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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Nov 20. 2024

연재 소설 최종화 - 지옥의 도성, 판데모니움

미스테리 연재 소설 -진실이 드러나다


<회원 긴급공지> 최근 도박사이트 단속 강화로 인해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새로운 사이트로 이전합니다. 고객님들께서는 게임머니를 현금으로 환전하시고 링크로 첨부한 텔레그램 대피 방에서 기다리시면, 빠른 시간 안에 더 짱짱한 카지노 사이트로 모시겠습니다. 신속한 환전 부탁드립니다!    

 

있지만 없는 사람, 다니엘 정이 나를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긴급조치. 오전 8시, <deathcitygame> 고객 명단 중 1/10에 해당하는 일천 명에게 1차 문자메시지 폭탄을 투여했다. 이제 게임머니를 출금하려는 회원들로 인해 사이트는 카오스에 빠질 것이다.

천천히 살펴보니 <deathcitygame>은 놈처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운영되는, 아주 프라이빗한 도박사이트였다. 가입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관리자의 허가로만 입장할 수 있고, 최대 베팅 금액이 억 단위까지 가능한 통 큰 도박판! 게다가 다니엘 정은 일부 회원들과 수시로 쪽지를 주고받았다. 그 속에는 ‘캔디, 아이스, 케이 배송 요청’ 같은 마약 거래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비밀스러운 거래를 위해서인지 놈은 아주 꼼꼼하게 고객 명단을 관리하고 있었다.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성별, 나이, 거주지는 물론 직업까지 표시되어 있는 명단 속에서 공무원, 의사, 교사, 종교인 같은 직업을 발견하고 헛웃음이 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방송과 언론에서 쉽게 마주하는 유명 배우, 개그맨, 정치인, 예술가, 심지어 도박사이트를 수사해야 할 경찰, 검사까지 고객이라니! 과연 이 사건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다니엘 정의 정체가 드러난다 한들,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 기가 막힌 명단을 살피며 허탈해하던 나를 완전한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의 이름’. 더구나 그가 지금 이 시간, 실시간 도박 중이란 사실이었다. 그러나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다니엘 정이 해킹 사실을 인지하기 전, 구축한 세계를 빠르게 허물어야 놈을 불러들일 수 있다.     

-한국 시간 오전 8시 30분, 링크의 인터넷 회의실에 입장할 것. 시간을 지키지 않을 시 고객 일천 명 2차 문자메시지 발송예정.-     

놈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 사이 다니엘 정과 이 사이트에서 캐낸 자료들을 파일로 묶어 김화식 기자님에게 송부했다.

8시 25분, <deathcitygame>사이트에는 <고객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사이트 점검으로 인해 24시간, 현금 환전이 중단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 8시 30분 정각, 놈은 내가 링크로 보낸 인터넷 회의실에 평소처럼 비디오를 끈 채로 입장했다. 여전히 흔들림 없이 부드럽고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은호, 반가워. 역시 내가 안목이 있어. 미팅한 첫날부터 끌렸거든. 내 제안에 답장이 없어 실망했었어. 진심이야.”

“그러게요. 사이트 뱅크런 비상 상황으로 만나게 된 것, 유감입니다.”

“해커로서 은호 실력이 입증된 것이라 맘에 들어. 그리고 이런 돌발 게임, 무료하던 차에 아주 짜릿하고 흥미진진해.

“판데모니움 골드 머니가 로또가 될 거라 했던 말, 무슨 뜻이지?”

“영국, 호주, 네덜란드 같은 많은 나라에선 겜블링 라이센스를 발급받은 온라인 카지노가 합법이야. 아직 한국 시장은 온라인 카지노가 불법이라 허가받은 게임 안에서 사이버 머니만 허용되지. 그러다 보니 불법이 판을 치는데 한국 게임업계 1위인 위마블은 겜팟이란 자회사를 두고 불법 환전을 방조하고 있어. 유튜브에서 VJ들이 겜팟 카지노게임을 생중계하는데 거기 출연하는 게임머니 판매상 대포통장으로 돈을 입금하면 유저들에게 게임머니를 충전해 주는 식이야. 그 어마어마한 게임머니를 환전상이 혼자 생성하는 게 가능할까? 결국, 합법적인 게임으로 판을 깔고 머니 장사를 통해 회사는 돈을 쓸어 담고 있는 거야.”

