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록(19)#이탈리아 ‘일부’ 카페
“저기 아파트 10채 중 네 채는 여행객 등 외지인이 묵는 숙박 공유 시설 ‘에어비앤비’, 또 다른 네 채는 다른 지역 사람들의 세컨드하우스 또는 별장입니다. 베네치아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단 두 채뿐이죠.”
관광 도시 베네치아의 현실을 이렇게 적절하게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이 설명은 지난 2020년 캐나다 언론 CBC가 코로나 팬데믹이 심각하던 때 경제적 타격을 입은 베네치아를 취재할 때 현지인이 건넨 말이다. 이 사람은 아파트 이야기를 한 뒤 “베네치아에는 관광객이 없으면 사람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일까. 베네치아는 행정 시스템부터 경제까지 모든 게 관광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카페도 다르지 않았다. 관광객이 찾는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했고 가격도 살벌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 플로리안(Caffè Florian)의 에스프레소는 3.50유로였고, 맞은편 카페 콰드리(Grancaffè Quadri)의 에스프레소 가격은 무려 8유로였다. 베네치아의 관광 중심지에 자리 잡은 데다, 역사적 이유 때문에 꼭 가야 한다는 희소성이 있다고 해도 과했다.
‘에스프레소 가격은 1유로’라는 이탈리아 커피 문화의 법칙이 떠올랐다. 10채의 아파트 중 두 채에 거주하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관광객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 아닐까 싶었다. 문득 그들이 마시는 이탈리아 커피와 커피 문화가 궁금해졌다. 관광지가 아닌 베네치아 골목길로 향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세 번째 방문인 만큼, 관강지는 과감히 포기하고 오롯이 커피에 집중하기로 했다. 고작 1박 2일에 불과한 일정임에도 커피를 마시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더구나 예상치 못한 해프닝 때문에 골목 안에 햇빛이 들기도 전인 새벽 6시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첫날 작지만,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여행길에 오르기 전 주변에서 걱정하던 일이 베네치아에서 발생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선 유럽발 ‘베드벅(빈대)’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엔데믹 후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유럽 등에서 유입된 빈대가 국내 숙박시설에 출현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빈대의 진원지인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니, 다들 걱정을 한 바탕 쏟아냈다.
'잘 대응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이유는 경험에서 나왔다. 유럽만 15년 넘게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베드벅을 경험하지 못한 건 숙소에 들어설 때마다 짐을 풀기 전 침대 곳곳에 살충제를 뿌린 덕이라고 자평했다.
이번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계심이 풀어지려던 때 베네치아 숙소에서 살충제 효과를 제대로 봤다. 난생처음 빈대를 만났다. 호텔 직원은 환불 외엔 다른 조치를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시간은 이미 새벽 1시였다.
다른 숙소를 찾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호텔 측의 배려 아닌 배려로 짐을 들고 1층 로비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호텔이 제공한 담요와 베개는 ‘겁이 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소파에는 앉지도 않았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덕에 하루는 일찍 시작됐다.
호텔에서 허용한 욕실에서 대충 씻고 해가 뜨기도 전 골목길로 나섰다.
‘전화위복’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듯 싶었다. 빈대의 저주는 커피라는 컨셉으로 떠난 여행에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늘어난 시간 덕에 카페 플로리안을 세밀하게 보자는 당초 베네치아 여행 계획에 '골목길 카페 찾기'가 추가됐으니 말이다.
일단 골목길 카페 명단에 오른 건 두 곳이었다. 솔직히 새로운 곳을 발굴한다는 의미의 ‘찾기’라는 개념보다는 ‘재방문’이라는 말이 맞을 듯 하다. 2010년과 2014년 아침 식사를 해결하려고 숙소 인근에서 우연히 찾은 곳이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출근길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한 입에 털어놓고 크로와상을 베어 물던 곳이었다. 가격은 저렴한데 맛이 좋아 일정 내내 찾은, 기분 좋은 기억을 남긴 곳이기도 했다.
밤새 로비 의자에 앉아 외장하드를 뒤지며 2010년과 2014년 폴더에서 골목길 카페의 사진을 찾아 이름을 확인했다.
지도 속 두 카페는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산 마르코 광장에선 다소 떨어져 있지만, 도보로 2km 거리 안에 있었다. 대중교통 1일권이 있음에도 시간이 많으니 베네치아의 버스 역할을 하는 배인 바포레토 대신 걷기로 했다.
