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늘 도망가

하준이와 할머니가 함께 그리는 제주이야기/한라산 윗세오름

by 동숙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바람이 만들어놓은 신산리 창 그림에 손가락을 덧대어 그리며 하준이가 물어요.


"오늘부터 하준이는 일찍 일어나야 해. 고모할머니들께서 하준이랑 같이 논다고 제주에 오셨거든. 날마다 즐겁고 재밌고 유쾌한 일들이 일어날 거야"


대답 대신 하준이의 하품이 길어요.



사랑은 늘 도망가


광치기 해변에서 할미 손 대신 왕고모할머니 손을 잡고 걸으며 꽁냥 거리던 대화를 엿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왕고모할머니, 춥지? 내가 손잡아 줄게."

"괜찮지만 하준이 손잡고 가자. 추워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오겠어. 그러니 지금 충분히 즐겨야지."


사랑이 이렇게 도망가네요. 섭지코지 횟집에서 고모할머니들 사랑 듬뿍 받으며 맛있게 고봉밥 먹고나더니 자기가 밥값 계산을 하겠다며 당당히 백 원짜리 동전을 내미는 거예요. 센스만점 주인이 거스름돈이라며 십 원짜리 동전을 주는 바람에 모두들 왁자지껄 한바탕 웃었답니다. 신산리 지환이 형아네 전복죽이 맛있다고 우르르 모시고 가서는 신천리로 돌아가는 왕할머니께 꼬깃꼬깃 천 원짜리 한 장 건네더군요. 왕고모할머니께서는 78년 사시는 동안 처음 받아본 천 원이라며 천만 원짜리 행복한 걸음으로 신천리숙소로 가셨어요. 밥 사고 용돈 주고 사랑 줄 줄 아는 하준이는 윤택하고 말랑말랑한 인간관계가 뭔지를 아는 놈이었어요.


사랑은 늘 도망가/15.5 ×23/두방지에 채색



한라산 산할아버지 선물


네 분의 고모할머니께서 머무르는 신천리는 벽화가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신천다방부터 시작해 집집마다 꽤나 공들여 그려놓은 벽화가 길 끝까지 이어져있어요. 돌담 대신 집이나 창고 등에 그림을 그려서 집과 그림이 한 몸이라 갤러리를 걷는 듯 아름다운 마을이에요. 떨어진 동백꽃마저 또 피어나 그림으로 스며들어요. 바다와 인접해 있는 길 끝엔 옛날 봉화대였던 문화재가 있어서 역사공부도 하고 바람의 향기를 맡으며 한나절 머물기 좋은 동네예요.


"제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름이 뭐야?"


왕할머니에게 던진 하준이의 질문 덕에 오늘의 일정이 순식간에 결정됐어요. 하준이 생애 첫 등정이 한라산입니다. 둘째 고모할머니께서 장애가 있으신 터라 길고 험한 걸음은 어렵고 하준이 역시 어리니 영실코스 윗세오름까지 한라산과 만나러 갑니다.


한라산 조릿대 사이로 펼쳐지는 소나무 피톤치드 향수를 온몸으로 받으며 힘차게 오르는 한라산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바람은 머리카락을 잡아채고 옷섶을 헤집어 놓질 않나, 발길 닿는 곳곳마다 눈얼음밭이니 어른도 오르기 힘든 산길이에요. 일곱 살 하준이에겐 도전! 외치고 떠나는 위험한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않고 의젓하니 어른인 할민 힘들단 소리 절대 못하지요.


"오늘 한라산을 오르는 가장 어린 일곱 살이야!"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길목마다 제주천사가 나타나 파이팅을 외치니 힘들어도 업어달란 말을 못 한 참이었어요. 눈이 언덕배기처럼 쌓여있는 곳에선 할아버지가 먼저 업어준다 하니 기분 좋은 입꼬리를 숨기고 얌전하게 산행을 즐기더니만 순탄한 길에서 걸음이 불편한 둘째 고모할머니 손을 잡아주는 걸로 할아버지의 도움을 대신 갚는단 생각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게 인정이고 도리지요.



윗세오름 정상매점에서 사 먹자고 간식거리 없이 오른 산행이었는데 정상엔 코로나로 매점이 없어졌네요. 힘겹게 오른 만큼 내려가야 할 길이라, 망연자실한 세븐 앞에 또 천사가 나타났어요. 김밥이며 초콜릿, 과자와 몸이 불편한 고모할머니에겐 지팡이를 주신 천사까지 한라산은 천사수시출몰지역입니다.


"한라산 산할아버지 선물이었나?"


한라산 윗세오름 1,700미터 등정에 세븐 모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 하준이는 고모할머니가 사준 포켓몬빵에 피곤한 다리도 금세 싹 나아서 문어의 꿈을 크게 씩씩하게 불러줍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나는 초록색문어, 밤하늘을 날아가면 오색찬란한 문어가 되는 거란 유쾌하면서도 청량한 하준이의 노랫가락에 모두들 초록색 문어의 꿈을 꾸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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