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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Jul 21. 2024

초단편소설과 초단거리공격법: 뼈를 뚫고 나오는 살

오늘의 소설: 레이 브래드버리, 「용」

우리가 쫓는 것은 잠이 아니라 죽음이라네.
―레이 브래드버리, 「용」


‘없는 길’이 곧 왕도임을 모르고 길을 찾아 헤맸던 십수 년 전, 내가 수없이 돌려봤던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 2>의 한 부분으로, 땅속에 생매장된 주인공이 관(棺)을 뚫고 솟구치는 장면이다.


<킬빌>의 주인공 키도(우마 서먼)는 최고의 검을 보유한 극강의 검사(劍士)지만, 최후의 적인 빌을 상대할 땐 칼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빌의 칼을 칼집으로 받아내고 아무런 무기 없이 다섯 손가락만으로 빌을 제압한다. ‘오지심장파열술’이라 하는 이 권법은 키도의 스승이 그에게만 전수한 궁극의 무공이다.


키도는 오지심장파열술을 체득하기 전, 한 뼘 거리의 송판을 손으로 는 훈련을 한다. 중국 무술에서 ‘촌경(寸勁)이라 부르는 근거리 공격법인데,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짧아 주먹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키도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선 못한다”고 하자, 스승 파이메이는 “적이 코앞에 있으면 어쩔 테냐?” 질책하며 “송판이 주먹을 두려워하게 만들라”는 묘한 말을 한다.

키도에게 촌경을 가르치는 파이메이

손이 깨지도록 연습한 끝에 키도는 저 ‘초단거리공격법’을 터득하는데, 이후 실제로 적을 코앞에서 만나게 된다. 관에 갇혀 땅에 묻힌 그의 상대는 바로 이마 위의 관뚜껑(그리고 그 위의 흙더미)이다. 그 적의 이름은 ‘죽음’이다. 지금껏 아무도 이 적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키도는 그것을 해낸다. 초단거리공격법을 이용해 무덤을 뚫고 나온다. 5화 「거미줄」의 인물이 이루지 못했던 생지옥 탈출이다.


그런데 그 탈출 과정은 마치 관뚜껑과 흙더미가 그를 ‘두려워하여’ 알아서 길을 내주는 듯하다. 힘을 써서 적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비켜나도록’ 하는 것. 이는 타자의 에너지를 ‘빼앗는’ 방법으로는 안 되고, 나 자신이 그 상대가 ‘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때, 나의 의식은 의 의식을 품은 상태가 된다(빌의 칼을 키도의 칼집이 품듯). 이러한 의식 세계에서는 상대가 무슨 짓을 하든 전부 내 손바닥 안에서 일어난 일이 된다. 유다의 배신이 예수를 완성시킨 것처럼, 나를 방해하는(듯한) 힘이 나를 더 크게 일으키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에너지는 결국 높은 에너지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낮은 힘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다. 죽음에 맞서면 죽음의 제물이 된다. 자신의 에너지를 그 수준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괴물의 실체를 아는 자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그것과 싸우지도 않는다. 대신 괴물을 타고 간다. 그 괴물은 ‘용’이다. 용은 또한 영물이다. 에너지의 집약체다. 어느 차원에서 그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몬스터지만, 다른 차원에선 생명체가 타고 달리는 기차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용」은 그 두 차원을 가볍고도 스산하게 엮며, 시공을 뚫고 나온 거대한 에너지를 짧은 분량에 박진하게 그고 있다. 이 또한 왕도를 보여주는 판타지 초단편이다.


청룡의 해 허리께에 이른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용’에 올라타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이 작성됐고, 이제 그 ‘전자기 흐르는 뼈’에 이야기라는 살을 붙여야 한다. 그런데 그 살은 찰흙 놀이에서처럼 철사 뼈대에 흙 반죽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깥에서 반죽처럼 덧붙여진 이야기엔 생명력이 없다. 찰흙 인형처럼 죽은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기(氣) 흐르는 뼈대인 플롯 내부에서 스스로 생겨난다(自生). 죽음을 뚫고 솟아난 생명처럼, 시공을 뚫고 달리는 용처럼, 소설의 살은 뼈를 뚫고 나온다. 뼈 밑 초단거리에서 구조를 공격하며 플롯을 재구성다. 와룡이 승천하듯 자생하는 이야기는 미래에서 현재로 날아들며 의식을 깨우고 현실을 재조직한다. 그 살아 있는 살(肉)에는 살기(殺氣)가 흐른다. 그 ‘산(生) 죽음’이 다시 용이 된다. 괴물이자 영물. 적이자 탈것. 이자 나.


괴물을 타고 내달리기. 지옥에서 지상까지, 지상에서 극락까지―

지옥과 극락을 잇는 거미줄은 이제 철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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