관광객들로 붐비던 기존의 베네치아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만났다. 어둠이 가시고 빛이 스며드는 골목길 사이로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보였다.
골목을 누비면서 명단에 새로운 카페도 추가됐다.
그리고 가성비 좋은 것으로만 알고 다시 찾은 카페, 걷다 보니 우연히 찾은 카페가 알고 보니 커피 맛집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걷다 보니 추가된 카페였다. 관광지와 떨어져 있어 한적한 데다 아침해가 완전히 들지 않아 여전히 조명을 환하게 켜 놓은 카페는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실패 확률이 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베네치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바에 다닥다닥 몰려 선채 에스프레소와 함께 페이스트리, 또는 크로와상을 먹고 있어서였다.
목적지까지 갈 길이 머니 잠이나 깨자 싶어 들어갔다. 카운터 뒤로 원두가 담긴 길쭉하고 투명한 통이 일렬로 세워진 게 보였다. 목표는 ‘에스프레소’였다. 가격은 1.5유로. 우리 돈으로 2000원, 저렴했다.
어쩌다 들른 카페라 남긴 사진은 몇 장 없었다. 외부에서 동태를 살피며 찍은 사진과 원두가 담긴 통,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전부였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카페의 진가를 알게 된 건 한국에 와서다. 베네치아에서 제대로 된 커피바를 찾았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베네치아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커피 회사 카페 델 도제(Caffè del Doge)가 운영하는 바였다. 베네치아엔 카페 델 도제로 검색하면 나오는 카페이자 커피바가 두 곳 있다.
카페 델 도제의 시작이 된 리알토 다리 근처와 리오 테라 산 레오나르도(Rio Tera S. Leonardo) 거리에 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은 넓고 깨끗한 도로에 있는 커피 바 카나레지오(Coffee Bar Cannaregio)였다. 카페 델 도제는 홈페이지에 자신들의 프랜차이즈 커피바에 가면 14가지 이상의 다양한 커피를 만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에스프레소는 물론 드립이나 에어로 프레소로 추출한 커피도 마실 수 있다고도 했다.
맛있는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 바리스타 교육도 철저히 이뤄지고 있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스페셜티커피협회(SCA) 트레이너가 바리스타 교육과 관리를 지원하고 있다.
1952년 처음 세운 리알토 다리 옆 카페 델 도제엔 가지 않았지만, 그 커피 맛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참고로 리알토 다리 쪽에 있는 카페 델 도제도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리알토 다리에 근처라는 점에 피할 필요가 없다. 리알토 다리에서 약 100m 떨어진 데다 관광객의 시야에서 벗어난 골목에 있어 한적하다는 게 방문객들의 후기에 적혀 있다(커피부록(17) 참조).
‘나만 알고 싶은’ 카페도 찾아갔다. 남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는 전제를 붙인 건 여행을 준비하던 중 이 카페가 더 이상 개인 소장할 수 없는 곳이 됐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국내 케이블채널에서 방송한 한 프로그램에서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는 여행 가이드로 나서 한국 연예인들에게 베네치아와 인근 지역을 소개했다.
거기서 그 카페가 나왔다. 그것도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장소로.
혹여나 한국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건 아닐까, 염려를 안고 카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디어 베네치아의 유명한 주거 지역 중 하나인 캄포 산토 스테파노(Campo Santo Stefano)에 도착했다.
아카데미아 다리 너머에 있는 이 광장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붐비는 교차로 중 하나지만, 이른 아침인 덕에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캄포라는 말처럼, 광장인 이곳에선 한때 투우가 열렸다고 한다.
광장 중앙엔 이탈리아 언어학자, 작가, 애국자인 니콜로 톰마세오(Niccolò Tommaseo)의 동상이 서 있었다. 이 동상은 1882년 프란체스코 바르자기(Francesco Barzaghi)가 대리석 블록으로 조각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13세기 지어진 성 스테파노 교회(Chiesa di Santo Stefano) 쪽으로 갔다. 좁은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카페는 교회 맞은편 골목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인 소장’엔 실패했지만, 우려하던 일은 없었다. 여행 비수기여서인지, 방송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하는 듯 했다. 1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현지 주민들은 아침 식사를 위해 '모퉁이에 있는 바'라는 뜻의 바 알랑골로(Bar all'Angolo)를 찾았다.
카푸치노와 페이스트리를 주문했다. 창가 쪽 스탠드 좌석에 자리했다.
