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초단편소설 쓰기와 창작의 지혜> 강의를 진행하면서 3주 동안 같은 일이 세 번 일어났다. 길에서 일어난 길에 관한 일이라 이를 가지고 4화의 길을 연다.
강의 첫째 주, 용산에서 수업을 마치고 버스로 회현역 앞까지 가려 했는데 정류장을 지나쳐 시청역 근처에서 내리게 되었다. 계획했던 곳과 다른 데서 하차하는 바람에 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 말을 걸었다. 그분은 내 수업을 들은 수강생이었고, 그 선생님의 안내로 지하철역까지 가볍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주가 되었다. 이번엔 회현역 앞 정류장에 제대로 하차했는데 거기서 회현역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의 남대문 시장 때문인지 지도와는 사뭇 다른 풍경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또(!)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양산을 쓴 그분은 내 수업을 듣는 다른 수강생이었고,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곧 회현역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번이나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이로 인해 길을 찾았는데, 이는 모두 용산 강의 후의 일이다. 그런데 셋째 주엔 놀랍게도(소설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듯한데) 동대문구 강의가 (끝난 뒤가 아니라) 시작되기 전에 같은 일이 일어났다. 회기역 우체국에 들렀다가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을 찾는 중, 또(!!)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 인사를 했다. 그분 또한 수강생이었고, 내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라 행선이 같았다. 동네 주민인 그분은 익숙한 샛길을 안내했고, 그 덕에 회기동 주택가의 미로 같은 길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위 일화는 마치 현실 속에 잠복해 있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 강의 전후에 나타난 낯선 길과 안내자들, 실제 사건이지만 소설처럼 구조적인 세 번의 에피소드는 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 혹은 중첩을 발설하는 듯한데, 이러한 내용을 잘 다루는 작가가 바로 보르헤스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보자.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면서도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는 묘한 소설이다. 딥디크 롬브르단로의 장미풀 향이 나는 듯한 그 「정원」은 수많은 길을 가진 미로이자 꽤 짧은 작품으로, 소설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 길 많은 정원에 들어가기 전, 지난 시간에 살펴본 갈래길을 떠올려보자. 착상에 대해 다루면서 연상 작용의 자유로운 갈래길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동서남북 갈래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 짓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과제가 주어졌다. 다음 주까지 자기 소설의 ‘구조’를 생각해 오는 것.
구조란 무엇인가. “부분이나 요소가 어떤 전체를 짜서 이룸. 또는 그렇게 이루어진 얼개.” 사전상 정의는 이러하다. 이를 우리의 용어로 바꾸면, 법-문-길로 이어지는 그 왕도의 ‘지도’쯤 되겠다. 그렇다면 여기까지의 <초단편소설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초단편소설 쓰기란 왕도 걷기이며, 소설의 구조란 그 길의 지도이다.
그런데 그 길은 ‘없는 길’이라 했다. 없는 길의 지도라니? 그 지도는 길 혹은 미래가 ‘이미 존재해 있는 듯’ 상상한 결과이다. 글과 함께 길은 계속 생성되며 그 지도 또한 변한다. 따라서 지도를 상세히 그린 뒤 이를 따라가려 하면 미로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 구조화한 미궁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이야기가 전개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여기서도 ‘그냥’의 법칙을 적용하는 게 좋다. 그냥 쓰고, 지도는 대충 그린다. 구조는 동서남북, 기승전결이면 족하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모든 구조를 품고 있는 ‘동서남북.’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이 단순 구조 속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초단편소설이 우주 종횡의 왕도라 했으니 그 구조는 종횡으로 움직인 형태가 아니겠는가. 일단 이 단순한 우주 조형도를 내려다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점 같은 하나의 착상(아이디어)에서 네 갈래로 뻗어나온 길이 보인다. 십자가 모양이다. 그 십자가의 네 갈래는 또다시 몇 갈래로 갈라질 수 있다. 그 갈래들은 또 몇 갈래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이런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취팽이란 인물은 성교, 사교, 지식 등 모든 쾌락을 버리고 은거하여 책 혹은 미로를 만들었다. 그 미로 같은 책은 구조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무엇의 구조인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의 구조. 그런데 시간 자체가 구조이다(초단편 자체가 왕도이듯). 보르헤스의 평행적 시간은 동시에 미래‘들’을 향해 갈라지면서 거미줄 같은 구조를 낳는다. 이렇게 시간은 공간처럼 구조화된다.
공간적인 구조는 또한 시간과 같기에 쉼 없이 흐른다. 쓰여진다. 갈라진다. 점 같은 하나의 발상이 갈래갈래 뻗으며 사방팔방의 길로 구조화되듯, 원점에 서 있던 왕자(싯다르타)는 동서남북 네 군데 문을 돌며 낯선 것을 본다. 노, 병, 사, 그리고 노병사를 넘어서려는 자. 넷으로 갈라지기 전, 한 점에 웅크리고 있던 씨앗 같은 존재는 갈가리 찢어지고, 그는 찢긴 자신을 봉합하기 위해 집을 떠난다. 그렇게 출가의 백지에 자신의 역사를 쓴다. 왕자의 옷을 벗고 왕의 길(王道)을 간다.씨앗이 꽃을 피운다.
갈라진 것들은 통합을 이루고 통합은 다시 분열을 향하며 새로운 길을 낸다. 시공간의 좌표 위에 소설의 언어로 표현된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의 심층에는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길들이 있다. 그 숨은 길들이 독자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개현되는 것이다. 또한,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모든 길들은 인드라의 그물처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채 끝없이 갈라지고 있다. 갈라지는 동시에 통합되면서, 향기 그윽한 소설의 정원을 빚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