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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Jul 15. 2024

초단편소설의 플롯: 극락과 지옥을 잇는 거미줄

오늘의 소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거미줄」

이 줄에 매달려 올라가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잘하면 극락에도 들어갈 수 있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거미줄」


청탁받은 소설 원고 작업 중 이런저런 생각의 갈래가 뻗는다. 이사를 앞두고 돈 쓸데가 많은데 훨씬 큰돈이 되는 다른 일을 제쳐두고 저 작업을 하자니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왜 이걸 쓰고 있는가? 청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청탁이 없다면 쓰지 않을 건가? 안 쓴다. 이렇게 답하고 보니 나의 행동이 참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작품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 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행태인가. 청탁을 받아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작품을 문예지에 발표함으로써 1)원고료를 받는다. 2)독자와 만난다. 크게 이 두 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고료의 액수가 수입보다 순수하게 발표에 의의를 둬야 하는 수준이며, 문예지를 사 읽는 독자 또한 고료만큼이나 적다는 점이다. 문예지 자체가 줄어든 시대적 사정도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원고 청탁 제도는 더 이상 창작의 동기가 될 수 없다. 이제는 외부의 요청과 관계 없이, 웹상의 플랫폼(바로 이런 브런치)에 작품을 그냥 써서 발행하면 된다. 자기 자신에게 원고 청탁한 뒤 스스로 발표하는 것이다. 글쓰기 플랫폼은 넘쳐난다. 잘만 하면 돈도 벌 수 있다. 웹(인터넷)은 문학의 낡은 관습과 권위를 간단하게 허물어버렸다(웹소설이 좋은 예다). 거미줄(web)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그 그물망은 극락에서 지옥까지 온 세계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극락에서 내려온 한 줄기 빛을 지옥의 인간이 불잡는다. 우리의 ‘길’은 어느새 수평을 넘어 수직으로 뻗어 있다. 끝없이 갈라지는 소설의 길은 저 높은 혹은 깊은 이세계(異世界)를 향해 촉수를 내민다. 그렇게 정원뿐 아니라 허공에도 길이 열린다. 소설 속에서 “천상으로부터 한 줄기 은빛 거미줄이” 내려와 극락과 지옥을 연결한다. 이 또한 한달음에 극과 극을 왕래하는 초단편의 왕도를 보여준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 속 인물은 죄수다. 그는 지옥 탈출 및 극락 입성을 위해 빛나는 거미줄을 움켜쥔다.


그리고 오른다. 땅속에서 나와 하늘 향하는 생명체, 그 이미지가 거미나 인간보다 ‘용’으로 그려지는 건 왜일까. 용의 해, 용의 달, 용의 날에 태어나 ‘류노스케(龍之介)’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작가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연중 해가 가장 빨리 뜨는 날, 해의 요일(日), 해 뜨는 시각에 태어나 태양의 이름을 얻었다(직접 지은 이름으로 개명했다). 올해는 청룡의 해이고 다음 달엔 일출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한다. 용과 해(태양)는 모두 왕을 상징한다. 다시 왕도(王道)다.


초단편소설의 왕도를 걷는 데는 구조라는 지도가 필요하지만 그 지도는 초단순 형태면 족하다 했다. 그렇다면 플롯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플롯의 유형들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플롯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일단 문예이론에서 플롯은 주로 스토리와 비교된다. 스토리가 ‘시간 순서에 따른 사건의 배열’이라면 플롯은 ‘인과 관계에 의해 재구성된 사건의 배열’이다. 이처럼 플롯과 스토리는 ‘사건들이 무엇에 따라 배치됐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플롯과 구조의 차이 혹은 관계는 이보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플롯은 한마디로 구조의 구조화됨, 그 짜임, 더 정확히는 ‘짜여지고 있는’ 구조를 말한다. 뭔 소리인가? 예시를 통해 살펴보. 불교 <사문유관>의 동서남북 구조를 가지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낸 본인의 작품 「불멸」을 보자. 이 소설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동문: 늙지 않음

⚬ 남문: 병들지 않음

⚬ 서문: 죽지 않음

⚬ 북문: 불멸(리셋)


이처럼 「불멸」은 네 개의 문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문들이 ‘어떻게’ 한 작품 속에 엮여 있는가 하는 것이 플롯이다. 그것은 네 개의 문을 구슬처럼 하나로 꿰어낸 줄 또는 힘이다. 동문-남문-서문-북문 사이에 거미줄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줄은 엄청나게 강하고 질기다. 「거미줄」의 주인공은 그걸 타고 천상에 오르며, 스파이더맨은 거미줄 하나로 세상을 구할 정도다. 플롯의 본질은 바로 이 거미줄의 질김, 강함, 장력(張力)에 있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어떤 형태를 가진 작품의 형이하학적 얼개가 구조라면, 플롯은 그 구조의 (형이하학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측면, 즉 그것을 그러한 형태로 조직하는 에너지, 혹은 그 작품 전체에 작용하는 동력이다. 이 힘에는 창작(작가) 및 행위(인물)의 동기/의지/태도 등이 포함된다. 소설 「불멸」에 작용하는 그 힘은 ‘불멸’이라는 목표 달성이다. 주인공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불멸에 이르기 위해 동서남북을 동분서주한다. 이에는 ‘불멸에 이른다’는 동기/의지/태도가 담겨 있다.


따라서 구조가 비슷한 두 작품도 그 플롯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구조와 마찬가지로 플롯 또한 작품과 함께 ‘생성’된다. 거미는 거미줄 전체를 미리 그려놓고 집을 짓지 않는다. 거미집이 완성된 뒤에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된다. 플롯 또한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플롯은 소설이 완성되기 전에 그려진 설계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보르헤스 말대로 ‘이미 존재하는 미래’와 같기 때문이다. 작품이 나오기 전에 그린 설계도가 실은 작품보다 늦게 나온 것이라는 역설이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기에 구상되고 설계되며, 작업을 통해 물리적으로 현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플롯을 작성한다는 것은 나의 소설이 존재하는 미래를 선택하는 행위이자, 그 소설이 부재하는 현실과 그것이 구현된 현실 사이에 거미줄을 치는 일이다. 이렇게 창작하는 의식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 줄처럼 걸쳐 있다. 그렇기에 줄타기(창작) 활동을 통해 실제로 창조되는 것은 작가 자신이다. 창작이란 근본적으로 미래(고차)의 자기와 통합되는 과정인 것이다.


이를 「거미줄」 내용에 빗대면, 극락은 「소설」이 있는 세계이고 지옥은 「소설」이 없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의 「소설」은 내가 쓸 소설이다. 소설의 씨앗(착상)이 심어진 뒤 그것이 작품으로 완성되면 극락으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현 상태에 머물거나 추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옥이다. 지옥이란 “자기 존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플롯은 그 지옥과 극락 사이를 잇는 다리이며, 천상에서 전송된 파릇파릇한 청사진인 것이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청탁이나 원고료, 독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그 소설 세계에서 내려온 빛 때문이다. 그 빛줄기가 거미줄이다. 그리고 작가는 스파이더맨다. 글 쓰는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은 저 위에 있는 나의 몸에서 나와, 아래에 있는 나를 통해 작품으로 육화된다. 그렇게 하나 된 위아래의 나는 언어의 실을 자으며 집을 짓는다(作家).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이 거미집에 만유가 매달려 있다. 그 수천수만의 보석으로 내 몸이 장엄해진다. 이것이 우주이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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