바에서 에스프레소와 빵을 먹으니 바리스타이자 카페 사장이 손님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커피와 페이스트리의 맛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끼며 나오는 길, 야외 테이블에 앉은 한 손님의 커피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안 마시면 후회할 것만 같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카페 주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카푸치노의 일종이라고 했다. 호기심 어린 손님의 표정을 보고 주인이 설명을 이어간다.
유리잔에 에스프레소를 넣고 그 위에 우유를 얹은 커피, ‘트리에스테식’ 카푸치노라고 하니 안 마시면 후회할 듯 했다(커피부록(17) 참조).
주문을 마치고 커피가 나오는 사이 휴대전화로 정보를 찾아봤다. 이 커피를 이탈리아에선 카포 인 비(Capo in B)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카포(Capo)는 카푸치노(cappuccino), 비(B)는 유리(Bicchiere)의 약자인데 풀어 해석하자면 ‘유리잔에 카푸치노’라는 뜻이다.
스팀으로 데운 우유를 얹은 카페 마끼아또(Caffe Macchiato)와 우유 거품을 얹은 카페 스키우마토(Caffe Schiumato)의 중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는 정보도 있었다.
매년 이탈리아 전역에서 카포 인 비 챔피언십이 열릴 정도로 인기도 많다고 했다.
잠시 후 커피를 가져왔다. 주인의 손에 들린 경험하지 못한 커피를 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우유, 그 뒤로 들어오는 쌉싸름한 에스프레소가 극적인 대비를 이뤘다.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은 뒤 비로소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냅킨에 적힌 카페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 모카 에프티(Moka Efti)였다. 그러고 보니 야외 테이블 위 타프에도 바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원두가 궁금하던 터에 이 이름이 궁금증을 풀어줄 듯 했다.
모카 에프티는 1930년 안젤로 몬티(Angelo Monti)가 생두 등 식재료를 식민지 국가에서 수입해 유통하던 모카에프티(Mokaefty)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안젤로는 밀라노에 기반을 둔 이 회사의 경영 방향을 생두를 로스팅해 판매하는 쪽으로 잡았다.
커피 브랜드 이미지와 유통을 개선하기 위해 밀라노 중심부에 4개의 바를 열고 매년 밀라노에서 열리는 전통전시회 피에라 캄피오나리아(Fiera Campionaria)에도 스탠드 부스를 만들어 참여했다.
안젤로의 전략은 적중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왕실에 커피를 공급하는 공식업체로 선정됐다. 이탈리아 왕실은 밀라노의 모카 에프티 본사와 공장에 왕실 문장을 게양하는 권리도 부여했다.
이후 회사의 영역을 밀라노에서 나아가 전국으로 확장하기로 했다. 롬바르디아, 투스카니와 마르케 지역은 물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까지 포괄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1957년 안젤로의 아들 조르지오가 회사에 합류해 40년간 회사의 경영 전략을 이끌었다. 커피의 질을 높이면서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생두 커피를 직거래할 수 있는 구매처도 전 세계로 확대했다.
커피 제조와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1960년엔 스위스 티치노주 멘드리시오에 생산공장을 세웠다.
커피 유통이 늘어나면서 공장 규모는 2000년대 들어 두 배 이상 커졌다.
주요 고객은 ‘호레카(Ho.Re.Ca)’였다. 호레카는 호텔(Hotel), 레스토랑(Restaurant), 카페(Cafe)를 말한다.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의 호레카가 그들의 고객이 됐다.
지금도 모카 에프티는 호레카에 집중하면서도 가정용 캡슐커피, 파드커피 등 종류도 다양화하고 있다.
경제사상사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로 잘 알려진 미국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가 2017년 내놓은 책 ‘다시, 국가를 생각하다(사진)’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상 부유했던 나라들은 번영의 시절을 끝내고 불황의 시대로 접어든 뒤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는 것이다.
번영과 불황, 파국의 길을 걸은 나라로 1700년대 해상무역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베네치아를 꼽았다. 1600년대 명나라, 1800년대 합스부르크 가문,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오스만제국과 함께.
그러면서 부크홀츠 박사는 파국의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출산율 하락, 국제무역의 활성화, 부채 증가, 근로 윤리의 쇠퇴, 애국심의 소멸 등 다섯 가지 번영의 대가를 치르며 분열과 파국의 길로 들어선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안타깝게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상황과 맞물려 그 대가를 지금도 치르고 있는 듯 하다.
