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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크 May 29. 2024

[걷다 보니 ‘발품 컨셉’]커피부록(21)

#이탈리아 ‘일부’ 카페… 베르디, 스칼라를 만나다 Cafe verdi

 2012년 세계적인 여행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을 경험할 줄은 몰랐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남을 뜻하는 통계적 법칙 말이다. 


 징후는 바르셀로나 여행 이틀째 나타났다. 지하철에서 한 여성 승객이 매고 있던 가방을 가리키며 “가방 지퍼를 채우라”고 당부했다. 여행자 안내 데스크의 남성 직원도 ‘가방 조심’을 얘기했다. 도둑질, 소매치기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터라 그런 경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경고와 징후를 무시하니 결국 사고는 발생했다. 바르셀로나의 한 별다방에서 도둑질을 당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와 태블릿PC를 한꺼번에. 덕분에 나름 여행의 법칙 하나가 추가됐다. 


  ‘모든 여행자의 경험은 주관적’이라는 법칙.


 법칙을 만들게 된 건 유럽 여행을 떠날 때면 한 번쯤 정보를 찾으려고 방문하는 대형 포털의 카페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본 내용은 이랬다.

“바르셀로나에선 여행자를 타깃으로 소매치기, 도둑질당하기 십상이다. 지도나 여행서를 들고 있다면 바로 그들에겐 표적이 되니 지도와 여행서를 보고 싶다면,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서 보는 게 좋다.”


  그 글만 믿고 별다방에 갔다가 당한 도둑질이었다. 이후 주관적 여행기가 주는 여행지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래서 발생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객관화된 정보만 참고하기로 했다. 바르셀로나만큼 소매치기가 성행한다는 파리에선 카페의 글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친절하기 그지없다는 로마에선 현지 사람들의 친절을 경험했다. 객관적 시각으로 접근하다 보니 기분 좋은 ‘주관적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201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여행 첫날 밥 친구가 돼 준 태블릿PC는 다음날 스마트폰과 함께 도둑님 소유가 됐다. 바르셀로나 경찰서가 작성한 보험사 제출용 도난 리포트(왼쪽).

 그리고 밀라노에서 새로운 ‘주관적 경험’이 쌓였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부디 밀라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간단히 털어놓는 경험. “밀라노 사람들은 불친절을 넘어 무례하다.”



”문 닫힌 라 스칼라, 최악의 경험”


 밀라노는 나름 여행의 법칙이 새롭게 추가된 곳이었다. 나흘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파리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마주한 짧은 인연과의 대화를 통해서다. 

무거운 보라색 배낭을 대신 들어준 홍콩 출신 20대 모델. 그는 '주관적 경험'이 객관화될 수 있다는 걸 경험시켜 줬다.

 만남은 밀라노 말펜사 국제공항에서 이뤄졌다. 수화물 무게에 업격한 저가항공사는 크게 무겁지 않은 짐인데도 “무게를 초과했다”며 거액을 요구했다. 


 짐을 풀어 이것저것 쓰레기통에 물건을 버리는 와중에 바로 옆 카운터에서 젊은 동양인 남성이 짐의 무게를 줄이는데 애를 먹는 게 보였다.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무사히(?) 짐을 부치고 비행기 탑승장에서 마주친 이 동양인 청년은 무거운 배낭을 대신 들어줬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다. 20대인 청년은 홍콩 출신, 파리에서 활동하는 모델이라고 소개했다.

 밀라노에는 패션쇼 때문에 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수수한 옷차림에 놓칠 뻔한 그의 피지컬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델 청년의 친절은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도 계속됐다. 숙소의 주소를 묻더니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짐을 들어주겠다며 동행을 자처했다.


 공항철도에 올라 한 시간여 짧고도 긴 대화를 이어갔다. 국적도, 연령도, 성별도 다른 데다 처음 만난 상대임에도 대화를 이어가는 데 한 시간의 시간이 짧다고 느낀 건 ‘밀라노’라는 공통된 주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밀라노 사람들의 무례함’이 주제였다.


  한 달간 체류하며 일한 사람이건, 나흘간 머물며 여행한 사람이건 ‘밀라노는 사람들 때문에 별로’라는 데 뜻을 같이 했다.

 동일한 ‘주관적 경험’들이 모이면 객관화된 정보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만 스스로 다짐한 게 있었다. 밀라노에서 경험한 ‘무례’한 사람을 밀라노 사람들 전체로 확장시키지 말자는 다짐.


 그런 다짐에도 맛없는 에스프레소를 마셨을 때 혀 끝에 쓴 맛이 남는 것처럼, 밀라노가 남긴 ‘무례함’이라는 씁쓰름한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싶다.