“그런 불법 사례를 빌미로 당신이 저지른 범죄가 합리화될 수 있다고 생각해?”

“안타깝단 뜻이지. 판데모니움 유럽 버전은 투명하게 블록체인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유저들이 안심하고 게임할 수 있어. 장난질이 없단 얘기야. 머지않아 대한민국도 부족한 세금 확보를 위해 온라인 카지노 합법화 수순을 밟게 될 거야. 선진국 모두 온라인 카지노 사업에서 엄청난 세금을 벌어들이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불법 도박 사이트 난립, 폐해로 인한 안전한 카지노게임 서비스 도입, 뭐 이런 그럴듯한 구실을 들고 나오겠지. 한국에 카지노게임 합법화가 되면 말이야. 판데모니움 유럽 버전과 한국 버전 골드머니를 조금씩 환전 가능하게 오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ㅎㅎ. 이제 좀 내 구상이 이해가 되나?”     


아.. 다니엘 정이 판데모니움 유럽 버전과 한국버전을 동시 오픈한 빅픽쳐는 바로 저것이었구나. 놈의 말대로 심각한 불법 온라인 도박 문제로 인해, 합법 카지노 시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게 된다면? 도박 인구의 급증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엄청난 자금이 온라인 카지노 산업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놈은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온라인 카지노 산업은 AI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인간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금광이야. 눈치 빠른 사람들은 벌써 이 사업으로 꿈을 이루고 있지. 해커라서 넌 가능성이 더 무궁무진해. 같이 일해 보는 게 어때? 오늘 깜짝 이벤트로 입은 손해는 깔끔하게 잊어줄게.”

“물고문으로 나를 저세상 보내려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아~그건 오해야. 잘 알아듣게 설명해 주라 했는데, 폭력은 나도 아주 혐오해.”

“여학생들 성 착취 동영상 올리고 협박해 죽인 건, 폭력이 아닌가?”

“오해가 있어. 협박이 아니라, 거래위반 사실을 경고한 것뿐이야. 난 고객들에게 아무 보증도 없이 돈을 빌려주거든. 제때 갚으면 문제 될 게 없지, 아니..워낙 느긋한 성격이라 약속한 기간보다 보통 3개월까지 기간을 더 주는데 적게는 수천만 원, 억 단위 넘는 돈을 뻔뻔하게 안 갚는 고객들을 넋 놓고 기다릴 순 없잖아. 너희 학교 죽은 여자아이, 선정이? 그 인간이 빌려 간 돈은 겨우 3천만 원이었는데 정말 지루하게 질질 끌더라구..”

“그래서 기괴한 사진들, 대출금 못 갚는 사람들에게 협박용으로 보낸 거야?”

“협박이 아니라 경고라니까. 아, 그리고 그 동영상은 불법이 아니라 대출자들이 직접 찍어 보내준 거야. 영상이 대출 담보물인 셈이지. 동영상 오픈은 채무불이행, 약정 위반에 따른 페널티이고. 난 도박자금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출해 준 거 외엔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말도 안 돼!! 성 착취 동영상을 대출자들이 직접 찍어 보낸다구? 그럼 선정이를 그렇게 만든 인간이...그럴 수는 없어..”     


너무나 끔찍하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의 전모에 온몸이 덜덜 떨려오면서 소름이 돋았다. 놈이 원하는 것은 명징하다. 자신이 구축한 가상 카지노 세상과 현실의 혼재, 사이버 세상을 뚫고 날아올라 검은 날개로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는 것. 놈은 자신이 확장 중인 세상 속에서 데스게임을 즐기는 악마다!     


