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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러브 Dec 08. 2023

‘중꺾그마’의 정신으로

애를 써도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고등학교 시절 방송부 아나운서 활동을 했더랬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자율동아리’ 활동이  활발하게 운영되는 학교였다. 그런 동아리가 방송부, 역사탐구부, 영어회화부등 5개 정도였는데 이 5개의 동아리는 3차까지의 시험과 면접으로 꽤 까다롭게 이루어 져 있어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떨어지면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동아리에 지원해서 배정받는 식이었다. 이상하게 그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고등학교를 선택했던 이유는 집이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교복이 없는 사복이 교복 그 자체일 정도인  '학교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내가 지원한 3개의 동아리 중 3개 모두 최종까지 붙었다. 방송부의 경쟁률은 무려 50대 1일이었다. 하지만 방송부에서 내가 다른 동아리에서 지원한 것을 알고 두 마음을 품은 죄(?)로 마지막 합격 명단에서 제외시켰다고 했다. 그런 내막도 모른 채로 영어회화부에 들어가 매주 학교로 와주시는 외국인 두 분과 함께 신나게 영어회화를 하고 배웠다. 노란머리에 파란 눈의 진짜 외국인에게 내가 배운 영어를 써먹어 보고, 알아듣는 경험은 그저 놀라웠고 즐거웠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젊은 여자 과학 선생님께서 수업 후에 나를 따로 부르셨다.     


“반장, 너 아이들 차렷, 경례시키고 발표할 때 보니까 목소리가 참 좋더라. 방송부로 들어와라.”

    

  알고 보니 방송부 중 1명이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 자리는 다른 반 반장이 맡고 있기도 했던 꽤 중요한 자리였다. 선생님은 그 아이 후임으로  내가 방송부원들을 잘 이끌어 주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방송부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들이 사실은 너를 그런 연유로 어쩔 수 없이 마지막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했던 것이니 앞으로 잘해보자며 동기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방송부 생활은 생각한 것만큼 낭만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2학년이 되고부터는 점심시간마다 5명의 방송부원이 돌아가면서 요일별로 점심 방송을 맡았다. 교내 방송은 원고작성, 노래 선정, 사연 및 신청곡을 수거하여 읽고 선정하는 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해내야 하는 그야말로 노가다 직종이었다. 게다가 점심시간에 방송을 하려면 3교시가 마치자마자 10분 만에 혼밥을 끝내야했다. 반에서 밥을 제일 천천히 먹기로는 일등인 내가 10분 만에 밥을 먹어치우기란 그야말로 미션임파서블이었다. 점심방송을 하던 그 일 년 동안은 방송이 있는 목요일마다 위통을 달고 지내야 했다.    

  

  게다가 입시생인 3학년이 되면서 방송부 부장을 맡게 되었는데, 교내의 사소한 방송 일에도 4층에 있는 강당으로 달려가 마이크 선을 연결하고 스탠드를 설치하고 앰프를 켜서 볼륨을 조절하는 일을 혼자서, 그것도 이동시간 포함하여 10분 안에 마무리 지어야 했다. 방송이 있는 날은 계단과 복도를 뛰고 뛰고 또 뛰어야 했다. 방송일은 그야말로 분과 초를 다투는 일이었다.  

    

  수능이 끝난 어느날, 논술 특강을 해주시는 강사선생님의 특강을 위해 강당에서 앰프를 설치하고 마이크 세팅을 마친 후  미션 클리어 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나직히 내쉬며 무대를 내려왔다. 앉을만한 빈 자리를 찾고 있는데 강사 선생님의 첫 마디가 들려왔다.   

  

“글을 잘 쓰려면 첫 문장에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독자는 그렇게 인내심이 강하지 않아요.”


  결국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첫 문장에서 독자를 조져야 한다(?)는 글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는 다소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첫 문장에서, 적어도 첫 문단에서 상대방의 시선을 끌지 못하면 독자가 끝까지 그 글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는 말씀이셨다. 어찌나 그 말씀이 귀에 꽂히던지 그 이후로는 논술시험을 칠 때 첫 문장을 어떻게 조질까 늘 고심했고, 논술시험은 그 덕분인지 늘 상위권에서 맴돌 수 있었다.

      

  그런데 매번 그렇게 좋은 첫 문장이 써지면 얼마나 좋으랴만은 그게 참 쉽지만은 않다. 첫 문장이 잘 써지지 않을 때, 글감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내가 그리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쓴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마법 같은 방법은 나의 최애 에세이스트인 이슬아 작가가 근래에 결혼하여 함께 사는 남자이며, 사진작가이자 시인인 ‘이훤’이 전수해준 방법이다. (역시 '오늘의 젊은 작가'는 남자사람도 잘 알아보는구나.)    

 

  얼마 전 청룡영화제 무대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울먹이며 자신의 진심을 담아 수상 소감을 전하는 이름 모를 한 여배우를 보았다. 그녀는 ‘중꺾그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요한건

여도

냥 하는

음     


‘나에게 재능이 없는걸까?’ 라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질문에

‘너  자신을 믿는게 재능이야.’ 라고 건낼수 있는 마음이라고.      


그 마음가짐을 꼭 갖고 싶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마음자세였다.  

    

  교사로 일하다 보면 관리자에 치여, 학부모에 치여, 애들에 치여 꺾이는 마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드는 날이 있다. 나에겐 교사로서의 자질이 없는 걸까, 적성이 안 맞는 걸까,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할 수 있으려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와 스스로를 지하 20층까지 끌고 내려가기도 한다. 앞으로 그럴 때일수록 나는 내 자신이 그리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고자 한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같다. 누구도 이제는 예외가 될 수 없는 어려운 교직 현실에서 나 역시 그리 대단하지 않는 교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서 전화로 소리 지르는 학부모, 교장에게 다이렉트로 클레임을 거는 학부모, 더 나아가 교사에게 욕을 내뱉고 주먹을 들어 올리고 급기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교육청에 신고하겠다는 학생이 있어도 ‘중꺾그마의 정신’을 떠올리며 ‘너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야’ 는 마음으로, 이 또한 시간 속에 지나가리라는 것을 믿고 내 멘탈을 단단히 부여잡고 싶다.

      

  중꺾그마의 정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과 예비 교사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니, 각박한 이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에게 전파되어야 할 생존정신이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며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올리기 시작한지 두 달이 되어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구독자, 조회수, 다음 사이트  메인에 또다시 내 글이 뜰 것인가 말 것인가로 근래에 좀 지쳤더랬다. ‘중꺾그마’는 그런 나를 위로해준 온기 어린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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