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메시지와 더불어 꼿꼿이 서지 못해 하늘거리는 자태로 선한 웃음 쏟아내는 구절초 사진이 따라왔다. 서로 순하게 닮은 것들끼리 손잡고 빈틈을 메꾼 덕에 온 가을이 환하다.
29×23/캔버스에 아크릴
가을의 한복판, 지금 나는 두브로브니크에서 209킬로 스플리트를 향하여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구절초 향기에 섞였다.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도시, 스플리트로 들어서면서부터 구절초 향기에 살균돼 선지 저절로 로맨틱해진다. 응? 이곳이야말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 펼쳐지는 도시거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삶을 꿰맨 한 땀 한 땀으로 작은 도시가 로판소설로 읽히는 스플리트니 아주 흥미진진할 밖에.
달마티아 지방에서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운의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 된다. 빛나는 지략으로 로마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은 생을 스플리트에서 지내고자 이곳에 궁전을 짓는다. 그의 천운은 황제의 자리까지였는지 그가 죽은 다음에야 궁전이 완공이 돼서 그는 그가 그리 소원하던 궁전에서 단 하루도 머물지 못했다. 훗날 디오클레아티누스의 영묘였던 자리에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던 대주교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이 들어서고 그곳에 성 도미니우스의 관이 안치돼 있건만 정작 황제의 시신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단 걸 그가 알았다면 그는 이곳 스플리트를 사랑했을까?
아무튼 황제의 도시 스플리트에선 호텔에서 묵어야 된다며 과감히 숙소업그레이드한 덕에 아침과 저녁시간 뭐해먹나 걱정해방이다. 두브로보다 커피값도 싸단 게 얼마나 고마운 지 모를 스플리트다. 두브로 더위에 몇 번이나 살까 고민하던 옷들이 여기선 반값이다. 그래도 앞길이 구만 리이니 캐리어의 무게를 늘릴 수 없어 여기서도 패스~
나르도니 광장에서
스플리트의 나르도니 광장에서 스떼끼를 기다리며 비어에 젖어드는 중 거리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이 눈에 잡힌다. 여든이 훨씬 넘은 듯한 할아버지 화가분의 색연필 그림을 그리며 그가 그린 그림을 팔고 있다. 검은색 연필로 세밀하게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그 위에 무심한 듯 툭툭 채색을 입히며 그림에 열중하다가도 그림에 관심을 갖는 이가 다가가면 아주 정성스레 눈을 맞춘다. 우리가 밥 먹을 동안 아무도 그림을 사는 이 없으면 하나 사달라, 하늘이에게 부탁한 참인데 비어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홀짝이다 보니 두 점이나 팔렸다, 결국 그림은 사지 못하게 됐으나 그림 판매로 기분 좋아진 할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 또한 다행이지 뭐~
어스름 모여드는 저녁시간 바다가 보이는 해변으로 향한다. 바다 위에 핀 붉은 꽃 같은 일몰에 취하여 에스프레소 한 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계단에서 라이브를 들으며 아이리쉬 커피 이 잔을 마신다.
팔만 사천 겁의 윤회를 통해 나와 닿는 게 인연이란다. 그렇다면난 어느 생에서든 황제를 만날 운명이었단거지. 황제가 사랑한 도시에서 감히 황제를 사랑할 수 없으니 스플리트의 커피를 사랑하기로 작심한다. 하필 오늘 내내 구절초 향기에 전염됐던 터라 내가 마신 게 커피였는지 구절초 차인지 지금도 헷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