“똑똑한 은호, 잘 생각해 봐. 그 영상 찍힌 장소와 구도, 누가 짓일까?”

“당신 뭐 하는 인간이야? 왜? 어떻게...이런 끔찍한 일을 꾸밀 수가 있지?”

“애초에 인간에게 사랑, 믿음, 희생같이 고결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 나를 금맥 터지는 카지노 사이트 운영자가 되게 해 줘서 지금은 그 인간한테 꽤 고마운데 말야. 형이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되었는데 3년 동안 연락 끊긴 아비란 작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형에게 지급된 보험금이랑 학교에서 모아준 위로금까지 싹 훔쳐 달아나버렸어. 도박으로 사업이고 집이고 다 날려 먹은 인간이, 그 돈 없으면 당장 치료가 끊겨 형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지. ㅎㅎ 아마 그 돈은 단 하룻밤 쾌락으로 사라졌을걸? 어때? 인간이란 스스로 인간이라 착각하며 사는 존재야, 그림자처럼 내면에 스며 있는 악은 감춰두고 인간인 척하는 괴물들이 난 너무 역겹거든. ”

“그래서 게임을 하고 있는 거야?”

“데스시티게임? 원하는 사람과 언제든! .”

“무사할 줄 알아? 당신 내가 꼭 잡아서 죗값 치르게 할 거야!”

“은호, 나두 니 나이 때 그렇게 겁이 없었지. 잘 들어. 니가 오늘 탈옥시킨 사이트 하나쯤 버려도 상관없어. 새로 사이트 오픈해 문자 날리면 도박에 빠진 인간들 불나방처럼 다 돌아오게 되어있으니까. 경찰에 신고해 봐. 난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mediator야. 차라리 하나님을 만나는 게 빠를걸. ㅎㅎㅎ  마지막으로 기억해. 니가 나랑 계속 게임을 하려 하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


처음부터 비디오를 켜버리면 놈이 도망칠 거 같아, 적당한 시간에 호스트 권한으로 비디오를 슬쩍 열리라 생각했는데 놈과 대화하는 사이 뇌 정지가 오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다. 급하게 비디오를 켜짐. 상태로 바꾸었지만 아주 짧은 순간, 놈의 얼굴이 스치듯 화면에 남고 사라져 버렸다. 흰 얼굴에 검은 선글라스, 왼쪽 턱을 괴고 있는 놈의 손목 위로 검은 날개 문신만이 화려하고 선명했다.     


악마전, 복마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판데모니움은 17세기 영국 시인 존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에 등장하는 지옥의 도성이다. 창조주에 대한 반역으로 땅끝 지옥에 떨어진 모든 악마들이 총집결하는 무법지대, 설정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에 다양한 게임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선정이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실낙원>이 꽂혀 있는 학교 도서관 책장에 숨겨둔 것은 우연이었을까? 무수한 타락 천사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책의 표지가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며 <PANDEMONIUM>, 놈이 확장 중인 세계가 현실을 집어삼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선정이에겐 여기가 지옥의 도성, 그 자체였겠구나....      


‘빙의’란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의 나였으리라. 파우스트에게 전해 달라던 선정이의 두 번째 파일을 깨끗하게 출력한 다음, 자살 직전 선정이가 나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있는 봉투 속에 함께 넣었다. 그리고 집을 나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화양동 세이브몰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섰다. 검은 유리로 쌓아 올린 것 같은 글로리 빌딩 옥외 전광판에는 오늘도 <판데모니움 베타버전 시즌2>의 광고가 회색빛 하늘을 배경 삼아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중이다. 새까만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자동차,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의 사람들, 아침부터 시끄러운 매미 소리까지.....거리의 모든 풍경이 영사기 속 필름처럼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그 위로 오직 단 하나,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은, 파우스트, 그가 있는 곳. 횡단보도를 건너 글로리 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4층 버튼을 누른다. 화양동에 살면서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곳, 선정이의 죽음과 단 한 번도 연결해 본 적이 없는, 아니 절대로 연결할 수 없는 사람이 가증스러운 얼굴로 뻔뻔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는 바로 이곳!     