이탈리아는 현재 출산율이 하락하고 있다. 2024년 3월 29일 이탈리아 통계청(ISTAT)에 따르면 2023년 출생아 수는 37만9000명으로 전년 대비 3.6%(1만4000명) 줄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역대 최저로 떨어졌던 2022년 출생아 수 기록을 새롭게 경신한 셈이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 수인 합계출산율도 2022년 1.24명에서 지난해 1.20명으로 하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수치다.
부채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2023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137.3%로 유로존에서 그리스(160.3%)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고 했다.
코로나 때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2020년 국가 채무 비율이 154.9%로 역대 최고치를 찍은 뒤 감소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빚더미에 앉아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암울한 상황에서 베네치아는 코로나 충격을 정면으로 맞았다.
CBC는 2020년 보도에서 국경 폐쇄와 이동 제한으로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베네치아가 눈에 보이는 경제적 타격을 입었지만, 그 위기가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CBC에 따르면 1970년대 15만 명 이상이 거주하던 베네치아는 매년 1000명씩 인구가 줄어들면서 현재 인구는 5만여명에 불과하다.
매년 감소하는 인구 중 절반은 노년층의 사망, 나머지 절반은 치솟는 주택 비용과 일자리 부족으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베네치아가 처한 현실을 카페에서 목격했다. 골목길 카페 찾기에 나서면서 리스트에 가장 먼저 올린 카페에서다.
14년 전인 2010년 베네치아 최북단에 숙소를 정하고 관광지로 가기 위해 걸어가던 중 분위기에 끌리듯 들어간 카페였다.
커피 맛에, 빵 맛에 반해 베네치아 일정 내내 찾았고 일정의 마지막 날엔 현금만 받는 카페 정책을 따르기 위해 ATM까지 찾아 유로화를 인출하는 정성을 기울인 곳이기도 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1.9km 떨어진 이 카페까지 골목을 누비고 다리를 건너며 드디어 도착했다.
트라토리아 바 폰티니(TRATTORIA BAR PONTINI)라는 간판 속 이름이 보이는 순간 14년 전으로 회귀하는 느낌이었다. 부푼 기대감은 금세 무너졌다. 이른 아침에도 손님들로 북적이던 카페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야외 테이블도 없었다.
창에 붙인 안내글이 문을 닫은 이유를 알려줬다. “‘직원 부족’으로 2023년 11월 1일부터 일요일과 월요일은 쉰다"는 내용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일자리가 부족해 베네치아를 떠났고, 인구가 줄어들면서 일할 사람이 주는 악순환.
2010년 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회 초년생이라 관광지에서 가장 먼 곳에 숙소를 잡은 덕에 발견한 이 카페는, 관광지에서 가장 먼 이유로 일손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에스프레소의 쌉싸름한 맛과는 다른 씁쓰름한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14년 전 커피와 페이스트리 맛을 보지 못한 아쉬움, 눈앞에서 목격한 베네치아의 안타까운 현실을 남겨둔 채.
베네치아에선 골목길 카페도 매력 넘치지만, 특별한 공간에서 뜻밖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재미를 누리는 것도 해볼 만하다. 공간이 맛을 더하는 걸 경험할 수 있어서다.
트라토리아 바 폰티니에서 허탕을 치고 골목길을 걸으며 바 올앙골로를 찾아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곳에서도 그런 경험을 했다.
사실 ‘우연’이라는 단어를 쓰기엔 너무 유명한 이곳은 화재의 아픔을 겪고도 다시 일어서면서 ‘불사조’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라 페니체 극장(La Fenice Theatre)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화려하고 번화한 대로변에 위치한 빈 국립 오페라 극장(Wien Staatsoper)을 경험한 탓이었을까. 유명새에 비해 한적한 뒷골목에 자리한 데다 외관도 소박해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잡은 건 건물의 전면 중앙에 새겨진 휘장이었다. 파란색과 금색으로 새긴 극장 간판 위로 황금색 새가 화염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소박하다고 표현한 외관은 첫 번째 화재 후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건축가 지아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가 계획해 1792년 지어진 모습이다. 이후 두 번의 화재와 풍파에도 외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내부 구조도 셀바가 제안한 걸 따라갔다.
셀바는 당시 베네치아에서 선호하던 말굽 모양으로 틀을 잡았고 170개의 동일한 박스석(box seat)을 층별로 구성했다.
