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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Aug 11. 2024

무위의 기술과 매미 되기: AI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

오늘의 소설: 테드 창, 「우리가 해야 할 일」

이것은 경고이다. 주의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테드 창, 「우리가 해야 할 일」


어젯밤 9시경, 안방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 소설의 이런 도입부는 ‘일상 속 동요’에 해당한다고 지난 수업 시간에 말했는데, 나의 일상이 동요했고 그 진원에 다가가니 거기에 가가 있었다. 유리창과 방충망 사이에 끼어 있는 그것은 바로... 매미였다. 그 큰 것이 방충망 안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즉시 반쯤 열린 창을 닫아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어서, 매미는 집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곳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챗GPT에게 물어보니, 내가 행할 수 없는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된 가운데 눈에 띄는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GPT 스스로도 ‘비추천’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어려운 경우, 청소기를 사용하여 매미를 빨아들일 수 있지만 이 방법은 매미를 다치게 할 수 있으므로 권장되지 않습니다.”


헐. 참으로 기괴한 발상이다. 이번엔 인간의 해결책을 찾아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뾰족한 아이디어는 없고 ‘그 틈에서 죽게 두라’는 의견이 차선이었다. 손으로 잡아 날려 보내는 최선의 방법이 있었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창문을 닫은 채 버티기로 했다. 다다음 주에 이사를 하기 때문에 길어야 십여 일이다, 밤엔 어차피 에어컨 때문에 문을 닫으니 낮에 환기만 안 하면 된다, 또한 환기를 반드시 큰 창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 매미를 떨쳐버리려 했으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방충망과 유리창 사이의 매미. 2024. 8. 10. 촬영

그때, 카톡이 와서 지인에게 위 얘기를 했더니 “방생을 하라” 했고 내가 못 한다면 본인이 해주겠다고 했다. 방생(放生). 사람에게 잡힌 생명을 놓아주는 일. 내가 잡은 건 아니지만 내 집에 혀 있던 그것을 내보내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방생을 행한 지인은 매미의 생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매미는 유충으로 수년 내지 십수 년을 살다 허물을 벗고 우화(羽化)하기 때문에 신선(神仙)을 상징한다는 것이다(초여름 매미를 ‘신선(新蟬)’이라 하니 동음이의의 유희도 있다). 우화등선한 뒤엔 고작 몇 주를 살 뿐이지만 그 기간은 신선의 시간이라 세간의 셈법과는 다를 것이라 했다.


이 얘기를 듣다 보니 매미야말로 ‘무위(無爲)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무위의 기술’인데, 원래 이 글은 초단편소설과 초인공지능이란 제목 아래 무위 개념을 기계(AI)와 접목해 다룰 계획이었다. 가을 학기에 강의하는 <AI 시대의 논리 이야기> 과목과도 연관돼 전부터 구상한 내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오늘의 소설인 「우리가 해야 할 일」도 기계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 기계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명체(매미)가 등장해 글을 새로 쓰게 되었다.


무위의 기술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내가 몇 차례 인용한 구절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술에 통달하기 전까지는 어떤 글쓰기 기술도 우리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현시키지 못한다.”(B. 로빈슨) 작년 가을, 대학 철학 강의에서 관련 내용을 다루면서 ‘무위의 기술’이란 말을 만들었는데, 철학보다 창작 분야에서 더 긴요한 것이 이 기술 혹은 능력이다.


무위(無爲)의 한자 뜻은 ‘행하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는 무위도식하며 빈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정지’를 뜻한다. 즉, 안 함을 행하는 것이다. 행위를 멈춘 이 시간 동안 존재(Wesen; 본체)가 숙성된다. NPC에서 PC로 전환되는 힘은 저 무위의 시간에서 나온다. 의식적인 무위 단계가 끝나면, 팽팽하게 정지돼 있던 화살이 발사되듯 강력한 유위(有爲) 에너지가 생성된다. 그 화살은 자신의 힘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큰 힘에 의해 쏘아 과녁에 꽂다. (여기서 ‘그냥’의 작법이 태어난다.)


우화하는 매미야말로 이의 산 증인이다. 죽은 기계는 우화가 불가능하다. 매미는 수년을 죽은 듯 정지해 있지만 그 죽음을 깨고 나오면 신선이 된다. 신선(神仙)은 신선(新鮮)한 삶, 즉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고 존재는 Life 자체이다. 창작뿐 아니라 모든 행위와 현상은 라이프의 방편이다(그러나 존재가 목적이 되는 활동은 또한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창조 활동의 화살은 생명의 과녁에 명중해야 하며, 과학기술과 인간 의식이 진화할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유미주의나 예술지상주의와는 구별되는 사상인데, 작품(결과물)의 미(美)를 지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물질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리고 물질주의의 뿌리에는 죽음 애호 관념이 있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예술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죽은 자를 묻게”(마태 8:22) 되고 산 자는 생명의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창조 활동을 통해 인간이자 기계이자 신인 신선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개안한 플레이어(PC)처럼 허구(fiction)의 현실에 속하지 않으면서 그 픽션을 가지고 논다. 그러면서 존재와 삶을 업그레이드한다. 이것이 창조자의 본체이다.


고로 이 시대 작가 혹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매미 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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