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와 문 두드리는 소리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에트가르 케레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초단편소설법> 연재 요일은 원래 일요일이었다. 월요일로 바뀐 이유는 지난 일요일, 연재글 첫 화를 올리기로 한 날, 집에 놀러 온 사람 때문이었다. 놀다가 하루가 지나 다음 날 아침에 1화를 쓰게 됐고 연재 요일도 월요일로 바뀌었다. 이번 주엔 토요일에 손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는데(정확히는 인터폰을 눌렀는데), 집주인인 나는 그를 집에 들일 수도 있고 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물론 사전에 얘기가 돼 있었다).
나는 그를 맞아들였고 그날의 ‘이야기’가 생겨났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이야기인데, 그 속에는 케레트의 저 소설이 포함돼 있다. 그가 문을 두드린 뒤에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가 이번 주 소설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내 집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문 두드리는 이야기를 다루게 된 건 아니다. 문 두드리는 이야기 때문에 그가 문을 두드렸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 문을 두드린 일(현실)과 문 두드리는 이야기(픽션)는 씨실과 날실처럼 하루의 피륙 속에 엮여 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현실에서, 그리고 소설에서.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서, 문 두드리는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의 집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그는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와 작가에게 이야기를 시킨다. 문을 두드리고 집에 들어온 사람에게 나는 소설 쓰는 이유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먼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현실 자체가 소설이다.” 모두가 각자의 관념으로 자기만의 현실이라는 소설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쓴다.” 나는 말했다. 현실 자체가 소설이니 소설로 현실을 짓는 일이야말로 현실이라는 소설 속에서 ‘진지하게’ 해볼 만한 일 아니겠는가. “소설 쓰고 있네.” 이 말은 비아냥이 아니라 직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현실은 소설처럼 구성되고 소설은 자체의 현실성을 품고 있어 현실과 소설은 각자의 리얼리티을 가지고 서로의 문을 두드린다. 일요일에 문을 두드린 사람으로 인해 연재 요일이 바뀌었고, 토요일에 문을 두드린 사람으로 인해 하루의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의 현실이라는 소설 속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설로 인해 지금 이 글이 나왔고 오늘의 강의가 만들어졌다.
다시 소설을 보자.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집주인은 왜 그냥 문을 여는가? 불청객은 왜 그냥 들이닥치는가? 법 없는 세계인가? 법은 있다. 인간이 있다면 법도 존재한다. ‘법 앞에서’ 모두가 저마다의 법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현실이라는 소설에서나.
없는 건 법이 아니라 문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 있고”(카프카, 「법 앞에서」), 열린 문은 문이 아니다. 길(道)이다. 이것이 법문(法門)이다. 법의 문. 언제나 열려 있는 문 아닌 문. 현실과 소설의 경계 없는 경계에, 그 없는 문이 있다.
갑자기 누군가, 없는 문을 두드린다. 갑자기 누군가, 없는 소리를 듣는다. 그 ‘들림’이 ‘문 엶’이다. 들린 순간 열린 것이다. 열린 귀다. 귀 있는 자는 듣는다. 그리고 쓴다. 그냥 그렇게, 들은(聞) 자로 인해 문(文)의 문(門)이 열리고, 법(法)의 물길(水+去)을 따라 이야기가 흐른다. 그냥 그렇게, 현실의 소설 속에 소설의 현실이 샘물처럼 흘러나온다. 그냥 그렇게, 원래부터 존재해 있었던 듯 태연하게, 총 들고 들이닥친 불청객처럼 당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