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전공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만 해도 전국 교대의 국어교육과에 ‘아동문학’을 전공한 교수님은 찾아보기 어려울 때였다. 내가 교대를 입학하던 해가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문학을 내가 자연스레 접하게 되고 아이들을 키우며 그림책을 사랑하게 된 일도 어쩌면 그 교수님과의 만남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교수님은 내 지도교수님이기도 했더랬다.
하루는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뜬금없이 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잘 들어보고 가사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자고 하셨다. 교수님이 들려주신 노래는 바로 ‘울면 안돼’였다.
‘울면안돼
울면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신대요.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날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신대요.‘
아니. 이 노래는 '캐롤계의 고전 중의 고전' 아니던가. 이 노래를 십수년간 수도 없이 흥얼거려 부르면서도 단 한 번도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더랬다. 그런데 누군가가 문제의식을 제기하자 여기 저기 보이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첫 번째, 아이에게 울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일제 강점기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아이는 실패하고 넘어지고 아프고 슬프고 하면서 자라며 성장한다. 감정은 무조건 억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감정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면 나중에 더 큰 폭탄이 터진다는 것을 어른인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도 ‘양성평등’에 입각하여 가당치 않은 시대가 되었는데, 아이가 울면 안 된다니 말도 안 된다.
두 번째, 울면 선물을 안주겠다니. 이 무슨 협박 아닌 협박이란 말인가. 내가 아이라면 그 선물 안 받아도 좋으니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겠다. 산타가 와야 오는 거지 올지 안올지, 올 때 선물을 갖고 올지 아닐지 확실치도 않은 산타 기다리면서 일년을 허송세월(?)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문제는 도대체 착한 아이, 나쁜 아이라는 것은 ‘누가’ ‘어떻게’ 규정짓느냔 말이다. 아이는 부모 심부름을 하거나 친구를 도와주는 등 착한 아이 행세를 했다가도 금방 친구와 삐치고 다투고 험담도 하고 자기한테 불리하면 거짓말도 한다. 자기에게 불리한 얘기는 쏙 빼고도 이야기 한다. 어른과 다를 바가 없다. 착한 사람이 착한 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회색지대가 없는 흑백논리를 우리는 너무 당연시하며 배우고 받아들이며 자라온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어느새 산타가 슬그머니 전지전능한 신급(?)으로 둔갑해 버렸다는 점이다.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니. ‘전지’는 이미 신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던가! 어느새 산타는 ‘추앙받던 성직자 성 니콜라스에서 시작되어 유래되었다는 전설’은 빠지고 신의 영역에 슬며시 발을 얹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모든것을 알고 있으니 잘하라(?)는 것은 이중협박(?)에 준한다.
사실 어찌 보면 산타라는 것은 어른이 만든 권력체계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산타가 루돌프를 타고 우리 집 근처로 오고 있다.’
‘그러니 너는 말 잘 듣고 순순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해.’ 하고 말이다.
오늘 밤 우리 집에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산타를 위해 아이가 일 년을 숨죽이며 어른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살기를 우리는 아무도 전혀 바라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움직이는 목각인형 마리오네트처럼 아이가 커주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롤 하나 듣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줄 선물들을 하나하나 챙겨본다. 이제는 막연히 ‘산타를 기다리는’ 내가 아니라 ‘산타가 되어주는’ 내가 조금씩 되어 감을 느낀다. 그저 받기만 하던 존재에서 이제 누군가에게 유무형의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존재로 되어간다는 것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간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동심은 지켜져야 하겠지만 사실이 아닌 허구와 판타지에 근거한 동심은 언젠가는 깨쳐져야 하고, 그 알을 깨어 나올 때 진짜 현실판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산타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도 신랄한 비판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내 아이들이 어린이집 다니던 그 시절부터 진작에 산타의 존재를 눈치 채버렸고 그에 더해 이제는 산타를 기다리기는커녕 '부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현금을 요구하는(?)' 흔한 틴에이저가 되어버려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흔이 넘어도 크리스마스는 조금은 신나고 여전히 기다려진다. 그저 선물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즌이 주는 ‘희망’과 ‘기대’ 그리고 ‘들뜸’의 특유한 무드가 좋아서 인 것 같다. 크리스찬이든 아니든 '세상을 밝히려 인간계로 친히 내려오신 아기 예수'의 낮추어 오심을 기려 보며 홀리(holy) 하고 행복한 성탄절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