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부록(20)#이탈리아 ‘일부’ 카페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프랑스… 한 달간 발품을 판 7개국이다. 여행 컨셉은 커피였지만 여행지에 따라 미세한 구분이 생겼다. 첫 구분은 처음 간 나라와 여러 번 간 나라. 이탈리아는 세 번째, 프랑스는 네 번째 방문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처음이었다.
방문 횟수로 가르고 나니 새로운 구분법이 더해졌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여행 컨셉의 메인이 커피임에도 세컨드 컨셉인 ‘나머지 숙제’의 비중을 높였다. 처음 방문하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는 커피에 집중했다. 역시 첫 방문국가인 헝가리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는 국가 간 이동 중 들르는 나라여서 컨셉없이 자유롭게 걷고 먹고 보는 여행지였다. '들르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는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이탈리아에선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기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숙제가 있는 곳, 밀라노였다.
이탈리아에겐 조금은 민망하고도 불편한 닉네임이 있다. ‘조상 덕에 먹고 산다’는 말.
로마제국의 본영(本營)이던 로마,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시국,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수상도시이자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베네치아, 옆으로 기운 피사의 탑이 있고 진자의 법칙을 발견한 곳 피사 등 예술, 과학, 인문부터 철학과 종교까지 이탈리아 각 지역은 세계사의 모든 분야를 관통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등 역사책 과학책 미술책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있고 이들이 남긴 모든 것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조상들 중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인물이 있다면 다 빈치가 아닐까. 덕분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그의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론 다 빈치의 모든 작품 앞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아니었다. 생애 처음으로 다 빈치 작품을 대면한 곳, 바티칸 박물관에서였다. 이탈리아를 처음 찾은 2010년의 일이다.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에 사람들이 워낙 몰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11~17세기 회화들이 전시돼 있는 회화관(Pinacoteca)은 조도를 낮춘 조명에 사람까지 많지 않아 여유 있게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다 빈치가 남긴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Saint Jerome in the Wilderness)’를 만났다.
다 빈치는 유명세에 비해 남긴 작품이 턱없이 적었다. 그의 작품이라고 확인된 건 고작 17편이었고, 그중에서도 3분의 1은 미완성 작품이었다.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도 미완성 작품 중 하나였다.
호두나무 패널에 단색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성자인 히에로니무스가 시리아 사막에서 은둔자로 삶을 살던 노년기 모습을 담았다. 그림은 다 빈치 사망 후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5개 조각으로 절단돼 흩어졌다. 19세기 초 수집가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삼촌인 페쉬 추기경이 조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찾은 조각이 합쳐져 복원됐고 페쉬 추기경의 후손에 의해 교황 비오 9세에게 팔렸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 전시됐다.
그림은 바위가 많은 곳에 무릎을 꿇고 앉은 성자다. 그의 눈동자는 위로 치켜뜬 듯 보이는데 시선이 닿는 곳은 그림의 맨 오른쪽에 스케치된 십자가다.
성자의 상징을 찾는 재미도 있다.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는 작은 돌이나 발 밑에 누워있는 성자의 충성스러운 동반자인 사자가 바로 성자 히에로니무스를 설명하는 단서다.
미완성작이기는 하지만 다 빈치의 예술적 가치가 곳곳에 드러난다. 사다리꼴 구도의 성자는 S자 곡선의 사자와 대조를 이룬다. 완벽하게 구현된 성자의 목과 어깨 근육은 다 빈치의 첫 번째 해부학 그림이 떠오를 정도로 섬세하다.
다 빈치의 작품을 다시 만난 건 성자 히에로니무스를 본 며칠 뒤다. 로마를 떠나 도착한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서다. 이탈리아를 처음 찾은 당시 박물관을 찾을 때면 그 박물관의 ‘시그니처’ 작품을 찾는데 집중했다.
바티칸 박물관은 시스티나 성당 속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라면 우피치미술관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의 탄생(La nascita di Venere)’이었다.
