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잠이 푹 오지 않는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때로 몸은 머리보다 기억이 빠르고 정확하다. 그렇다. 첫째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이 오질 않으니 머리 속을 떠다니는, 딸아이도 나도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가만히 들어본다.
큰아이는 35살과 28살에 결혼한 우리 부부에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아와 주었던 소중한 아기였다. 남편은 충청도에, 나는 경상도에서 일했던 터라 자취했던 아파트에서 밤에 혼자 아랫배에서 거품이 톡톡 터지는 느낌을 처음 느껴보고는 본능적으로
‘아, 이게 바로 태동이구나.’
하고 느꼈더랬다. 아이와 나만이 알 수 있는 특별한 교감이었다. 순산을 하기 위해 가능한 자주 걸으려고 노력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애썼다. 체중이 과하게 늘면 아이가 커져서 자연분만이 어렵다고 해서 마음껏 먹지도 못했다. 초보엄마는 모르는 것 투성이라 의사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잘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첫째 아이를 17시간의 진통 끝에 응급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한 후 낳을 수 있었다. 양수가 터진지 36시간째만의 출산이었다. 자궁 입구가 10센치가 열릴 때까지 진통을 다 겪어냈지만 아이의 심박동이 떨어진다며 진이 다 빠진 채로 맥없이 수술실로 들어가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술실의 그 차가운 공기, 스테인레스로 된 차가운 수술대. 선생님은 수술 후에 회진을 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차라리 이럴 거였으면 빨리 수술을 했어야하는건데 진은 진대로 다 빼고 결국 수술을 해버려서 그러신 듯 했다.
아랫배에 10센치 정도를 절개한 터라 수술 부위의 꼬맨 그 자리가 너무 아픈데, 아기에게 좋지 않다고 진통제도 빼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아기를 위해서는 그 정도쯤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픈 기다란 상처 부위에 3킬로의 아기를 올린 채 퉁퉁 불은 젖을 빨리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엄마로 거듭나는 일은 매순간이 나 스스로의 한계치를 가늠하는 도전이었던 것 같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의 생일날만 다가오면 이유 없이 심하게 몸이 아팠다. 컨디션이 훅 떨어지고 늘 먹던 걸 먹어도 곧잘 체했다.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면 엄마가 아프다는, 게다가 난산이었을 수록 더 아프더라는 이야기를 딸아이를 넷이나 낳은 지인언니에게 듣고는 그제야 알 수 없이 매년 오가던 그 패턴이 이해가 되었다.
다행히 딸아이를 낳은지 몇해가 지나면서부터는 아이 생일 때마다 앓던 몸살이 많이 좋아졌다. 어르신들 말씀이 난산을 해도 다음 아이를 순산하고 몸조리를 잘 해주면 몸이 많이 좋아진다고 하더니, 둘째 아이를 자연주의 출산으로 낳고나서 몸이 조금 좋아진 건지도 모르겠다.(자연주의 출산 썰은 다음에 자세히 풀기로 한다.)
결혼을 하면 첫 아이로 딸을 낳고 싶었다. 딸을 낳고 아들을 낳으면 큰아이인 딸덕분에 둘째인 아들도 순하다는 말을 들어온 탓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딸이 더 키우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 나는 양육에 있어서 부드럽게 연착륙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우성이나 박상원처럼 눈 쳐진 사람을 오랫동안 좋아해왔는데, 그래서인지 눈이 쳐지고 순한 남편을 만났고, 그 쳐진 눈을 내 아이도 닮았으면 해서 임신 시절 내내 남편의 눈과 얼굴을 밤마다 지독하리만큼 일부러 쳐다보고 지냈더랬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딸아이는 남편의 눈매를 꼭 닮았고 성격도 닮았다. 우리 집에는 2명의 T와 2명의 F가 사는데 그 두명이 바로 남편과 딸아이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분과 감정에 큰 변화가 없다. 좋은 일이 있어도 좀 무덤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잘 넘어간다. 반면 나와 둘째아이인 아들은 F이다. 우리는 좋으면 너무 좋아 방방 뛰고 슬프면 너무 슬퍼 지하 100층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다. 두 명의 T는 그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 기복이 비교적 심하지 않은 딸과 지낸다는 것은 사춘기의 자녀와 지내는 시기에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제 중학교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딸 아이. 타지로 대학을 가게 된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3년이 매일 얼굴 맞대고 식사하며 함께 기거하며 지내는 기간이 될 것이다. 기나긴 육아 기간이 언제 이렇게 날아갔나 싶다.
기센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내심 남녀공학인 학교로 가기를 바랬더랬다. 하지만 딸아이는 자기는 여중이 좋고 잘 해낼 수 있다며 하나밖에 없는 여중으로 선지망을 해서 입학하고 3년을 보냈다. 놀랍게도 정말 3년동안 친구 문제로 한번도 탈이 없이 잘 지내던 걸 보면 딸아이는 나보다도 자신을 더 잘 아는구나 하고 안도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너무 튀지 않으면서 미움 받지 않는지 그 비법을 꽤 자연스레 알았다고나 할까. 여자가 많은 여초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나는 항상 그 지점이 참 힘들었는데 말이다.
이제 만 15세가 되는 딸아이의 요즘 관심사는 뜨개질이다. 가정시간에 뜨개질을 배우더니 밤낮으로 목도리를 뜨고 있다. 얼마전에 처녀작(?)을 하나 완성해서 동생이 요즘 종종 그 핸드메이드 목도리를 하고 다닌다. 틈만 나면 다이소에 가서 다양한 버전의 뜨개실을 눈팅하고 새로운 색깔과 질감의 털실을 골라와서는 미니 가방도 만들고 다음 작품도 구상한다.
“소희야, 할머니들과 친해지는 최고의 방법이 뭔 줄 알아?”
“몰라, 뭔데?”
“뜨개질을 하는 거래. 할머니들은 뜨개질로 옷도 만들고 양말도 만들고 별거 별거 다 만든대. 함께 뜨개질 하면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면서 어떤 남자를 골라야 좋은 건지도 말해주고, 어떤 프로포즈를 해야 로맨틱하고도 성공적인지도 알려준다나.”
물론 책에서 읽은 독일 할머니들 이야기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국 할머니들은 요즘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한국 할머니의 70대를 전혀 대표할 수도 없는 우리엄마이지만 요즘 엄마의 관심사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목욕과 영양제, 고로쇠 물이 언제 나오는지 정도가 떠오르는 걸 보니 나도 우리엄마에 대해 딸에 대해 무지한 것 만큼 무지한 것 같다.
엄마와 나의 관계, 나와 딸 아이의 관계는 평생을 걸쳐 가장 긴밀하고도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원만하고 무탈할 때 삶의 만족도는 극도록 상승 할수도 극도로 나빠질수도 있다는 것을 4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오면서 몸으로 체득했다.
앞으로도 딸아이와의 관계가 지금만큼만 무탈하고 원만하기를 바래보며 별빛이 쏟아지는 새벽에 딸아이의 생일을 나지막히 축하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