두 개의 입구 중 한쪽은 작은 광장인 캄포(campo)로 향하고 무대 뒤와 극장으로 직접 연결되는 다른 한쪽은 운하 쪽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첫 번째 화재가 발생하기 전 초창기 라 페니체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름도 달랐다. 1755년 그리마니(Grimani) 가문이 세운 ‘산 베네데토 극장(Teatro San Benedetto)’이 라 페니체의 전신이다. 이후 베니에(Venier) 가문이 소유하게 된 극장은 1774년 큰 불로 건물이 전소되다시피 했다. 오랜 시간 베네치아엔 지역을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이 사라졌다.
그 사이 베니에 가문과 경영진인 오페라단은 화재의 책임을 두고 법정 공방을 이어갔다. 분쟁 끝에 베니에 가문이 승소했고 오페라단이 베니에 가문에 새 극장을 지어주기로 했다.
오페라 극장 하나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 시당국과 지역 유지들도 건축에 힘을 보탰다. 1789년 베네치아의 상업 귀족(Nobile Societa)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극장을 직접 짓겠다고 나섰다. 극장 부지는 베니에 가문이 소유한 땅이자 현재 라 페니체가 있는 캄포 산 판틴(Campo San Fantin)으로 정했다.
잃어버린 오페라 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한 극장을 짓기로 했고 건축 공모에 나섰다. 그렇게 2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건축가가 셀바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새롭게 마련된 극장을 라 페니체라 불렀다. 아라비아 사막에 살며 500년마다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죽은 뒤 그 재 속에서 부활하는 전설 속의 새, 불사조를 의미했다. 화재로 잿더미가 됐지만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뜻에서였다. 건물의 전면에 있는 황금색 새가 바로 그 불사조였다.
1792년의 재개관 공연에선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의 ‘아그리젠토의 경기(I giuochi d’Agrigento)'가 공연됐다.
라 페니체가 또다시 화염에 휩싸인 건 1836년 12월이다. 난방기구 과열로 인한 화재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큰 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년 만에 복구해 1837년 12월 26일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시기 라 페니체는 음악가들과 함께 세계적인 극장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등 기라성 같은 벨칸토(Bel canto) 작곡가들이 자신의 오페라를 라 페니체 무대에 올리면 서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벨칸토는 18세기에 확립돼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오페라에 쓰였던 기교적 창법이다.
특히 로시니는 ‘탄크레디(Tancrède)’(1813)와 ‘세미라미데(Semiramide)’(1823)의 첫 공연을 라 페니체 무대에 올렸다.
베르디도 라 페니체와 특별한 인연을 쌓아갔다.
1844년 베네치아 카니발 기간 중 베르디가 ‘에르나니(Ernani)’의 첫 선을 보인 곳이 라 페니체였다.
그 후 13년간 ‘리골레토(Rigoletto)’부터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시몬 보카네그라(Simone Boccanegra)’까지 모두 라 페니체에서 초연을 가졌다.
1930년부터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제현대음악페스티벌에도 함께 했다. 페스티벌에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실바노 부소티 등이 라 페니체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해 세계적인 극장의 위상을 높였다.
개인이 소유하던 라 페니체는 1935년 베네치아 지방자치단체인 ‘꼬뮨 디 베네치아(Comune di Venezia)’에 양도되면서 공공 기관이 됐고 복원과 변경 작업을 이어가며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듯 했다.
명성을 쌓아가던 라 페니체는 1996년 1월에도 화염에 휩싸였다. 이 화재가 뼈아팠던 건 방화라는 사실 때문이다. 수리 작업을 맡은 전기회사 기사들이 작업 지연으로 벌금을 부과받을 게 걱정돼 건물에 불을 지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들은 법적 심판을 받았지만 베네치아 시민은 물론 전 세계 음악가에겐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됐다.
화재가 나던 날 밤 현지 신문인 가제티노의 음악평론가이자 베네치아 바그너협회장인 주제페 푸글리에제는 극장 구석구석에 서린 추억을 떠올리면서 '부고(訃告) 기사'를 써내려갔다.
라 페니체 무대를 통해 세계적인 테너 가수가 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라 페니체 없는 베네치아는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 불사조가 잿더미 속에서 날아오르게 하자"며 극장 재건을 위한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재건축은 2001년부터 시작됐다. 재건축의 핵심은 1854년 메두나 형제가 인테리어 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화재의 트라우마 때문이었을까. 메두나 형제의 설계도를 다른 장소에 보관한 덕에 천장 벽화, 무대막 그림 등을 재현하는 게 가능했다.