시그니처 다웠다. 가장 넓은 공간에 전시돼 있었고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 이유에서 시그니처가 아님에도 사람이 몰리는 곳에 시선이 쏠렸다. 수긍이 갈 만한 이유였다. 바로 다 빈치의 작품 '수태고지(The Annunciation)'가 있는 곳이었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피렌체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스튜디오에서 견습생으로 있을 때 그렸다. 수태고지는 15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회화 주제였다. 신약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녀가 기적적으로 잉태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걸 알리는 장면(누가복음 1장 26~39절)이다. 그 아들은 예수다.
그림 속엔 그림을 그리던 당시 시대상이 녹아 있었다. 마리아 앞의 대리석 테이블은 그 시기 베로키오가 조각한 피렌체의 산 로렌조 대성당에 있는 피에로와 조반니 데 메디치의 무덤에서 가져왔다. 마리아가 읽고 있는 성경책 아래에는 반투명 베일로 구약성서의 예언을 상징하고 있다. 천사는 마리아의 동정성과 피렌체 시를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있다.
그림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 빈치가 처음 그린 데서 달라졌다. 천사의 날개다. 자연을 관찰하던 다 빈치는 새의 날개와 비슷하게 그렸지만, 후에 다른 화가가 날개의 길이를 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초창기 작품인데다 수정의 과정을 거쳤음에도 다 빈치의 상징은 이 그림에도 담겨 있다. 스푸마토(Sfumato) 기법과 대기 원근법이다.
우피치미술관은 이탈리아 첫 방문에 아쉬움을 남겨줬다. ‘모나리자(Mona Lisa)’‘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과 함께 다 빈치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가 걸려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고, '복원 중'이라는 메시지만 만났다.
아쉬움을 준 이 그림, ‘동방박사의 경배’는 다 빈치의 첫 번째 걸작이라 불린다. 1481년 당시 29세였던 다 빈치는 좋지 않은 조건에서 2.5mX2.5m 크기의 나무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감 등 모든 비용을 다 빈치가 부담해야 하는 데 받을 수 있는 건 나뭇단 한 짐과 밀 약간, 포도주 한 통이 전부였다. 손해 보는 장사였다. 1년 뒤 작업은 중단됐다. 피렌체 경제를 이끌던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면서 다 빈치는 밀라노로 가게 됐고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세월과 함께 작품엔 켜켜이 먼지만 쌓여갔다. 다 빈치가 그리고 남겨둔지 50여년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덧칠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탈리아 미술품 감정가인 마우리치오 세라치니가 적외선 촬영을 통해 그림 뒤에 숨겨진 완전히 다른 그림들을 찾아냈다는 외신도 전해졌다.
외신에서 복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나온 뒤 작품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4년 뒤 또다시 우피치미술관을 찾았을 때도 여전히 ‘복원 중’이라는 안내문만 만날 수 있었다.
아쉬움을 준 그 작품을 뜻밖의 장소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피렌체의 국립복원연구소(OPD)였다. 출장 일정으로 찾은 OPD에서 연구원들은 세계적인 작품들을 복원하고 있었다. 잠시 연구원이 자리를 비운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색의 흐릿한 그림 앞에 다양한 장비가 배치돼 있었고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설마, 설마…’를 되뇌며 긴가민가 하는 심정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동방박사의 경배’가 있었다.
여전히 복원 중이기는 했지만 그림 속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예수 탄생 당시 베들레헴을 찾은 동방박사 3명은 물론 말 탄 자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승리와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 종려나무 아래 마리아와 아기 예수도 보였다. 박물관 인파 속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감흥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연구소에서 만난 이 작품은 1년 뒤 선명한 모습으로 우피치미술관에 걸렸다고 한다. 5년 5개월간의 복원 작업을 거친 뒤라는 뉴스도 나왔다. 공개와 함께 OPD는 엑스레이와 적외선 분석, 밑그림이 된 스케치를 활용해 '동방박사의 경배' 원작을 추측하며 복원했다는 내용을 알렸다. 복원의 과정을 통해 다 빈치 그림의 비밀도 밝혀졌다고 했다. 물감을 극도로 엷게 덧발라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는 게 OPD가 밝힌 비밀이었다..