“저기요, 예약하셨어요? 어머~그냥 들어가시면 안 돼요!”     


데스크에서 급히 일어나며 나를 제지하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공간 속에 쉽게 흩어져 버린다. 겹겹으로 가려져 있던 그의 공간 속으로, 오래전 예고된 방문자처럼 나는 불쑥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이상하리만치 낯설지 않은 공간,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나를 응시하는 그의 혼탁한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영혼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아..좀비처럼 모든 것을 망각한 저 눈빛, 정말 숨이 막혔었지. 너의 쾌락을 위해 나의 벌거벗은 몸을 팔아넘긴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진심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책상 위에 봉투를 내려놓는다. 이상하다. 이 순간을 이미 인지한 사람처럼 그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편지를 꺼내 읽는다.      



내게 지옥을 선물한 당신,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똑같이 비밀스러웠던 모든 것들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었고, 당신은 흥건한 피가 흘러넘치는 도시 속에 살인자의 얼굴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파우스트의 결말은 다시 쓰입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당신은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아멘.



잠시 후, 덜덜 떨리는 두 손에서 편지지가 미끄러져 ‘툭’, 땅에 떨어진다. 경련이 이는 듯 기괴하게 씰룩이는 얼굴로 그가 뭐라 뭐라 지껄인다.     


“나도 진짜.. 나도 속은 거야..함정!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정말 억울해. 모든 걸 다 잃고 코너에 몰린 나에게 돈을 빌려줄 테니 니 동영상을 가져오라 했어! 그냥 담보물이라고, 절대 외부 유출 않겠다고!! 그놈이 널 협박하고 영상을 유포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그런 게 아냐, 나야말로 다 잃었어. 선정아, 제발 제발 아빠를 용서해 줘!”

“살인자. 당신은 바로 1시간 전까지도 내 살을 찢고, 뼈를 바르고, 영혼을 짓이긴 값으로, 도박을 즐기고 있었잖아? 이제 그만 지옥으로 꺼져줘!”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음이 차라리 꿈이길 바랐던, 단단하게 밀봉된 숨 막히는 이 시공간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가 진료실 안으로 불쑥 등장했다.     


“경기도 마약범죄수사대 진필원 형사입니다. 믿음 가정의학과, 주동훈 원장 맞으시죠?”

“......”

“당신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21년 8월부터 최근까지 내원자들에게 수면마취제를 상습 투약하고 마약을 유통하는 범죄 조직에게 의료용 펜타닐 패치를 지속적으로 공급한 혐의입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이 말하는 것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고, 당신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포박당한 채, 20년 넘게 존경받는 의사로 지역 사회에 쌓아 올린 권위와 명성의 권좌에서 거짓말처럼 그는 퇴장했다. 진료실 벽면에 걸려 있는 나무 십자가의 예수는 한쪽으로 고개를 떨구고 그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책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예수의 떨궈진 고개가 줄곧 바라보는 위치, 그의 책상 책꽂이 가장 구석 자리에는 선정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해 간 <파우스트>가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왜 이 책을 여기에 가져다 꽂아두었는지, 그 의미를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을까? 추악함과 역겨움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파우스트> 책을 펼쳐 보았다. 결말 부분, 두 장이 아주 깨끗하게 잘려나가 있다 바닥에 떨어진 선정이의 편지를 주워 그 속에 들어있던 잘려나간 파우스트 결말 부분, 두 장을 맞춰보았다. 진료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전이지만 벌써 뜨거운 한여름의 열기 속으로, 파우스트의 결말 두 장을 갈가리 찢어 흩뿌렸다. 나 역시 그 순간, 진심으로 그가 지옥에 떨어지길 기도했다.          