1954년 개봉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센소(Senso)’도 참고했다. 오스트리아 청년 장교와 이탈리아의 백작부인 리비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군이 베네치아를 침공하던 날 밤 불사조 극장 무대에 오른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로 시작한다.
650일 동안 200명의 미장공, 예술가, 목공공 및 기타 장인으로 구성된 팀이 약 9000만 유로(약 1315억 4220만 원)의 비용을 들여 옛 극장의 분위기를 재현해 냈다. 다만 예술무대 시설은 확장되고, 좌석수도 840석에서 1000석으로 늘었다. 재건 작업을 마친 라 페니체는 2003년 12월 14일 첫 연주회를 시작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한 역사를 거치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 때문에 골목길에서 마주한 라 페니체를 스쳐 지나갈 수 없었다. 마리아 칼라스, 파바로티 등 세계적 가수들이 공연한 공간에서 공연은 보지 못하지만, 극장만 둘러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공간이겠다 싶었다.
아침 일찍 움직인 덕을 톡톡히 봤다. 극장 문이 닫혀 있어 살짝 긴장하기는 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일할 사람이 없어 문을 닫은 바 폰티니를 보고 온 터라 극장도 못 보나 싶었다.
다행히 입구에 붙여진 안내판엔 오전 9시 30분부터 내부 투어가 시작된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10분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식당에서도 하지 않는 오픈런을 하게 됐다. 덕분에 여유롭게 극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티켓을 사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는 곳에서 환대하듯 맞아 주는 게 있었다. 2023~2024년 공연 프로그램이었다. 그 안내문에서 발견한 뜻밖의 이름, 정명훈 지휘자는 잠시나마 뿌듯함에 취하게 했다.
로비를 통해 극장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극장 앞까지 기둥, 바닥, 계단 등은 화재의 피해를 가장 적게 입어 예전 모습을 가장 많이 유지하고 있다고 있다. 로비의 경우 셀바의 계획대로 만들어지고 난 뒤 1937년 확장됐다. 로비 계단을 통해 극장으로 들어섰다.
무대 위는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말굽 모양의 극장 구조, 천장 위 샹들리에, 황금색으로 치장한 박스석 난간의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는 순간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다.
라 페니체의 서열화된 공간인 박스석 중 가장 비싼 왕실 전용 공간 ‘로열 박스’다. 사실 라 페니체는 왕실에서 지은 극장이 아니다 보니 처음부터 로열 박스가 있었던 건 아니다.
베네치아의 정치적, 역사적으로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로열 박스가 만들어졌다.
번영을 이루던 베네치아는 1797년 5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1제국에 점령된 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폴레옹이 패전한 후 지배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갔고 1805년엔 또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로열 박스는 이런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다. 1807년 나폴레옹을 위해 임시로 만들면서부터다.
그해 12월 라 페니체에선 나폴레옹을 환영하기 위해 이탈리아 작가 라우로 코르니아니 알가로티(Lauro Corniani Algarotti)가 쓴 칸타타(Giudizio di Giove) 공연이 열리게 됐고, 나폴레옹은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기로 했다.
라 페니체는 두 번째, 세 번째 층의 박스석 각 3개씩, 총 6개를 철거하고 임시로 로열 박스를 지었다.
첫 번째 화재가 나고 극장을 재건할 때는 서열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170여개의 박스석을 만들었지만 숱한 사건, 사고 등을 겪으면서 로열 박스가 다시 생기거나 철거되고 다시 지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현재의 모습은 1866년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에 들어가면서 완성됐다. 외부 처마 장식 꼭대기에 사보이 왕조의 방패가 있었던 자리엔 1946년 공화당이 승리하면서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 사자가 차지했다.
천장에는 화가 레온하르트 가바닌 (Leonhard Gavagnin)의 ‘과학과 예술의 신격화(Apotheosis of the Sciences and the Arts)’가 그려져 있다.
공연장을 나와 복도엔 라 페니체 무대에 오른 뒤 세계 정상급 성악가로 발돋움한 성악가들이 라 페니체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만나볼 수 있다.
여기서 눈길을 잡는 사진은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리아 칼라스다.
