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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Jul 01. 2024

초단편소설의 왕도: 우주를 종횡하는 가장 빠른 길

오늘의 소설: 김태라, 「환생」「불멸」 

리셋을 통해 영원히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김태라,「불멸」


문학의 (1화)과 소설의 (2화)을 지나, 이제 초단편소설 창작의 (3화)에 들어섰다. 『초단편소설법』 세 편에 걸쳐 ‘문학-소설-초단편소설’로 범위가 좁혀지면서 그 방법론 또한 ‘법-문-길’로 구체화되었는데, 이상의 내용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화. 문학의 법[법 앞의 문]: 기다리기

2화. 소설의 문[문 없는 문]: 들어가기

3화. 창작의 길[길이 된 문]: 걸어가기


우리는 문학이라는 법 앞에 서 있고, 그 법 앞에는 문 없는 문인 소설이 있으며, 그 없는 문의 소리를 들은 자는 창작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첩경, 지름길, 왕도(王道)가 초단편소설 속에 있다. 즉, ‘초단편소설의 왕도’란 소설 쓰는 법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초단편소설 자체가 왕도의 형상이란 뜻도 된다.


손바닥 안에서 온 세상을 누비게 해주는 스마트폰처럼, 손바닥 소설(掌篇: 초단편의 다른 이름)을 통해서도 간단하게 시공을 초월하고 우주를 넘나들 수 있다. 내가 쓴 초단편소설만 봐도 원고지 10~20매 분량에 수백 수천 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늘 만나볼 「불멸」은 백 년, 「환생」은 오백 년, 수상작인 「사람의 아들」은 무려 이천 년을 단 5분 만에 관통할 수 있는 작품이다.


초소형의 크기 속에 무한을 담 예술, 초단시간에 우주를 종횡하는 왕도를 초단편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읽는 것도 좋지만 직접 쓴다면 그 길을 몸소 걷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기쁨은 근본적으로 창작을 통해 <환생>하여 소설이라는 <불멸>의 왕국에 입성하는 데서 온다. 작품 한 편을 쓸 때마다 낡은 자아가 죽고 새로운 존재가 깨어난다. 새로 태어나 영원히 사는 법, 즉 환생과 불멸의 왕도가 창작 활동 속에 있기에 나는 소설을 쓴다.


하반기의 시작인 7월, 본격 창작의 때이다. 7월과 소설 창작은 무슨 연관이 있는가? 문 두드리는 소리와 문 두드리는 이야기만큼의 연관이 있다. 6월 중순에 문을 연 초단편소설 수업이 워밍업 단계를 거쳐 본격 집필 주차에 이른 동시에, 강사인 나 또한 7월에 초단편소설 원고 마감이 있어 작품을 써야 한다. 수강생들과 함께 소설을 쓰는 뜨겁고 시원한 여름이다. 오늘은 그 출발의 날이니 소설의 착상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난주엔 서울 웹소설 강의가 종강을 했고, 오늘 저녁엔 수원 웹소설 강의가 종강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새 웹소설 연재를 시작했으며 초단편소설 강의는 본격 집필 궤도에 올랐다. 끝과 시작은 이렇게 맞물려 있다. “끝과 시작의 아마겟돈”이라는 에스파 노래가 귓가를 맴도는데, 한 생의 끝엔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이 오래된(그리고 영원한) 테마를 새롭게 구현한 소설이 바로 「환생」이다.


‘붓다 소설 3부작’ 중 하나인 「환생」은 계간지 <문학나무>에 연재 중인 성인(聖人) 소설 시리즈의 개시작이다. 올해 초, 붓다 소설을 쓰기 위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니 쓸 거리가 아주 많았다. 예수만큼이나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존재라서 아이디어가 끝없이 떠올랐다. 그래서 발상의 집약을 위해 3부작을 꿰뚫는 대주제를 정할 필요가 있었고 ‘통합’이 그 주제가 되었다. ‘붓다(Buddha)’란 깬 자를 뜻하며 깨어난 의식이란 분리된 듯 보이는 것들의 근원적 합일성(연관성)을 보는 눈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이라는 큰 주제가 정해지자 각 편의 이야기를 쉽게 구상할 수 있었다. 맨 처음 쓴 작품은 「불멸」인데 이 소설의 프레임은 ‘사문유관(四門遊觀)’에서 가져왔다. 사문유관이란 태자 시절 석가모니가 동문에서 노인을, 남문에서 병자를, 서문에서 죽은 자를, 북문에서 승려를 보고 노병사에서 벗어나고자 출가를 결심했다는 일화인데, 그 구조가 단순하고도 재미있어 이를 가지고 다양한 이야기를 빚어낼 수 있다. 「불멸」은 그 동서남북 프레임을 SF와 접목시켜 현재와 미래, 청년과 노인, 꿈과 현실의 통합을 시도한 소설이다.


「환생」은 ‘붓다와 그리스도의 통합’이라는 궁극의 테마를 ‘가볍게’ 그려낸 작품이다. 붓다가 아래서 위로 올라간(해탈) 존재라면 그리스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육화) 존재라 할 수 있는데, 이 상승과 하강, 해탈과 육화, 신과 인간을 통합하는 일이 이십 대 이후 내 삶의 화두가 됐다. 그 통합 작업에 ‘피가 흐르게’ 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매개로 형상화한 소설이 「환생」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렸는가”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의 ‘아버지’(예수의 상위자아)인 신을 향한 것인데, 이를 단순하게 보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의 말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예수의 ‘부자 관계’는 영적 차원의 얘기지만 육적 차원에서 이런 관계에 얽혀 있는 성인이 있다. 바로 붓다이다. 그는 갓 태어난 아들(라훌라)을 버리고 출가했기에 라훌라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 된다. 나는 그 아들이 “어찌하여 나를 버렸는가” 하고 아버지(붓다)에게 묻는 것을 상상했다. 이렇게 버림과 버려짐의 오묘한 부자 관계를 석가모니와 예수의 연결고리로 삼아 ‘붓다와 그리스도의 통합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 창작의 시작은 자유로운 사유와 공상이다.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연관성을 보고(상상하고) 이를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으면 작가(혹은 붓다)가 된 것이다. 7월의 시작과 함께 장마철에 접어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하늘과 땅의 연관성을 생각해본다. 이를 문장으로 정리해 나의 소설 세계의 으로 정하고 그 법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을 간다.


그 길은 아직 없는 길이다. 작가의 발걸음과 함께 태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왕의 길(王道)이다. 소설 세계의 왕이 전진하면서, 백지의 땅에 검은 길이 <환생>한다.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 언어의 족적으로 <불멸>의 길을 낸다. 끝 문장의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그냥 쓴다. 멈추지 않고, 따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이것이 우주를 종횡하는 지름길, 초단편소설의 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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