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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지호 Jul 06. 2023

무계획 여행,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눈떠보니 제주도다. 지금 제주도에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비행기값이 이만오천원 이길래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공항이었다.
군대 가기 전의 마지막 여름방학.. 이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그렇게 아무 계획 없이 제주도에 출발했고 실감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나서야 현실에서 깨어났다.

나 오늘 어디서 자지?

제주도에서 군복무를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나 : "나 제주도인데 잘 곳이 없어, 너 군대 휴가 나왔을 때 어디서 잤어?"

친구 : "갑자기? 휴가 나오면 비행기 타고 바로 집가지. 어디서 자긴 어디서 자냐."

나 : "아 그래? 그래도 한 곳만 알려줘."

친구 : "그럼 서귀포시 월드컵경기장 거기 찜질방 괜찮더라."  


그렇게 나는 제주도 첫 날, 버스를 타고 제주공항에서 서귀포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경기장 내에 있는 CGV에서 영화를 봤다.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한 추억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라니..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순간  걱정이 됐지만

제주도 영화관에서 영화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짜릿했다.


다음날 아침 계획 없이 왔기에,

지도 어플을 켜고 바다를 향해 걸었다.

어플에 올레길이라는 표시가 보였고,

그렇게 올레길을 따라 무작정 걷게 되었다.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할 시점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해본다. 

소문만 들었던 게스트하우스, 게스트 하우스는 어떤 곳일까?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니 다른 게스트 한분이 계신다.

간단한 통성명을 한 이후에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다.


게스트 형 : "지호야 말 육회 먹어본 적 있니? 여기 보니까 말 육회 파는 곳 있더라. 그거 먹으러 갈래?"

나 :"형, 저 이번 여행 컨셉은 정하지 않았지만 한번 배낭여행 느낌으로 다녀보려고요."

게스트 형 : "그래? 그런데 지호야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경험할 수 있을 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은 다음에도 똑같은 이유로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네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해봄으로써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너에게 더 큰 확신과 설득력을 주지 않을까? 예를 들어 말 육회 먹어보니 별로 더러라고요 말하는 것과 안 먹어봤는데 맛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잖아. 나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밥은 내가 살 테니까 같이 먹으러 가자!"

나 : "형 저 컨셉 바꿨어요. 이번 여행은 초호화 경험 투어예요. 밥 먹으러 가시죠!"


밥을 먹으며 형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게스트 형 : "지호야, 나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참 좋더라."

나 : "왜요?"

게스트 형 :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 

나의 걱정거리와 고민거리들을 여과 없이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는 사이. 

내 편은 아니더라도 제삼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이.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이 내 주변사람들에게 퍼지지 않을까 걱정 안 해도 되는 사이. 

지금 이야기하는 이 순간이 내게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더라."

나 : "듣고 보니 그러네요."

게스트 형 ": 맞아. 그리고 내가 경험해 본 결과, 이렇게 혼자 여행온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격변기인 사람들이 많더라. 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도 그 사람의 상황과 동화되어 다양한 간접경험하면서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게 되더라.

사실 나도 지금 여행이 퇴사 여행이야. 나 퇴사하고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애견 관련 일 해보려고!"


형과의 대화는 짧지만 강렬했다.

경험도 시기가 있다는 것을,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애매한 사이가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혼자 하는 여행은 지인과 함께하는 여행과는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원할 때 일어나고, 원할 때 이동하고, 원할 때 밥 먹고, 그늘이 보이면 누워서 자고,

첫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형의 추천으로 여행기간 동안

서귀포에서 동쪽 올레길을 따라 제주공항까지 걸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곳에서는

미래 걱정도, 과거 후회도

지인 걱정도, 주변 눈치도 살필 필요 없이

오로지 현재의 이 순간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제주도의 바다는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느껴지는 바가 달랐고, 항상 새로웠다.

매번 감탄사의 연발이었지만 이 감정을 공유할 상대가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라서 재미있었는데, 어느 순간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을 공유할 상대가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구나..


첫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게스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작년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 손님들이 뚝 끊겼다고 한다.

안 그래도 혼자 온 여행, 지독하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졌다.


걷고 걷고 또 걷고 밥집이 보이면 밥을 먹고,

정자가 보이면 한숨 자고 또다시 일어나 걷는 여행


어제와 변한 것은 없지만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 : "야 너 아직도 제주야?"

나 : "응. 너 기다리고 있었지. 언제 올 건데?"

친구 : "아 ㅇㅋㅇㅋ. 지금 예매할게 내일 보자~"


장난 삼아 던진 말에,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다음날 친구와 만났다. 그리고 다시 하염없이 걷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더우면 덥다고 투덜댄다, 이쁘면 이쁘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했던 말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친구란 이런 것일까?

나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그리고 그걸 받아 줄 수 있는,,

그렇게 터진 나의 감정들로 인하여 나는 스스로 한 번 더 솔직해진다.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덧 김녕해수욕장이다.

드디어 사람들이 많은 관광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친구 : "지호야 너 초호화 여행이라 하지 않았어?"

나 : "맞지."

친구 : "그럼 우리 오늘은 걷지 말고 요트 체험하자.

김녕에서 요트 타고 가서 스노클링 체험하는 프로그램 있거든? 오늘 신청할래?"

나 : "오 너무 좋은데?"


그렇게 우리는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왔다.

구명조끼를 입고 스노쿨링 장비를 차고 물속에 들어간다.

일렁이는 파도에 몸은 저항 없이 흔들린다.


내가 아무리 파도를 거스르려 해도, 주변을 둘러보면

파도가 흐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파도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묵묵히 가고 있다.


그래 파도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이 흐름을 느껴보자.

파도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파도를 타고 더 멀리 가보자.

파도를 거스르려는 것을 멈춘 순간에야

나는 파도를 이용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13박 14일 무계획 제주도 여행은 끝이 났다.

재미있는 여행을 하기위하여

관광지를 검색하고,

맛집을 검색하고,

평점을 확인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어딜가도 실망하지 않았다.


작은 그늘에도 감사하게 되었고,
우연히 들어간 맛집에 감탄하게 되었고,
스쳐지나간 인연도 소중하게 되었고,
작은 풀소리, 간지러운 미세바람까지도 
온전히 다 느낄수 이는 여행이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을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때야 말로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
세상 사는 것도 다 똑같지 않을까?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떠났던 여행

역설적이게도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한 것은

끊임없이 걷기

그리고 멍 때리기이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나의 감정들, 경험들, 깨달음들..

다시 한번 훌쩍 떠나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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