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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바람 Oct 18. 2024

손끝으로 책을 읽는 도서관

도서관에 들어서면 묵은 책 냄새가 코끝에 진하게 풍기는 그 느낌이 참 좋다.

원하는 책을 빼들고 적당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아래 앉아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활자를 넘어선 다른 상상의 세계에 깊이 빨려 들어가 옆에서 누가 불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활자와 깊은 교감을 나눈다.

나는 손에 한 번 책을 들기 시작하면 길을 걸으면서도 글을 고, 누가 큰소리로 여러 번 불렀다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 한다. 어느 날은 지하철 좌석에 앉아 너무 깊이 집중하며 책을 읽었는지 어떤 미친놈이 내 바로 앞에서 자신의 그것을 꺼내놓고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이 있었다.(참 대단한 사람이다. 아래위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멘 멀끔히 생긴 환자였다.)

그놈은 얼마나 진이 빠졌을까...

아... 그것을 눈치챘을 그때는 차마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 채 책에 얼굴을 묻고 다른 칸으로 후다닥 도망가는 게 전부였다.

그때는 이십여 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다독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책을 읽으면 정말 깊게 빠져들어 외부의 세계와는 단절되는지라 웬만해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서는 책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지 않으면 틀림없이 내가 내려야 할 장소를 훨씬 지나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남편은 살면서 한 번도 묵자 도서관에 가 본 적이 없다.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럼 그 욕구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아려오는 '플란다스의 개' 꿈과 환상을 갖게 하는 '톰소여의 모험기' 등 소년의 가슴을 뛰게 는 그 즐거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어야 했을까...

어린 시절엔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 한 시간을 빼서 책을 읽어주시기도 하고 봉사단체가 와서 책을 읽어주고 갔더란다.

때로는 점자책을 읽거나 매일 오후 다섯 시에 방송하는 어린이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독서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곤 했었다.

중학생 시절이던 80년대엔 목요일 방과 후 시간마다 삼육대학교 봉사단체인 '일곱 빛 봉사단'과 이화여대 독서 봉사단이었던 '퀴빛탄 봉사단체'가 찾아와 글을 읽어주었더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엔 이화여대생 누나와 고등학생이던 시각장애인 남학생이 연인으로 발전하여 결국 부부의 인연으로 가정을 꾸린 사람도 있다.

고등학생 진학반이 되어서는 과외를 받고 싶은 지원자를 뽑고 명단을 만들어 각 대학에 공문을 보내면 3월 초쯤 봉사단이 꾸려지고 '한우리'라는 대학생 연합 봉사단체가 학교로 와서 1:1 또는 1:3~4로 나누어 국, 영, 수 과외를 해 주기도 하며 참고서를 읽어주고 듣는 대로 받아 적어 책을 만들곤 했다고 했다.

어떤 대학생 누나는 542페이지에 달하는 '클래식 대전집'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1년 동안 녹음 해서 56개의 테이프로 만들어 남편에게 선물로 주었단다.

그러나 그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책을 빌리고 읽을 수 있는 곳은 도서관, 점자도서관이다.

점자도서관의 시초는 영국의 시각장애인 '아널드 여사'가 1882년 런던의 국립 시각장애인 도서관에서 점자책을 대출한 게 시작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1931년 이후 국회도서관 내에 시각장애인 도서관을 별도로 마련하여 점자도서, 토킹북(맹인용 레코드)을 국내 20여 개 지정도서관에 배본하고, 무료로 대출하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데 우리나라의 점자도서관은 1981년 6월 1일 대구대학교에서 3억 6천만 원의 시설비를 투입하여 개설한 것이 최초라고 네이버 자료에는 표기되어 있으나 청송교육문화진흥회(한국점자도서관) 홈페이지에는 1969년 12월 10일 시각장애인 당사자이셨던 故  관장님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최초로 점자 도서관을 개관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의 남편 기억으로도 시각장애인이셨던 육선생님이 만든 도서관이 최초로 개관한 점자도서관으로 기억하고 있고, 맹인들은 그것을 일명 '육도서관'으로 불렀으며 그것을 모를 그 시대의 시각장애인은 없을 거라고 했다.