2015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찾았을 때도 기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11월 여행 비수기라 관람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사진을 찍는 데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유독 웅성거림의 데시벨이 높은 곳이 있었다.
세로 77cm, 가로 53cm의 작은 액자 속 그림에 몰려드는 사람, 도난과 테러의 위협을 막기 위하려는 듯 그림 양 옆엔 경호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 그림이 걸린 벽에서 1.5m가량 떨어진 곳엔 관람객의 접근을 막는 펜스도 세워졌다.
다 빈치하면 두 말할 필요 없는 작품 ‘모나리자’ 앞이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비수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너무 유명해 그림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쯤 되니 다 빈치의 역작을 도장 깨기 하듯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11월 아랍에미리트 연합국(UAE)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찾은 이유도 다 빈치 때문이었다. 원래 일정은 UAE의 또 다른 도시 두바이에서 보내는 닷새였다. 그곳에서 1박 2일의 일정을 어렵게 뺐다.
소문만 무성한 ‘모나리자’ 남자 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구세주’, ‘세상의 구원자’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였다.
150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르네상스 시대 복장으로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고 왼손엔 투명한 구체를 들고 있다. 검은색 배경도 범상치 않다.
이후 그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프랑스왕이던 루이 12세가 다 빈치에게 주문한 작품이라던가, 100년 뒤 영국 왕에게 넘어갔다는 풍문, 이후 어느 귀족의 손에 들어갔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만 돌았다.
명확하지 않은 역사 때문인지 1958년 미국의 소더비 경매에 오르며 대중 앞에 나타났을 때는 모진 풍파가 고스란히 담긴 듯 훼손의 정도가 심했다.
‘다 빈치 제자의 작품’이라는 낙인도 찍혔다. 경매에서 낙찰된 금액은 고작 45파운드, 한화로 약 7만원이었다.
대중 앞에서 사라진 이 그림은 2005년 발견돼 복원에 들어갔다. 다 빈치의 작품이며 진품이라는 판단도 받았다. 이 작품은 2017년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인 4억5030만 달러(약 6426억원)에 팔렸다.
숱한 화제를 모은 경매 후 작품은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2019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아부다비에 있는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작품을 소장 중이라는 보도를 내놨지만, 본 사람은 없었다. 소유주도 ‘MBS’라는 비밀스러운 단어로 불렸다.
현재 ‘MBS’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이며 작품은 그의 요트에 있다는 미확인 보도만 나온 상태다.
확인도 안 하고 2019년 외신 보도만 보고 루브르 아부다비로 향한 덕에 보기 좋게 허탕쳤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첫 해외 분관답게 이 곳엔 놓치고 싶지 않은 의미있는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향후 10년간 특별 전시 혜택을 받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의 소장품 일부가 전시돼 있었다.
그곳에서 몬드리안, 칸딘스키, 모네, 드가부터 르네 마그리트, 바스키아까지 다양한 시대,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면 건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루브르 아부다비는 프랑스와 UAE가 협약을 통해 2007년부터 10년에 걸쳐 약 10억 달러를 투입해 완공된 곳이다.
사디야트 섬의 모래와 아라비아 만의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했다. 콘크리트, 물, 반사광이 조화를 이루며 아부다비 지역의 풍부한 건축 전통, 아라비아의 하늘을 담아내고자 했다.
금속을 엮어 기하학적 패턴을 이루는 천장 위 거대한 은색 돔은 박물관 위에 떠 있는 듯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약 7500톤으로 파리 에펠탑 무게와 맞먹는다. 4개의 지지대 위에 놓여 있어 떠 다니는 효과를 준다.
아랍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이 돔은 철제 금속을 엮어 7850개 별이 8개의 서로 다른 층에 다양한 크기와 각도로 반복돼 이뤄진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다. 가장 큰 별은 직경 13m, 무게 1.3톤이다.
태양이 머리 위로 지나갈 때면 돔의 별을 통해 빛이 여과돼 들어온다. 나뭇잎이 밝은 햇빛을 받으면 바닥에 빛의 반점처럼 흩날리는데서 영감을 받았다.