극장을 모두 들러보고 마지막으로 3층으로 올랐다. 5개의 방으로 구성된 이곳은 음악과 예술의 신인 아폴로에게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살레 아폴로니(Sale Apollinee)’라 명명했다.
친목의 장소가 된 방들 중에서도 발길을 멈추게 한 곳은 ‘단테의 방(Sala Dante)’이었다.
이 방은 이탈리아의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 탄생 600주년을 기념해 1865년 개장했다.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화가 자코모 카사(Giacomo Casa)는 천장 프레임 안에 이탈리아가 위대한 시인 단테에게 왕관을 씌우는 모습을 그렸고 벽에는 단테의 '신곡' 속 장면 6개를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1976년 9월 살라 구이디로 이름이 변경됐다가 1996년 화재로 파괴된 뒤 복원하는 과정에서 다시 예전의 이름을 갖게 됐다. 그림 속 단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발길을 잡아 맨 건 커피 향이었다.
극장 안 매점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바를 운영하는 주체는 안드레아 로사(Andrea Rosa)가 시작한 로사 살바(Rosa Salva)다.
안드레아는 시대를 앞서가는 케이터링 서비스를 기획한 인물이다. 식당에 가지 않고 베네치아 궁전과 빌라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이동식 부엌’을 고안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성공했다.
1879년 살바로 알려진 안드레아의 아들 안토니오 로사(Antonio Rosa)가 ’이동식 레스토랑’을 물려받고 왕실의 셰프가 되면서 사업의 영역은 확장됐다. 국제 요리대회 수상과 표창으로 실력을 검증받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페이스트리 요리였다.
이후 로사 살바는 직영으로 빵을 만들고 케이터링 서비스를 이어가는 동시에 칼레 피우베라(Calle Fiubera)에 있는 본사에서 요리를 연구하고 있다. 본사 매장과 함께 베네치아 도심 곳곳에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역사적인 공간인 라 페니체에서 역사와 실력을 자랑하는 로사 살바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었다.
베네치아 여행을 마치고 난 뒤에야 알게 된 박물관 속 카페들도 있다. 올 초 교육방송(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 베네치아 편으로 방영한 내용 중 현지 가이드로 나선 임성일 큐레이터가 추천한 카페다.
EBS방송에선 산 마르코 광장을 둘러싼 3개의 아케이드 건물인 프로쿠라티(Procuratie) 중 나폴레옹의 집무실로 사용된 프로쿠라티에 누오비시메(Procuratie Nuovissime) 건물에 자리한 코레르 박물관 카페(Museo Correr cafe)를 소개했다(커피부록(18) 참조).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카페는 프로쿠라티에 누오보(Procuratie Nuove)와 프로쿠라티에 누오비시메 건물에 있는 코레르 박물관(Museo Correr)의 매표소 옆 리셉션 구역에 있다.
2013년 문을 연 카페는 산 마르코 광장을 바라보며 에스프레소의 풍미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영업시간은 박물관 개관 시간에 맞춰져 있다. 40.8평(135㎡)의 공간은 제국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가구, 화려하게 장식된 벽으로 꾸며져 베네치아 왕궁의 황실 아파트를 떠올린다. 여기에 테이블과 편안한 작은 안락의자를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방문한 뒤 휴식을 취하기 이상적인 장소라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특히 박물관에 있는 카페지만, 박물관 입장권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이처럼 입장권 없이 박물관에서 커피를 즐기는 곳은 또 있다.
코레르 박물관과 함께 베네치아 시민 박물관 재단(MUVE , Fondazione Musei Civici di Venezia)이 운영하는 박물관 속 카페다. MUVE는 베네치아와 베네치아의 문화 및 예술 유산을 관리하고 개발하기 위해 2008년 베네치아 시의회 이사회에서 통과된 결의에 따라 설립됐다.
MUVE가 관리하는 카 레초니코 박물관((Museo Ca' Rezzonico)과 카 페사로(Ca' Pesaro)에서도 박물관과 같은 이름의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카 레초니코 박물관은 18세기 무렵 작품을 소개하는 미술관이다. 카 페사로도 1층과 2층엔 근대 미술관, 3층은 동양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두 박물관 모두 카날 그란데에 있고 박물관 입장권 없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다만 MUVE가 관리하는 박물관 중 입장권이 있어야 갈 수 있는 카페가 있다.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속 카페다.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총독인 도제의 공식적인 주거지로 9세기에 건설됐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1309년부터 1424년의 기간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