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아주기
나는 어떤 사건들이 생겼을 때 담담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당황스럽고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내 표정과 행동이 담담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릴 때 동생과 함께 내복만 입고 쫓겨났을 때도 문 틈으로 지켜본 엄마의 목격담에 의하면 현관문 앞 계단에 앉아 내가 동생을 안아주며 “걱정하지 마. 엄마가 조금 있으면 문 열어주실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분명 무서운 마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듯하다. 확실한 것은 문을 열어달라며 울고불고 애원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내가 가진 천성인 것 같다.
이렇듯 삶에 초연해 보였던 나를 동동거리게 만든 것이 있다. 바로 내 아이들이다. 아이들에 대한 일은 종종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차분함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하게 한다.
제일 처음은 아이가 내 뱃속에 자리 잡았을 때이다. 나는 갑작스레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아기를 초기에 잃게 되었었다. 평소처럼 일하고 야근까지 하며 조심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해 자책감이 들고 슬픔이 컸다. 나는 담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생명이 찾아오자 불안해졌다. 처음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될까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고 모든 것이 걱정되었다. 입덧을 하다가 어느 날은 멈춘 것 같아 초조했고, 안정기는 언제 찾아오는지, 아기의 태동은 언제 처음 느낄 수 있는지 머릿속은 온통 걱정과 불안뿐이었다. 결국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병가를 내고 말았다.
그전과는 달리 생명을 품은 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그 모든 것을 해도 뭔가를 더 해야 하는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출산을 한 후에는 나의 몫이라는 것에 한계를 둘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나의 몫으로 가지고 와야 했다. 그래야 내가 최선을 다 하는 엄마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모유 수유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예민하게 아이에게 반응하고, 아플 때 옆을 지켜주고, 발달을 위한 놀이를 찾고, 눈 맞춤, 옹알이 하나에도 답해주며 아이에 대해 하나라도 놓치는 일이 있을세라 마음도 몸도 바빴다. 그러나 육아라는 일은 어떤 선을 정하고 ‘내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됐지’ 하며 손을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로서 부족한 점들을 찾고 채우기 위해 노력하며 더 잘하기를 끝없이 바랐다. 그리고 조금씩 지쳐갔다.
막내가 세 돌 무렵 이제 제법 아빠를 따르기 시작할 때쯤의 일이다. 어느 주말 처음으로 남편이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나갔다. 아이 셋을 데리고 나가는 남편에게 막내가 넘어지지 않게 잘 보고 꼭 손을 잘 잡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시간이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라는 것을 알기에 고마웠다. 행복한 마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란 하늘을 보며 미소 짓는 것도 잠시, 나는 휴식의 장소를 창가로 정한 것을 후회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 창문으로는 놀이터가 보인다. 쉬려고 했는데 또 아이들을 보고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남편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종종거리며 아빠를 따라가고 아빠는 다른 아이들 손은 고사하고 막내의 손도 잡아줄 생각이 없었다. 남편은 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한 아이들을 쓱 한 번 본 후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아이들은 슬쩍슬쩍 한 번씩 확인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창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막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한숨이 흘러나왔고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남편을 보았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걸어가서 무릎 한 번 털어주고 등을 툭툭 쳐주더니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아이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다시 뛰어놀았다.
평소 우리 아이들은 넘어져도 많이 아프지 않으면 잘 울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다 쳐도 벤치로 돌아가서 또 휴대폰만 보는 남편이 왠지 모르게 얄미웠다. 세상 편하게 아이들을 보는, 정말 보기만 하는 남편을 보니 열심히 아이들을 쫓아다니던 나를 생각하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이 너무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그 최선이 내 마음은 돌보지 못하고 온 신경을 아이들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아이들을 보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남편과 그 와중에도 잘 노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필요 이상으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떤 역할이 주어졌을 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해도 해도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해야 할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은 하는데 나만 하지 않은 일은 없는지, 이미 완료한 일에도 실수는 없었는지… 살펴보고 또 살펴봐도 부족함 만이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딱 내 상태라면,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지칠 때가 생기면 잠깐은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일을 대충 하자는 말은 아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고 잠시만 그 역할에서 빠져나와 느슨한 시간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다시 내 앞에 두고 해결하면 된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부족함 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있음도 스스로 알아주기로 했다. 그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돌볼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나에게 칭찬과 격려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남편의 허술함을 보며 화가 나기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이를 키우며 바쁜 나날 속에서 나에 대해 점점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나의 천성이 가리키는 방향을 무시하고 엄마라는 역할이 가리키는 방향에만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그 둘의 불균형을 알아채지 못해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나는 분명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끊임없이 불안하고 동동거리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한 편으로는 어떤 일에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역할은 분명 나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이 나라는 사람 전부를 나타낼 수는 없다. 내가 가진 역할과 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만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의 방향도 함께 조금씩 조정해야 한다.
육아에 여유를 장착한 남편이 내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나도 여유를 좀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여전히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