“빛과 그림자, 사색과 평온이 순수하게 결합되어 따뜻함이 특징인 세계입니다. 아부다비는 한 국가에 속하고, 그 역사와 지리를 활용하고, 뛰어난 발견을 밝히기를 갈망하는 도시입니다.”
건축가 장 누벨의 말이다.
이 돔은 환경적 목적도 갖고 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캐노피 역할을 하고 관람객이 빛을 즐기며 박물관 건물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어 편안한 경험을 제공한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었다면 밀라노에서 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는 눈치챘을 듯싶다. 다 빈치의 역작으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이다.
이미 티켓은 여행 전 예약, 구매한 상태였다. 당일 티켓 창구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티켓만 받으면 됐다. 흥분을 안고 예정된 날짜에 일찌감치 출발했다. 콘실리아지오네(Conciliazione)역에서 내려 10여분 걸어가니 한적하던 골목 끝 사람들이 보였다.
우피치미술관에서, 루브르박물관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밖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광장 끝 붉은 벽돌의 건축물이 보였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Santa Maria delle Grazie)’다. 곡선미를 강조한 로마네스크 양식과 직선을 선호하는 고딕양식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교회였다.
진짜 목적지는 따로 있으니 교회는 과감히 패스다. 예정된 시간에 맞춰 티켓을 받았다. 밀라노 숙제를 하러 갈 시간이다.
예습도 10여년 전에 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다.
다 빈치는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암굴의 성모(Virgin of the Rocks)’를 제작한다. 지금은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은 뿌연 공기를 표현해 동굴 안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성모의 얼굴이 빛을 발해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도록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하는 스푸마토를 구현했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 12년 뒤에 그려진 게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를 드러낸 ‘최후의 만찬’이다.
다 빈치의 작품 중 가장 손상이 심한 그림이 된 건 그의 남다른 고집 덕이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에 불만을 가진 다 빈치는 템페라에 기름을 섞은 물감으로 작업을 시도했다고 한다.
회반죽에 템페라, 유채 물감을 모두 섞어 사용하면서 다 빈치 그림의 특유한 상징인 부드러움과 광채가 놀라울 정도로 표현됐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물감이 제대로 벽에 칠해지지 않았다. 습기로 인해 떨어져 내렸다.
손상의 정도는 심각했지만 원래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수세기에 걸쳐 계속됐다. 덕분에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밀라노 숙제인 이 작품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에 있다고는 하지만, 입구는 교회 입구와 달랐다. 교회 입구의 좌측 건물을 통해 줄지어 들어가야 했다.
나 홀로 방문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주로 단체 여행이거나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찾았다.
경험담을 털어놓자면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갈 때는 홀로 가는 것보다는 숙련된 가이드가 있는 단체로 들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연간 300만명이 교회를 찾는데, 이 중 '최후의 만찬'을 보는 관람객은 40만명이다. 그림의 보존을 위해 관람객 수는 하루 1000명 선으로 제한한다.
하루 8시간 문을 연다는 점을 감안해 계산하면 시간당 100명 정도가 최후의 만찬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과 인원을 철저히 제한했다. 보통 20여명씩 줄을 지어 들어가도록 했다. 한꺼번에 100여명에 이르는 특별 관람단이 들어가기도 했다. 관람시간은 최대 15분이었다.
작품을 보는 데 주어진 시간도, 공간도 제한적인 만큼 홀로 관람하기 보다는 숙련된 가이드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게 효율적일 듯싶었다. 그래서 함께 입장한 단체 관람객을 따라 눈치껏 움직였다.
'최후의 만찬'이 있는 곳, 그 문 앞에 섰다. 앞서 들어간 팀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짧고도 길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고 들어섰다. 묘한 감정이 든다. '최후의 만찬'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허망한 감정이 든다. 길쭉은 사각형의 방은 작고 어두운 데다 그닥 하얗지 않아 때 묻은 듯 보이는 회벽 칠한 방 안엔 그 어느 것도 없다. 긴 사각의 방 양 끝 벽에 마주 보듯 그려진 그림 뿐.
