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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Nov 13. 2024

연재 소설 29화 - 어디에도 없는 사람

미스테리 연재소설 -  숨어버린 mediator


<파일 4>

-더러운 메피스토, 넌 사탄이야.

-메피스토의 진짜 모습은 위대한 중보자, mediator야. 지상으로 가서 타락한 영혼을 찾아내 벌하는 역할을 맡은 하나님의 심부름꾼. 난 아무에게나 찾아가지 않아.

-왜 나지? 벌을 받아야 하는 건 파우스트야!  

-인간의 가장 밑바닥, 진짜 추악함이 드러나는 때가 언제일까? 자기 자신조차도 정말 사랑이라 믿었던 대상을, 내 만족, 탐욕을 위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한순간의 욕망과 쾌감을 위해 사지로 던져버릴 때가 아닐까? 그 순간 거짓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숨겨져 있던 괴물이 드러나지.

-그래서 당신, 지금 죽음의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늘 그렇지만 나를 원하고 부른 건 파우스트야. 이 게임을 오래도록 은밀하게 즐긴 것도!     



선정이가 남긴 네 번째 파일에는 mediator, 놈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자신만만하고 부드러우면서 깊이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판테온으로 꾸며진 가상회의 공간에서 만났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다니엘 정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선정이와 놈의 연결점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놈이 죽음의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빨리 놈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밤새 불법 도박 사이트 <deathcitygame>을 살펴봤지만, 회원 가입 후 관리자 허가를 받아야 입장할 수 있는 비밀 사이트라 접근이 쉽지 않았다. 다니엘 정과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지난 지난번 놈이 내게 제안 메일을 보내온 주소, mediator@pantheon.com으로 답장을 보내려 하자 오류 메시지가 떴다. 아주 희미한 윤곽선만 드러났을 뿐, 쉽게 그려지지 않는 존재 다니엘 정,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단 김화식 기자님에게 다니엘 정의 자료를 보내 신원확인을 부탁드리고, 자살한 여학생들의 신상정보를 요청했다. 그리고 지훈이와 함께 긴급체포로 화양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중인 한도영을 만나보기로 했다.     


한도영을 만나는 날은 항상 비가 왔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1시쯤 화양경찰서 앞에 다다랐을 때는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되어 도시를 집어삼킬 듯 쏟아지고 있었다. 형체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무엇이라도 가둬버릴 수 있는 물의 속성이 이젠 두렵다. 거리의 하수구로 콸콸 흘러드는 빗물이 어느 순간 역류해 또다시 내 존재를 포위할 것 같은 압박감, 이런 것이 트라우마일까?


유리로 된 가림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도영과 마주 앉았다. 날씨 탓인지 대낮인데도 습하고 어두침침한 면회실. 조각상의 선명한 명암처럼, 한도영의 하얀 얼굴 위로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지훈이가 니가 다시 볼 일 없음 좋겠다고 했잖아? 아~돈이 묶여 있었지? 은호 아니었음 이렇게 일이 꼬이지 않았을 텐데.”

“지훈이한테 그게 어떤 돈인지 동고동락한 한도영, 니가 제일 잘 알지 않아?”

“옛친구라 쉴드 쳐주고 손 떼라고 여러 번 조언도 해줬는데. 차은호, 니가 다 망친 거야. 돈 찾으러 온 거라면 니가 지훈이 계좌 해킹하고 도박한 사실, 경찰에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바로 입금해줄게. 그깟 이천삼백,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야.”

“닥치고 죗값 받아라. 개고생하며 번 돈 살 떨리게 아깝지만, 그냥 너라는 시한폭탄 제거비로 퉁칠게. 한때 널 친구라 생각했던 시간이 더 ㅈ같다.”

“다니엘 정, 알지?”

“다니엘 정? 그게 누군데?”

“mediator, 몰라?”

“이름 같은 거 몰라. 지난번에도 말한 거 같은데, 아무리 애써도 누군지, 알 수도 찾을 수도 없을 거라고. 있지만 없는 사람. 나도 아는 건 mediator, 닉네임뿐이야.”

“선정이 협박한 거 그놈 짓이야?”

“글쎄...뭔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애가 자기 발로 자유 낙하해 자살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거 같은데. 게다가 국내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

“상선 불지 않으면 니가 싹 뒤집어써야 할 판인데 괜찮겠어?”

“차은호, 니가 속한 세상이랑 내가 사는 세상 다르다고 했지? 부모도 없고 빽도 없는 놈한테는 돈이 힘이고 친구야. 말하자면 나한테는 돈 벌어주는 사람이 VIP라는 거지.”     


한도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니엘 정이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생소한 표정이었다. 한도영과 mediator는 도박사이트에서 처음 서로 알게 된 후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친밀해진 사이로, 해외에 서버를 두고 운영 중인 mediator의 불법 도박사이트 회원을 모집하고 관리하는 총판 역할을 한도영이 맡고 있을 뿐, 그의 신상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여름 방학 동안 오후 시간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바로 가봐야 한다는 지훈이에게 화양경찰서를 나서며 물었다.      