 여기서 궁금한 부분. 

 씁쓰름한 기억을 남긴 곳이다. 바로 전 세계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 극장이다.


 사실 이 극장은 밀라노를 찾을 때만 해도 여행 리스트에 있지 않았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 난 뒤 커피라는 여행 본연의 컨셉으로 돌아갔으니.


 그럼에도 일정에 넣은 건 '극장 근처 한 카페로 가는 길에 있어서'였다.


 라 스칼라 극장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1776년 황폐화된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가 있던 곳에 짓기 시작해 1778년 8월 개관했다. 


 목재로 지어져 숱한 화재를 경험한 뒤 밀라노 건축가인 주세페 피에르마리니(Giuseppe Piermarini)가 설계한 벽돌 형태로 1858년 재개관했다.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로 ‘벨칸토의 전당(Sala del Bel Canto)’이라는 별명과 함께 전 세계 성악가들의 꿈의 무대가 됐다.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사라진 라 스칼라 극장의 샹들리에를 복원한 모습. 출처 : 라 스칼라 극장 홈페이지

 극장은 밀라노의 역사도 담고 있다. 밀라노에 처음 전기가 전해졌을 때 조명이 켜진 최초의 공공건물이 바로 라 스칼라 극장이었다. 1883년 에디슨이 기획한 극장 중앙 샹들리에는 383개의 전구를 장착한 작품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엔 폭격을 피하지 못해 폐허가 되기도 했다. 1943년 8월 15, 16일 단 이틀간 연합군인 영국 공군의 폭격을 받으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에디슨이 기획한 샹들리에도 사라졌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밀라노 사람들을 치유한 것도 라 스칼라 극장이었다. 오케스트라는 극장의 잔해 위에서 연주했고 청중은 잔해 더미 속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재건은 1946년부터 빠르게 진행됐다. 샹들리에를 포함한 모든 걸 과거 모습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다. 붉은 카펫과 샹들리에로 화려함을 더한 내부는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있다. 건물 내 박물관에는 베르디, 푸치니 등의 유품과 악보, 오페라 의상이 전시돼 있다. 

붉은 카펫과 샹들리에로 화려함을 더한 라 스칼라 극장의 내부. 출처 : 라 스칼라 극장 홈페이지

 극장은 숱한 역사와 함께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로시니, 베르디, 푸치니 등이 거쳐갔고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의 오페라 가수가 무대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대표 성악가 조수미도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렇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코베트 가든, 빈 국립 오페라 극장, 파리 오페라 극장과 함께 세계 5대 오페라 극장으로 손꼽히는 곳이 됐다. 


 이토록 유명한 극장을 그저 카페를 찾아가던 길에 가려고 했다. 밀라노 대성당을 포함해 극장과 박물관까지 들어갈 수 있는 통합 입장권이 있기에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불청객 취급을 당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극장 직원은 "내부 행사가 있어 휴관이니 돌아가라"며 막아섰다. 예고 없는 휴관이었지만 양해를 구하는 건 없었다. 


 “여행객 많이 오는 나라에서 너 하나쯤 무슨 상관”이라는 직원의 생각이 태도와 말투에 담겨 있는 듯했다.

 

 극장 직원의 무례한 태도에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원래 목적지였던 그 카페로.


“책 속의 카페, 현실에서 마주하다”


 사실 이 카페를 방문하기 전까지 고민이 컸다. 


 밀라노 여행 중 커피 리스트에 올라온 곳 중 유일하게 정보가 전무한 상황 이어서다. 그저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책 속에서 본 게 전부였고 라 스칼라 극장 근처에 있다는 게 유일한 정보였다. 밀라노 사람에게 무례한 경험을 당한 뒤 카페로 향할 때는 "이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곳일까"라는 의문이 더 커졌다.

지인에게 선물 받은 책(오른쪽) 속에서 발견한 카페 베르디는 라 스칼라 극장 뒷골목에 있다. 출처 : 네이버

  다른 카페와는 달리 보이던 책 속 사진을 믿기로 했다.  

 사진 속 카페에 대한 첫인상은 나쁜 말로는 고물상이나 창고 또는 헌책방처럼 낡은 느낌을 줬고, 좋은 말로는 빈티지하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이었다. 커피 맛보다 그곳의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었다. 

 위치는 좋았다.