한쪽 끝, 바로 그 '최후의 만찬'이다. 높은 기대감에 비례하듯 실망의 강도도 셌다. 그림은 안갯속에 휩싸인 듯 명확하지 않았다. 훼손의 정도까지 심하니 안갯속이라는 표현보다 그저 흐릿하게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기어코 숙제를 하겠다며 밀라노에 온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처음 이 그림은 1495년 루도비코 스포르차 백작의 의뢰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거장 다 빈치의 작업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작업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다 빈치의 성격 때문이었다. 다 빈치는 진득허니 하나에 몰두하지 못하는 데다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보이는 성격이었다.
그림을 그린지 4년이 지나도 완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1497년에 작성된 문서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그의 더딘 작업 속도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수도원 부원장이 다 빈치에게 “완성이 왜 이렇게 늦어지냐”며 다그쳤고 이에 화가 난 다 빈치는 수도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유다의 악당 같은 얼굴을 완벽히 담아내기 위해 모델을 찾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얼굴을 찾지 못한다면 부원장의 얼굴을 써야겠다."
그러던 차에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공하면서 작업은 전면 중단됐다. 다 빈치는 피란길을 떠나야 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서 밀라노로 돌아왔지만, 작업을 재개할 수 없었다. 이미 작품은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고 작업을 의뢰한 스포르차 백작까지 전쟁 중 사망했다. 작품에 대한 약속된 비용을 받을 수 없었다. 작업을 이어갈 이유가 사라졌다.
이후 '최후의 만찬'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손상된 상태로 유지됐다. 비극적 사건은 또 일어났다. 1625년 벽화가 있던 식당에 주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림의 일부가 파손됐다. 예수의 발 부분은 사라졌고 그 자리엔 문틀이 들어섰다.
수난의 시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69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벽화가 있던 공간은 마구간이 됐다.
소홀히 관리되던 그림은 프랑스 군인들의 장난으로 더 파손됐다. 1800년엔 밀라노 대홍수로 침수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빗겨 나갔다는 점이다. 떨어진 폭탄에 도시 주변은 모두 폐허로 변했지만,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만큼은 살아남았다.
이후 여러 복원가들의 손을 거쳐 그림은 수정됐다. 복원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복원가들은 각자의 해석을 덧입혔고 원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결국 1970년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이래 최대 복원 작업이 진행됐다. 그동안 무턱대고 쌓아 올린 물감은 한 층 한 층 벗겨졌다. 무려 20여년간 1㎜ 단위의 작업을 이어가는 예민한 복구였다.
그렇게 복구된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든 생각이 예상과 기대를 넘어섰으니 당혹스러울 법 했다. 차라리 사진을 보는 게 나을 뻔했다… 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망감은 컸지만 어찌됐건 감상은 시작됐다. '최후의 만찬'은 당시 성당이나 수도원 식당 벽화에 가장 많이 적용된 소재였다. 가로 880cm × 세로 460cm에 열 두 제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예수가 “이 안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림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면 이런 설명이 있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좁은 공간 속에 식탁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균형감 있게 배치됐다. 예수와 제자들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서로의 관계와 각자의 성격을 안정감 있게 보여준다.”
앞서 사진을 보는 게 나았다는 얘기가 나온 건, 이런 정보가 크게 와닿지 않아서다. 균형감을 느끼기도 전에, 흐릿해진 그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외려 그림을 침범한 문틀에 시선이 갈 정도였다.
주어진 시간도 여러모로 아쉬웠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1시간 넘게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를 보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람에 치이기는 했지만 30분 넘게 모나리자를 볼 수 있었던 점과는 사뭇 달랐다.
그림을 보호하고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선 일견 이해가 갔지만, 아쉬움이 큰 건 어쩔 수 없었다.
참고로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가기 전 다 빈치의 그림을 베낀 모사화를 보는 것도 좋다.
다 빈치의 제자인 지암피에트리노 (Giampietrino)와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Giovanni Antonio Boltraffio)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모사화는 원본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여겨졌고 이후 복원할 때 활용됐다.