“진짜 그 돈 안 찾아도 괜찮아? 아니지? 나라면 그럴 수가 없을 거 같은데”

“지나간 일은 미련 안둔다가 내 개똥철학이다. 몇 년 뺑이 치면 금방 모아. 인생 경험 찐하게 한 셈 치고, 은호 니가 멀쩡하니 그걸루 됐어.”


우산을 펼치고 빗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지훈이의 뒷모습. 아버지 편의점에서 야간 조를 맡고 오전에 잠깐 눈을 붙인 후에 오후에는 카페 아르바이트, 그리고 저녁 시간은 배달 라이더로 촘촘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훈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친구의 꿈이 담긴 돈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세이브 몰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도로 옆 배수로는 울컥울컥 흙탕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멍하니 역류 중인 물이 소용돌이치는 배수구 덮개 안쪽을 바라볼 때 한줄기 강한 빛이 머리 위로 뚝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횡단보도 건너편, 글로리 빌딩의 거대한 옥외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판데모니움 베타버전 시즌2> 광고가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다. 에메랄드 성 위로 터지는 색색의 폭죽, 그 위로 날아오르는 악마의 날개. 흑백필름 같은 거리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전광판을 뚫고 나와 놈이 금방이라도 빌딩 위를 날아오를 것 같다.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을 때, 김화식 기자님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판테온 플레이어에서 다니엘 정 퇴사했어. 가족관계 학력, 출신, 업계에선 아무 정보도 찾을 수가 없어. 더 찾아볼게.-     


놈에게 보내려던 메일, 오류 메시지가 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있지만 없는 사람? 조금 전 한도영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이제 어디에서 놈을 찾아야 할까? 다락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넥스트 게임사 프로젝트 매니저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 정? 원래 프리랜서야. 웬일로 판테온 플레이어에 영업 당한 게 신기했는데 예상대로 6개월을 못 채우고 퇴사한 모양이야. 혜성처럼 등장한 유니크한 게임개발자라 여러 게임회사들이 눈독 들였는데, 바람 같은 사람이야. 한 도시에 두 달 이상 머무르는 걸 본 적이 없어. 뭐, 유럽 버전이나 한국버전이나 매출 40퍼는 다니엘 정이 가져가는 것으로 계약되어 있어서 평생 놀먹해도 상관없기도 하구. 베타버전 풀어보면 대충 감오거든. 흥인지 망인지. 판데모니움은 초대박이야.”

“매니저님은 다니엘 정 얼굴 본 적 있어요?”

“다니엘 정이 해외에 있어서 인터넷 미팅만 했어. 얼굴 노출을 안 하더라고. 이 바닥에 워낙 똘기 충만한 인간들이 많아서 웬만하면 맞춰주는 편이거든. 3월인가 회의 때 시스템 오류가 났는지 아주 잠깐 화면이 떠서 옆모습 본 게 다야. 얼굴 하얗고 뿔테 안경, 예상했던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아~턱을 괴고 있는데 오른쪽인가 손목 위쪽에 아주 검은 날개 문신이 선명했던 게 기억나네. 근데 지난번 판테온 플레이어 측 보안 테스팅 제안은 은호 씨가 안 받은 거 아냐?”

“혹시 연락처 가지고 계세요?”

“아니, 신비주의 컨셉이라니까.”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았던 놈은 감쪽같이 숨어버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오히려 놈에게 내가 쫓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노트북을 열고 판데모니움 게임 사이트에 접속했다. ‘수능 금지 게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중독성과 몰입감이 엄청나 게이머들을 열광시킨 소셜 카지노 게임 판데모니움은 몇 가지 버그를 해결하고 게이머들의 의견을 반영한 베타버전 시즌2를 발표해 여전히 인기몰이 중이다.

판데모니움 보안테스팅 때 사용했던 관리자 페이지에 혹시 로그인이 가능한지 시도해 보았다. 영원처럼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로딩 시간.. 제발..된다! 닉네임 MASTER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던 놈의 계정 정보를 살펴보았다. 게임 속 놈의 골드머니는 벌써 20억을 돌파했다. 판데모니움 유럽 버전 보안테스팅을 내게 부탁할 때 골드머니가 나중에 로또가 될 수도 있다고 했던 놈의 말이 떠올랐다. 현금화할 수 없는 게임머니를 두고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놈의 계정에서 새로운 이메일 정보(mediator@meet.com)와 패스워드를 알아냈다.

혹시나 이 패스워드로 <deathcitygame>사이트에 접속이 가능하지 않을까? 판데모니움 게임에서 나와 <deathcitygame>사이트 접속을 시도해 보았다. 계속되는 패스워드 오류. 감쪽같이 숨어버린 놈과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deathcitygame>를 어떻게 뚫어야 할까?     



