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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Jul 29. 2023

아들이 '도망가자'를 틀어주었다.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얼마 전까지 비가 오는 날이 잦았다. 남편은 직무 특성상 비가 오면 출근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독박육아를 피할 수가 없다. 낮에만이 아니라 밤에도, 새벽에도 호우경보가 뜨면 남편은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했고, 어떤 날은 퇴근을 하지 못하고 밤을 새운 다음날 근무가 끝나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편도 힘들었겠지만 세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나도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날도 남편은 퇴근하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고, 나는 서둘러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상을 치운 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첫째 아이는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들고 내 옆에 다가왔다. 평소였다면 그냥 들었을 수도, 혹은 신난다며 아이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날은 빠른 비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더 심란해졌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이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엄마, 내가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틀어줄게."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그게 뭔데?"

  "기다려봐."


  그릇을 헹구며 기다리는 나의 귀에 '도망가자~'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휴대폰 어플로 노래를 듣고 있던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도 듣자고 청했었다. 그때 청했던 노래가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였고, 아이는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노래를 틀어주고 뿌듯한 듯했다.  노래를 듣는 나는 '도망가자'라는  소절이 나오자마자 정말 도망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노래의 마지막쯤에 나오는 '돌아오자'라는 가사를 들을  이런  마음을 알고 아이가  노래를 고른 건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들었다. 아홉 살짜리 아들이 틀어준 ‘도망가자 들으며 말도  되는 상상을 펼치는 , 음악 덕분인지 아이 덕분인지  와중에  편해진 마음.  상황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아이는 내가 만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맞지? 저번에 엄마가 이 노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래. 맞아.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 맞네."

  흐뭇해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아이는 다시 처음부터 재생시켜 주었다.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옆에 서서 노래를 반복하여 재생시켜 주는 아이를 보며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고마웠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이가 계속해서 재생시켜 주는 노래의 가사를 곱씹으며 들었다. 가사 하나하나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아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아이의 마음만은 이 가사와 같으리라.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고 있으리라.


  누군가를 위로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하는 고민은 어른에게도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는 그 위로를 해야 할 적당한 때를 알아채고, 또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어 한 어른을 제대로 위로했다.


  보통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벼운 토닥임, 따뜻한 포옹,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 그리고 때로는 옆에 나란히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주변의 어른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위로를 한다. 세상에 수많은 단어들을 아직 다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그래서 더 주저 없이 위로의 몸짓으로 그 마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슬퍼하는 엄마에게 기어와 눈물 젖은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아기는 세상에서 배우는 첫 단어인 ‘엄마’라는 단어도 모르지만 그 아이의 작은 손과 엄마를 바라보는 눈,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된다.

  부모는 그런 것을 위로라고 여기지 않고 그저 곁에 있는 아이를 보며 힘을 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아이의 위로였고 그래서 힘을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 (중략) ...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 (중략) ...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 선우정아 ‘도망가자’의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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