<에필로그>

-7개월 후, 24년 2월 -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장작을 옥상으로 나르고 새로 산 색색 알전구를 타프 밑에 두르고 갬성 캠핑존을 만든다고 야단법석이다. 잠시 후 지난여름 불발되었던 바비큐 파티가 옥상에서 열릴 예정이다. 3일 전, 그러니까 선정이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 선물처럼 내가 추추합으로 K대 사이버 보안학과에 마지막으로 문 닫고 들어간 합격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약유통과 성 착취물 동영상 유포,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공범 혐의로 한도영은 징역 8년, 강영진과 길성배는 징역 5년을 확정 판결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선정이의 아버지, 믿음 가정의학과 원장 주동훈은 한도영과 그의 조직원들에게 2년에 걸쳐 미용시술을 빙자해 미다졸람, 프로포폴 등의 의료용 마약류를 불법 투약하고 펜타닐을 공급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 중이다. 약품 취급 가에 100배에 이르는 폭리를 통해 주동훈이 2년간 얻은 이익은 8억 원. 선정이 오빠인 주선민 선배는 코로나19 시기 무리한 의료기기 투자로 아버지가 병원 운영 경영난에 쪼들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불법행위는 도박자금 충당을 위한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선민 선배는 아버지의 범죄 사실에 충격을 받아 지난 11월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재미있는 것은 손동호 원장 역시 주동훈과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것이다. 손동호도 1년 전부터 내원자들에게 의료용 마약류를 불법 투약해 왔는데 검찰은 이 문제를 수사하는 중에 서일고 23년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시험문제 조작 사건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손동호의 재판도 진행 중이다.     

옥상에서 아버지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다락방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찬 기운이 훅 밀려들어 왔다.     


“선배! 어쩜 저 알바 시간에 바비큐 파티를 할 수가 있어요? 편의점에서 고기 냄새나 맡고 떨어지란 거예요?”     

12월부터 아버지 편의점에서 알바를 시작한 선희는 지훈이에 이어 시도 때도 없이 내 다락방을 찾는 불청객이다.     


“아~그게 아니라 김화식 기자님이 저녁에 또 취재가 물려있다 해서, 중간에 잠깐 선희 부르려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넌, 노크란 걸 모르니?”

“ㅎㅎ 초대 안 받았어도 이미 편의점에 대타 박아뒀다는!! 짠! 이거 봐요. 나비에 누가 왔다 갔게요?”     


내가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선희가 운영자를 맡고 있는 <NABIS>는 선정이의 온라인 추모관이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활동가들이 사이버 범죄 피해 여성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NAVIS>에, 연약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를 중의적 의미로 연결해 선희는 홈페이지 곳곳에 봄처럼 노란 나비를 그려 넣었다. 북태그 동아리 활동 시절, 벚꽃 아래 미소 짓는 선정이의 사진을 올려둔 추모관에는 수천 명의 네티즌들이 방문해 안타까움과 미안함, 영혼의 안식을 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선희가 내민 스마트폰 속에 사진 한 장이 떠 있다. 파란 하늘과 백사장처럼 끝없이 하얗게 펼쳐진 우유니 사막의 먼 지평선 위로 솜사탕처럼 포근포근한 뭉게구름이 맞닿아 있다.    


 


- 선정아. 너의 빛나는 시간을 함께했던 것, 그리고 네가 허물어져 가는 시간을 곁에서 지키지 못한 것..모두 잊지 않으려 해. 남겨진 우리 마음에 너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찾아오길.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몰아내는 변화와 희망의 상징이 되어 날아오르길, 항상 기도할게. -

- 은호야, 여행 중에 이제야 소식을 듣고 왔어. 리스펙 은호, 멋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너희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웃고 떠들던 시간들이 축복이었음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어. 다시 돌아가려구. 너희들처럼 멋진 제자들과 더 멋진 시간을 만들어 갈 거야. 언제 어디서나 너의 길을 응원할게!     



“선배두 김효정 사서쌤 보고 싶죠? 이분 은근 매력 터져요.”     

김효정 쌤, 잘 계시는구나... 가끔씩 보고 싶고 궁금했었다. 나 혼자 엎어지고 깨지면서 작년 1년을 헤맨 것 같지만 이제 안다. 말없이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준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함께 웃을 수 있음을.      