왼쪽은 한국 점지도서관, 오른쪽이 대구대학교 도서관이다.

남편의 친구와 남편이 함께 증언하기로는 일일이 점필로 점을 찍던 방식에서 아연판으로 점자 틀을 만들어 그 안에 점자지를 끼워넣어 롤러로 돌리는 금속 인쇄가 가능해지며 책을 만드는 기술이 더욱 체계화 되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맹아학교의 '최호선'이라는 기사님이 롤러를 발로 밟고 점자지를 끼워 넣어 손으로 직접 밀어가며 교과서와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는데 어느날 손가락이 기계에 끼이며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하여 당장 점자 교과서를 만들어 전국 맹학교에 배포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러자 위에서 언급한 1981년 그 즈음 대구대학교에서 점자 교과서를 제작하기 시작하며 교과서의 판권이 대구대학교로 옮겨지게 되었고, 대구대학에서 교과서를 만들고부터는 교과서의 수급이 원할하지 못 해 한 학기에 두세 권의 교과서만 배달되는 바람에 학생들이 원본을 직접 베껴 점자로 찍으며 또 다른 점자 교과서를 만들어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한편 서울맹학교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잃게 된 최호선 기사님을 내치지 않고 계약직으로나마 보일러 관리를 한다던지 하는 허드렛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칠십이 넘는 연세가 되도록 학교에서 근무를 하셨다고 했다.

어쨌든 이전 글에서 밝혔던 최초의 점역 사업이나 점자 도서관에 대한 기록을 바로 잡아 기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는 사람은 기록된대로 지식을 습득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당시 프레스판으로 제작된 점자 책은 따로 제본이 되어있지 않아 낱장으로 된 점자지를 한꺼번에 고무줄로 묶어 전달해 주는 것이 다였다. 그럼 학생들이 각자 책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실을 꿴 바늘로 직접 책을 꿰매서 사용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실과' 수업 시간엔 책을 매는 것을 가르치는 수업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는데 남편의 친구는 책을 잘 매는 기술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일정한 댓가를 받고 책을 꿰메는 작업을 많이도 해 주었었다며 너스레를 늘어놓는다.

어찌 됐든 그 당시 거액을 들여 사립으로 세워진 대구대학내 점자도서관이 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의 규모로 2층엔 90평의 전시장과 33평의 체험장의 점자 박물관과 녹음도서 제작실이 있다. 그곳엔 국내 최초, 그리고 세계 최초의 점자 지구본(지름 1m 20, 폭 1m 80cm, 높이 2m)이 있어 직접 지도를 손으로 만져보고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도록 제작되었고 국내, 외 점자 도서와 출판기기 등 336점이 전시되어 있다.

점자책의 역사, 인물, 교재와 교구 등 7가지 주제로 나누어져 전시된 이곳은 점자가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적 자료가 있으며 예전에 소개했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드신 박두성 선생님을 기리는 '박두성관'과 우리나라에서 점자를 처음 소개한 로제타 셔우드홀(1865~1951년, 캐나다인 의료선교사)을 기리기 위한 '닥터홀'이 있다.

또한 점자 타자기, 소리로 만나는 세상관, 점자 기관, 주요 인물관, 음성 도서 기기관 등 체계적이고도 방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소중한 곳이기도 하다.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점자 음성 안내 수목원으로 꾸며져 식물에 대한 설명판엔 점자를 함께 기록해 두어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점자를 읽어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성 서비스도 지원한다.

게다가 향기가 있는 식물을 많이 심어 직접 만져보아야만 알 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후각을 통해 식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조성해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국의 약 40곳의 점자도서관은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월 속에 그 기능이 줄어들며 음성 도서 또는 전자도서화 되어간다.