“한 반에 2~3명은 불법 온라인 도박에 빠져 있습니다. 학교에서 도박총판 역할을 하는 학생들은 학폭, 강제 전학 이런 거 안 무서워합니다. 일부러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오래 학교에 머물고 싶어 하죠. 전학 가면 새로운 시장이 생기고, 졸업 안 하고 학교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사업에 유리하기 때문이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현직교사가 바라본 청소년 도박 실태, 심각하군요. 범죄 전문가는 이번 경기도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진화 중인 청소년 범죄의 샘플입니다. 과거 사춘기 청소년의 일탈이나 우발적 범죄와는 완전히 결이 달라요. 학교 안에 ‘청소년 조폭 비즈니스’가 치밀하게 네트워크화되고 있습니다. 도박총판, 또래 포주와 마약유통까지, 세 개의 범죄가 쓰리 콤보로 완벽하게 공생하는 형태예요. N번방 사건 때도 검찰과 언론은 성 착취 동영상을 공유하는 텔레그램 비밀방에만 포커스를 맞췄지, 그 배후인 온라인 도박까지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불법 도박 비즈니스의 네트워크를 면밀히 분석해 응징하지 않으면 사이버 성범죄도 마약유통도 무한 반복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안에서는 한 방송사의 긴급 토론회가 언제부터인지 플레이 중이다. 중세시대 성채처럼 굳건하게 닫혀 있는 <deathcitygame>. 오프닝 화면을 열어둔 채로 덧없이 흐르는 시간...‘딩동~’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김화식 기자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주동 팸 자살 여학생 A랑, 대전 자사고 여학생 정보, 파일로 보냈어. 언론에는 A가 연주동팸 안에서 가스라이팅과 자살 부추김 때문에 자살한 것처럼 알려졌는데 아닌 것 같아. A가 연주동팸 갤러리에 올린 글을 다시 검색해 봤는데 거기에 <mediator 지옥의 사자>라는 게시글이 있어. A도 mediator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거지. A가 집을 나와 가출 학생들과 숙식을 함께한 것도 이 주일 정도밖에 안 돼. 그전에는 딱히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평범한 여학생이었고 대전 자사고 여학생도 성적 스트레스로 결론지었지만, 평소 침착한 성격이라 주변 충격이 아주 컸다고 했어. 다니엘 정? 놈이 정말 사건과 관련 있다면 이 학생들과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해. 놈에 대해 나도 더 파볼게.-     



역시 연주동팸 자살 여학생도 놈과 관련이 있었구나. 여전히 <deathcitygame>의 오프닝 화면이 펼쳐지고 있는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에메랄드 성, 먼 하늘에서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온 악마가 내민 금빛 초대장이 오프닝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선정이도 죽은 여학생 모두 저 금빛 초대장을 받은 것일까? 한도영의 말대로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놈이라면, 반대로 놈이 나를 찾게 만들 수는 없을까? 그렇다!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는 생각. 이번엔 내가 놈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다!     


넥스트 게임사가 보안테스팅을 나에게 부탁할 때 보내온 제안서를 2시간 넘게 끙끙대며 수정해 새로운 게임프로그램 기획, 개발 제안서를 작성했다. 넥스트 게임사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대표 직인까지 완벽하게 복사해 넣은 제안서. 이메일 주소까지도 넥스트 게임사와 흡사하게 위장해 악성코드를 심은 제안서를 놈에게 발송했다. 과연 놈은 나의 초대장을 받아줄까? 지난 새벽부터 계속된 강행군에 지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락 방 창문 너머로 어둠이 물러가고, 이른 새벽빛이 하늘을 엷은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고 메일을 확인했다... 됐어! 나도 모르게 함성이 튀어나왔다. 놈은 나의 초대장을 열었다. 내가 보낸 제안 메일에 대해 구체적인 스케쥴을 다시 의논하자는 답장까지 보내왔다.


악성코드에 감염된 놈의 스마트폰을 열어 갤러리를 먼저 살폈다. 선정이와 자살한 여학생들 스마트폰에서 공통으로 발견된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나무 관, 벽면에 머리를 붙이고 공중에 붕 떠 있는 여자들의 사진,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악마의 사진까지 모두 저장되어 있었다. 어둠의 밀실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놈의 사진 갤러리는 변태적이고 기괴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놈의 스마트폰 파일을 모두 내 노트북으로 옮기는 사이, 드디어 비밀스럽게 닫혀 있던 도박사이트,<deathcitygame>에 관리자로 로그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사이트를 뚫었을 때 생각해둔 시뮬레이션을 가동할 차례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불법 도박 사이트답게 실시간 접속자가 400명이 넘었다. 초호화 카지노 세상에 푹 빠져 있는 접속자 아이디와 실시간 도박 영상을 일일이 저장하고 이제 1단계 계획을 실행할 차례, 후~ 큰 숨을 내쉬었다. <알리바바 은호> 계정에 권리자 권한으로 2300만 원을 충전한 후, 내 계좌로 연결해 입금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통장에 금액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에 통장 번호는 물론 계정 정보를 모두 삭제했다.     


2단계는 이 사이트를 지급 불능, 먹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고객 정보 파일을 내 컴퓨터로 내려받았다. 혹시나 이곳에 선정이나 피해 학생의 이름이 있을까? 천천히 고객 명단을 살피다 나는 심장이 멈춘 듯 얼어붙고 말았다. 이곳에 왜?? 그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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