특히 해당 그림엔 원본에 없는 부분들이 많다.
유다의 오른팔 옆엔 뒤집어진 소금 그릇과 흘러내린 소금이 있다. 흘린 소금은 16세기 서유럽에서 흔히 나쁜 징조로 여겨졌다. 벽에 문을 세울 때 원본에서 사라진 예수의 발도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한 때 사진 촬영을 금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개벽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불만은 그만두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제대로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미안한 마음으로 보게 되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최후의 만찬'에 집중하느라 시선조차 두지 않은 맞은편 벽, 그곳에 그려진 조반니 도나토 다 몬토르파노(Donato Montorfano)의 프레스코화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다.
다 빈치가 템페라로 스포르차 가문의 일원을 그려 넣기도 했다는 이 그림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덕인지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밖으로 나갈 때의 비로소 눈에 담았다는 점에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남긴 채 방을 떠나야 했다.
묵은 숙제를 끝내고 나니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발품’ 파는 여행객 본연의 모습을 바로 장착했다. 밀라노 도심을 걸으며 밀라노 대성당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걸음의 길목에서 여행의 진짜 컨셉을 찾아주는 장소도 발견했다. 계획에 없던 곳이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5차로 길 코너에 자리한 바 마젠타였다.
좁은 인도에 복잡하게 세팅된 야외 테이블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에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들어간 곳이니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냉장고 안에서 막 꺼낸 듯 차가운 기운이 가득한 티라미수가 예쁘장한 그릇 대신 메밀국수와 어울릴법한 플라스틱 대접에 담겨 있을 때도 용인됐다. 그리고 기대를 넘어서는 맛이 입 안을 즐겁게 했다. 커피보다 티라미수가.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비로소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수트를 갖춰 입은 직원 대신 힙한 복장의 젊은 직원, 네덜란드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 간판이 함께 걸린 ‘바’라는 타이틀 덕에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100년에 걸친 서사가 있었다.
역사적 가치를 알려준 건 커피, 디저트와 함께 테이블로 온 설탕 봉지와 냅킨이다. '1907'.
바 마젠타는 1907년 4월 비아 카르두치(Via Carducci) 모퉁이에 아르누보 스타일로 설계한 건물의 1층에 문을 열었다.
당시 밀라노는 경제 위기로 혼란의 시간을 보낼 때였다. 노동자들은 파업 중이었고 시위대는 무력 진압에 나선 정부와 충돌했다. 그 시절 바 마젠타는 사람들에게 쉼을 얻고 위로를 받는 공간이었다.
이후 세월이 더해지면서 매력도 배가됐다. 이탈리아의 작은 기업들을 소개하는 일 벨로 마야(Il Velo Maya) 매거진은 2022년 기사에서 바 마젠타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밀라노의 주요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동맥 사이 교차로에 자리하면서 밀라노에서 중요한 두 장소,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과 밀라노 대성당을 연결한다. 사크로 쿠오레 카톨릭 대학교(Università Cattolica Del Sacro Cuore)와도 이웃해 있다.
20세기 초 고전적인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물 안에서 독서, 대화, 시식의 매력에 빠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데다 ‘맥주와 카푸치노’ 사이, ‘특별한 디저트와 샐러드’ 사이를 오갈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식전주인 스프릿츠도 즐길 수 있다. 이런 매력들 덕에 바 마젠타를 찾는 사람은 연간 50만명 정도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도 매력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에스프레소는 1.5유로다. 대접에 가득 담겨 넉넉한 양을 자랑하는 티라미수도 5유로였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07년엔 밀라노시로부터 황금 암브로지노(Ambrogino d’oro) 메달을 받기도 했다. 이 상은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암브로지노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2005년부터 바 마젠타를 인수해 운영 중인 파올로 마르케시가 일 벨로 마야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감당 가능한 가격에 기분 좋은 맛을 경험케 하는 바 마젠타의 힘을 엿볼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근 몇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외부 부분을 개조할 계획이며 여전히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