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내내 비가 온다. 7월 1일 <초단편소설법> 첫 화를 발행하며 “장마철에 접어들었다”고 썼는데 아직도 장마철이다. 나처럼 비를 좋아하는 친구가 ‘비 온다’는 이유로 엊그제 집에 찾아왔는데, 나 또한 이 서프라이즈 방문이 재미있어 <굿파트너> 본방을 포기했다.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 <굿파트너>의 두 주인공은 이혼변호사이다(남주와 여주가 아닌 여성 2인이다). 한 명은 남편이 외도를 하여 본인이 이혼 사건에 휘말린 베테랑이고, 또 한 명은 아버지의 외도로 복잡한 가정사를 경험한 비혼주의자 신입이다. 이들의 업무가 이혼 변호인지라 이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를 엿볼 수 있는데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드라마 속 이혼의 주된 이유는 ‘배우자의 외도’이다.
자신의 ‘짝’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체적인 사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것들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결혼 상대가 자신의 ‘진짜 짝’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로 보인다. 욕망이나 외적 압력 등 여러 이유에 의해 ‘적당한 상대’와 결혼을 하긴 했으나 그 사람이 진정한 반려자는 아닌 것이다. 연애를 하다 헤어진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렇다면 ‘진짜 짝’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진정한 반려자란 인간 안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깨우는 존재다. 이백의 「산중문답」의 한 구절인 별유천지비인간은 대개 ‘속세를 넘어선 이상향’으로 해석되지만, 그보다는 ‘다른 천지이며 인간계가 아님’이라는 자체의 뜻에 주목해 보자. 기존의 천지(의식)와 인간(자아)을 넘어서는, 그러나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본래면목을 꽃피게 하는 존재가 진짜 짝인 것이다. 그래서 참된 반려자를 만나면 인간은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별유천지비인간의 반려 관계는 애착심과 의존성을 넘어선 곳에 있다. 나의 반려식물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나는 그 화초(허브)를 십여 년간 수십 배 크기로 키웠는데, 이러한 성장을 식물의 ‘별유천지비인간의 개현’이라 할 수 있다. 생장이 어렵다는 그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 것은 나라는 반려인을 만났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내가’ 키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한 일은 물을 준 것밖에 없고, 그 생명체는 햇빛과 바람, 그리고 자체의 생명력에 의해 스스로 자라났다. 식물 입장에서 나라는 반려인에게 특이점이 있다면, 생명체의 생명력을 깨어나게 하는 존재라는 점일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허브를 바라보고 향기를 즐기는 기쁨이 있지만 그게 없다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에 의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반려식물 생명이. 2024. 7. 28.
참으로 건강한 반려 관계인데, 이는 소설 쓰는 과정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묘사’를 통해 그러하다. 제목 자체에 따옴표가 붙어 있는 키플링의 「‘무서운 밤의 도시’」는 전체가 묘사로 이루어진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이 짧고도 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생사(生死) 중첩의 별유천지비인간계인데, 비슷한 모티프를 지닌(또한 독특한 아우라를 품은) 영화 <엉클분미>가 연상되기도 한다. 두 작품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을 형용하면서 묘사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묘사란 ‘어떤 대상을 그려내는 기술’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리든, 상상 속의 내용을 그리든 간에, 묘사하는 자와 묘사 대상 사이에는 저 ‘별유천지비인간’이 개입한다. 그 대상이 용이든 기차든 간에 이를 묘사한 글이나 그림은 묘사 대상을 사진처럼 그대로 찍어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붓/펜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묘사하는 의식과 그 대상은 서로에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면서 서로를 살려낸다. 묘사자는 묘사하는 행위를 통해 의식의 별유천지비인간을 개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꽃피듯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묘사의 꽃은 독자의 의식으로 넘어가 다시 새롭게 피어난다.
묘사의 의식과 대상 간의 굿파트너십, 이것이 소설-현실의 왕도(王道)와 정도(正道)를 만든다. 외도(外道)란 이 왕의 대로에서 벗어난 바깥(外) 길(道)이다. 기존 세계 바깥에 있기에 색달라 미혹되지만 그것은 별유천지비인간의 대체물로서, 선이 엇나가고 화살이 빗나간 것이다. 묘사의 세계에서 외도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A를 보며(상상하며) B를 그리는 건 가당치 않다. 독자 입장에서도, 묘사된 A를 읽으며 B를 떠올릴 수는 없다. 죄(sin)의 어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감’에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외도는 죄다. 반면 별유천지비인간은 의식의 엑스텐에 꽂히는 정수(精髓) 개화이다. 그것은 뼈의 골수를 채우는 동시에 뼈를 뚫고 나오는 살을 살아나게 한다.
올림픽 시즌이다. 나는 양궁만 본다. 좋은 문장과 굿파트너는 언제나 존재의 심장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