80년대 후반부터는 디지털 프린터가 개발되며 컴퓨터에 단어를 입력 하면 자동으로 점자가 찍혀 엄청난 속도로 점자책을 만들 수 있을만큼 기술이 발전되었지만 빼곡히 꽂혀 있는 부피가 큰 점자 도서책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는 것보다 귀로 듣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입력 봉사자와 낭독 봉사자의 도움으로 도서 내용을 녹음하는 등의 노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 보려 하지만 굳이 도서관에 들러 전자도서를 듣는 것보다 집에서 파일을 내려받아 듣는 것이 훨씬 편한 것은 사실이라 방문객이 줄어들고, 그에 따른 지방자치 보조금이 줄어들며 폐관되는 도서관이 점점 늘고 있다.

1992년에 설립되었던 서울점자 도서관도 한 때는 700여 권의 점자책을 열람, 대여하는 서비스와 직접 제작한 전자도서와 녹음 도서 등의 음성책이 1만 5000여 권에 달했으며 온라인 도서관인 '넓은 마을'과 모바일 도서관인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에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2023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네 번째로 폐관을 결정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계속될 예정인 듯 얼마 전 찾아간 '강서점자도서관'도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2005년에 개관하여 점자도서 제작 및 출판, 손소리 점자출판과 강서점자 도서관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하던 서울 서남지역의 유일한 시각장애인 점자 도서관도 매일 서비스를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보조금이 줄어들며 인건비를 감당하기도 힘든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남편도 간단한 안내문과 점역되지 않은 자료 말고는 점자 도서관을 가거나 점자 책을 읽기보다는 음성도서를 다운로드하여 읽는다.

이전엔 일일이 일정분량의 페이지까지 봉사자가 직접 녹음한 것을 전화 사서함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 했었다. 나 또한 남편이 필요한 책을 몇 시간에 걸쳐 읽으며 직접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

또는 아무런 감정도 높낮이도 없는 기계음으로 TXT를 변환하여 읽어주기도 한다. 하다못해 사춘기 소년들이 몰래 숨어서 읽던 야설조차도 무뚝뚝한 기계음이 읽어준다.

남편은 여러 도서관을 이용하여 책을 다운로드 받아 듣게 되지만 만약 원하는 책이 없을 때는 주로 국립중앙 도서관에 음성지원 도서를 신청하고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을 마친 도서를 다운로드 하여 책을 읽을 수 있다.  

안 그래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님의 책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선다느니 모두 품절되었다는 기사가 들리는데 남편은 침대에 편하게 누워 아주 빠른 속도의 전자 음성도서를 듣고 있다.


"자긴 좋겠네... 일일이 줄 서서 책 안 사도 되고...."


괜한 농담을 던져본다.


"그러게.... 같이 들을래?"


"난 활자로 읽을게... 버릇이 안 되어서 그런지 기계가 읽어주는 그 소리가 감정이입이 영~ 안되네..."


"그래 그렇긴 하지..."


" 크크 크큭.... 웃기다.. 슬픈 장면을 묘사하는데 기계 목소리가 너무 밝아..."


빠른 속도의 음성이지만 내 귀에도 어쩔 수 없이 들린다.

남편이 휴대폰 소리를 더욱 조그맣게 줄이고 자기만 들을 수 있게 귀에 바짝 붙여 듣는다.

나를 위한 배려이다.  


혹시라도 도심 속 어딘가에 '점자도서관'이라는 간판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이제 손에 꼽힐 만큼의 점자도서관만 남을 뿐 하나 둘 폐관의 수순을 밟게 될지도 모를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치열하게 상과 더불어 살아갔고 학습했고, 글을 읽어왔는지 알고 싶고,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 제 기능을 하나하나 잃어가며 사장되는 것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과 추억도 희미해 져 갈 것 같은 불안함 때문에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활자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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