가 차버린 행복이었다. 분명히 부럽고 아쉽지만 그렇다고 뒤만 볼 순 없으니 새로운 길에서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길이 마냥 재미가 없고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전혀 알 수 없었던 세상이 있다는 걸, 가끔 책에서나 보던 것들을 몸으로 느낄 때마다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하는 발버둥이지만 그 발버둥이 내게 뭔가를 얻게 해주고 있다고 느끼는 중이다. 어쨌든 회사에서 나이가 든다는 건 조금 느긋할 수 있었던 건데 내가 자초한 일이니 어쩔 수 있나.

-재밌는 건 내가 그만둔다고 할 때 모두가 말리면서도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는 말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마흔이란 나이가 그렇다. 뭔가를 새로 하기엔 늦은 것 같은데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요상한 충동이 생기는 나이.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배우겠다고 다시 막내가 되어버린 내게 심심한 위로와 물 떠 오기 같은 심부름이 몇 번 지나가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하나 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 약속을 분명하게 잡아두었기에 별 잡음은 없었다. 오래된 약속, 모임, 당신도 알고 있는 그때 그 회사동료, 술자리, 얼마 안 먹었어, 곧 갈게를 지나 다시 왁자지껄하게 떠들다가 유부남들을 위해 너무 늦지 않게 자리를 파했다.

총각들은 유부남들과의 시간을 아쉬워했지만 안타깝다고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유부들을 보내고 총각들은 호프집으로 가서 노가리나 마른안주와 함께 유부들을 씹게 될 것이다. 유부들은 뻔히 알고 있는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적당히 씹고 들어가라며 웃어주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출근해야 하는 이들이 있어 길게 놀지도 못할 거, 그냥 이 시간이 아쉬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음 내기는 프로야구 우승 팀 맞추기.

공교롭게도 LG 팬 둘, 기아 팬 둘. 두산 팬 하나, 한화 팬 하나인 상황이어서 가장 순위가 높은 LG 우승에 대한 내기를 하기가 좋았다. DTD는 과학이라는 이들과 올해는 다르다는 이들의 대립과 설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술집이 아닌 거리에서라도 단 일분이라도 더 떠들다 가고 싶어 하는 유부남들의 집착과 광기를 보았다. 이들의 광기는 절대로 다음 술집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에서 발휘된다. 금방이라도 택시를 부를 것처럼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서 절대 어플은 실행시키지 않는다. 그 손을 흔들어가며 이 주제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구결번과 구단의 부당했던 대우와 앞으로 FA가 될 이들과 신예들의 활약까지 이야기한 후에 다시 어렸을 때 인상 깊었던 예전 야구 선수들의 폼을 따라 하며 이야기하는 이들의 곁에서 나는 내내 웃기만 했다. 웃겨서 좋기는 한데 니들 집은 안 가니? 곧 다시 호출이 떨어질 텐데 그 호출을 기다리는 건가.

야들아, 차라리 호프집에 앉아서 떠들어.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들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진은영,『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그 머나먼」중에서





하는 일이 달라졌음에도 사람들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이들은 일은 할만하냐 힘들지 않으냐 같은 상투적인 질문 외에는 일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일 이야기를 깊게 할수록 아프지만 아프지 않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하는 누굴 위해 하는지 모를 변명만 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 이야기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추억이야기와 공통적인 관심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그들의 배려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만남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배려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 불편함으로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걱정은 이미 끼쳤으니 최대한 밝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부들은 술집에서 나온 지 삼십 분이 넘도록 떠들다가 그새 지나가버린 시간을 보고 해산을 시작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는데 또 십 분여를 소비했고 결국 어디쯤 왔느냐는 확인 전화에 화들짝 놀라 어, 어, 지금 가고 있어, 응, 헤어졌지, 하는 마지막 눈인사를 했다.

그들이 떠나고 총각들은 근처의 호프집으로 들어섰다. 안주를 시키고 술을 몇 잔 마시고야 툭, 아 외롭네 쟤네 잘 사는 거 보니까 더 외로워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늘 집에 먼저 간 유부 중 가장 오래된 유부가 말했다. 분명히 구속인데 구속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고. 부모님 외에 나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 우리는 괜히 술을 마시며 그 말을 곱씹었다. 일부는 씁쓸했고 일부는 달콤했다. 받아들이는 총각들마다 곱씹는 말이 다르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몇 잔 마시고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전화받았다고 지체 없이 들어가는 유부들의 의리 없음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며 몇 번이나 의리를 다짐했다. 그렇게 유부들의 행실까지 꼬집는 아주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구속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으며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해 가며 뒷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다음날 총각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차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너희들을 씹더라고 그러니 다음에는 조금 더 놀다 가라고 유부들에게 일렀다. 그리고 유부들은 내게 바로 전화해 범인을 알려주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의리가 있는 거야? 의리는 구경도 못 해본 근본 없는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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