 라 스칼라 극장의 바로 뒤 편이었다. 번화가를 벗어나 한적하지만 도로와 면해 있어 놓칠 리 없는 카페였다. 그런데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분명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앉아 있는데 도무지 카페로 보이지 않았다. 안에는 골동품점 내지 잡화점처럼 물건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본 뒤 목적지라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쪽을 바라보는 바가 정면으로 보였음에도 시선은 다른 곳에 꽂혔다. 


 악보와 LP판, 배우들의 흑백 사진과 그림, 작곡가들의 석고 흉상, 신문 등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진열된 것들을 둘러본 뒤에야 시선이 커피바로 향했다. 희끗한 머리칼, 넉넉한 풍채에 미소를 머금은 남성이 손님을 맞이했다. 주문은 고민 없이 이뤄졌다. ‘에스프레소’. 가격은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 정찰제’인 1.5유로였다.


 커피를 뽑는 바리스타에게 말을 건넸다. 

 커피바 위에 올려진 베르디의 석고 두상을 가리키며 카페와의 인연을 물었다. 혹시나 베르디가 이 카페의 단골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착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역사적 카페를 다니면서 역사책에서나 보던 인물들이 그 카페 단골이었다는 얘기를 숱하게 들은 탓에 '베르디'라는 이름을 내건 카페도 당연히 그럴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바리스타는 “영어를 잘 못 한다”는 말과 함께 솔직하게 답했다. “라 스칼라 극장과 가깝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단순한 이유.


 첨언하자면 베르디의 진짜 단골 카페는 이탈리아 제노바에 있다. 베네치아, 피사와 함께 지중해 교역 중심지로 부를 축적한 곳이다. 1828년 그곳에 문을 연 카페 클라인구티(Klainguti)가 작곡가 베르디의 단골 카페였다고 한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목재로 만든 바 카운터와 장식장, 대리석 바닥 등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카페 벽면에 베르디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매력적인 카페라고 한다. 


 각설하고 카페 베르디의 커피바 앞에 선 채 바리스타 이야기를 들으며 에스프레소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진득하고 묵직한 에스프레소 원액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카페를 소개한 책을 가방에서 꺼내 바리스타에게 보여줬다.


 책을 보고 흥분한 바리스타가 바에서 나오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제야 카페의 구조가 보였다. 입구에서 커피바로 향하는 길에 좌측으로 뻗어가는 실내 공간이 있는 'ㄴ'자형 구조였.


 커피바와 홀 공간으로 갈라지는 꼭짓점엔 카운터가 있었고 그곳에 노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에 진한 눈화장으로 카리스마마저 느껴지는 강렬한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어떻게 그녀를 보지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리스타는 이 여성에게 가져온 책을 보여줬다. 

 홀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머리 희끗한 남성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책 속 바리스타라 소개된 그 남성이었다.


 세 사람이 신기한 듯 책을 보고 그 책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며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잠시 후 이탈리아어를 할 줄 모르는 여행객에게 이탈리아어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번역기를 돌려 대화를 시작했다. 번역기의 어설픈 번역으로 ‘한국에서 왔다’’커피를 마시러 밀라노에 왔다’’책에서 보고 찾아왔다’ 등 간단한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자 세 사람은 자기들을 소개했다. 여성은 50년 넘게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이고, 책 속에서 미리 만난 남성은 여주인의 아들이자 공동으로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바리스타는 요리사를 겸하고 있었다. 

 주인의 아들은 “라 스칼라 극장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우리 카페를 찾았다. 저기 사진 속 발레리노도 우리 카페 단골”이라며 홀에 걸린 그림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한 발레리노 그림. 카페 베르디의 단골인 발레리노의 이름은 어설픈 번역기 덕에 듣지 못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 후 찾은 카페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이어 2층에도 앉을 공간이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여주인은 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이 가져온 귀한 소식이 꽤나 반가웠나 보다. 카운터 위에 올려진 판매용 간식거리를 신중하게 고르더니 친절한 미소와 함께 건넸다. 


 미소 때문이었을까. 


 자연스럽게 바리스타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두 번째 에스프레소를 받아 들었다. 역사를 품은 듯 한 카페의 환대를 만끽하며 입 안에 털어 넣은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조금 전 라 스칼라 극장에서 경험한 씁쓸한 무례함마저 잊게 만들었다. 



EP.  주관적 경험이 준 카페 베르디에 대한 

 

카페 베르디에 대한 '주관적 경험'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라 스칼라 극장 직원들의 무례함을 잊게 할 정도로 주인과 바리스타는 친절하게 손님을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주관적 경험엔 반드시 오류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홈페이지조차 없어 카페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여행 관련 애플리케이션에서 카페 베르디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평가들은 '불친절', '비싼 가격'으로 정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페 방문은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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