“은호야 김화식 기자님 도착했어! 지훈이 고기도~ 얼렁들 나와!!”     


세상에 없던 바비큐를 선보이겠다며 지훈이가 공수해 온 목살구이는 최고였다. 직업학교 졸업과 함께 지훈이는 서울 시대 5성급 호텔의 막내 셰프가 되었다. 1년간 근무하고 얼른 군대에 다녀온 후에 해외 호텔로 진출해 요리를 더 배우는 것이 녀석의 꿈이다.     


“야~ 특급 호텔 셰프가 구워주는 바비큐는 역시 때깔이 다르네. 화식아 부럽지? 우리 아들, 한 명은 셰프고 한 명은 이제 보안전문가란 말이지. ㅎㅎ”

“당연하죠. 선배님. 아들들이 아주 남달라요. 은호는 항상 스릴 담당. 대학교도 스릴 넘치게 추추합으로 붙고 말이야. 축하해!! ㅎㅎ.”

“차은호 나두 진짜 진짜 축하한다. 많이 먹어라! 니가 다시 찾아준 2300만 원, 앞으로 니가 뭘 하든 평생 까방권으로 인정해 줄게. ㅋㅋ 그 돈 홀랑 날렸으면 해외 호텔 진출도 미뤄야 할 뻔.”

“언제는 지나간 일은 미련 안 둔다고 하더니. 멋진 척? ㅎㅎ 동호는 요새 어때?”

“한도영 잡혀 들어가면서 자동으로 빚 청산이 돼서 제일 신났지. 내가 타던 오토바이로 열나 배달 중이야.”

“와~~완전 고기가 녹아요. 사장님, 바비큐 파티 자주 열어주세요.”

“아이구 우리 선희 붙박이 알바로 묶어두려면 고깃값 장난 아니겠는데~ㅎㅎ”

“기자님, 다니엘 정은 아직도 행방 묘연해요?”
 “판테온 플레이어 회사에 요청해서 받은 프로필에는 뉴저지 럿거스대 출신으로 되어있는데 학교에 확인해 보니 최근 10년 동안 다니엘 정이라는 이름의 졸업자가 없어. 프로필, 인적 사항 뭐 하나 제대로인 게 없으니 경찰이 못 잡는다고 나가떨어지는 것도 엄살은 아닌 거 같아.”      


주동훈 원장이 구속된 후, 김화식 기자님과 나는 도박사이트 <deathcitygame>의 고객 명단에서 연주동 팸 자살 여학생 A의 아버지와 대전 자사고 여학생 오빠의 이름을 확인하고, 이 연쇄 자살을 기획한 놈이 다니엘 정이라는 것을 경찰에 제보했었다. 경찰은 해외에 서버를 둔 놈의 도박사이트를 수사할 권한이 없고, 국내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여학생들의 자살에 깊이 관여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힘들다며 시간을 끌고 있다. 그 사이 불법 도박 사이트 <deathcitygame>은 여전히 보란 듯이 영업 중이고, 정식 버전을 오픈한 <판데모니움>게임 역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놈의 세상, 지옥의 도성은 계획대로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선정이가 남긴 마지막 다섯 번째 파일에는 성경 구절 단 한 문장이 염원처럼 남겨져 있었다. 정말 이대로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놈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누가복음 12:2->




*연재 소설 <판데모니움>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5월에 시작한 이야기가 7개월 만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독자님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연재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3년 전부터 구상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이 작가 혼자만의 노력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판데모니움> 집필 과정에서 깊이 깨달았습니다.

도박과 마약, 성착취물 동영상 문제를 정말 심도 있고 생생하게 전해,  우리 청소년을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의 때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해져 심각해지고 있는 청소년 범죄에서 우리 다음 세대를 건져낼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지막 화는 브런치 스토리 30화에 맞추다보니 더 길어졌네요. 길고 힘든 이야기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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