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요?” 그녀가 반문했다. “우리 유치원에는 찰스라는 아이가 없는데요.” ―셜리 잭슨, 「찰스」
한국 양궁이 파리올림픽을 평정하고 있는 가운데, 어제 치러진 여자 개인전을 보다 평정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4강에 한국 선수 3인이 올라와 1, 2, 4위를 기록했는데 순위를 결정지은 요소는 기술보다 멘탈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메달 결정전 끝판의 끝 발에 다가갈수록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그 팽팽하게 당겨진 텐션 속에서 초연함을 유지하는 능력, 그것이 막판 승부의 키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외적 상황에 동요되지 않는 부동심, 평정심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그 근원을 ‘아바타 의식’에서 찾는다. 아바타 의식이란 PC(Player Character)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PC는 게임의 배경 같은 존재인 NPC(Non-Player Character)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플레이어 혹은 아바타 의식이 각성되면 외적 조건에 따라 마음이 반응하지 않으며, 현실의 일을 일종의 게임처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쉽게 말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타고나는 면도 있고 훈련을 통해 계발되는 면도 있는데, 궁술을 트레이닝하며 근본적으로 함양되는 능력은 이것이라 할 수 있다.
글쓰기 또한 그렇다. 활쏘기는 글쓰기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정도(正道)의 글쓰기를 통해 계발되는 것은 저 고차 의식인데, 제삼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아바타의 눈’이 개안되면 현실 전체를 내려다보는 관점을 갖게 된다. 게임 속 세계를 수직의 컴퓨터 화면을 통해 바라보듯, 현실 세계를 땅에 깔린 수평 화면을 통해 내려다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타를 포괄하는 평정된 의식으로 현실-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영화 <프리가이>는 NPC가 PC로 깨어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개안 현상을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가이는 PC의 선글라스를 낀 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고차 현실에 눈뜨게 된다. 그는 “현실에는 없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을 보며 놀라워하는데, 이는 PC의 눈이 열려 플레이어의 세계에 입성한 것을 뜻한다. 이를 통해 가이는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던 배경 인물에서 벗어나 스스로 게임을 주관하고 자신을 레벨업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프리가이>의 가이.
현실에는 없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 작가-플레이어는 이것을 구현한다. 매트릭스-현실 너머에 있는 ‘용’을 현현시킨다. 그것은 가상현실 속 NPC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판타지 혹은 허구이다. 그러나 선글라스 낀 가이처럼 깨어난 눈은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본다. 보이지 않은 차원의 진실은 현실적 허구가 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해도 그 또한 허구이다. 현실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의식 주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허구(fiction)를 서사적으로형상화하면 소설(fiction)이 된다. 셜리 잭슨의 짧은 소설 「찰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찰스’에 대해 천연스레 이야기하는 유치원생이 나온다. 부모 입장에서는 섬뜩한 사실이지만, 찰스는 유치원이라는 낯선 세계와 자아의 괴리에서 태어난 ‘새로운 자아’이다. 찰스라는 허구는 유치원 선생님과 나, 부모와 나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동시에 아이로 하여금 그 ‘현실’을 넘어서게 한다.
지금 보니 셜리 잭슨 소설집의 역자 이름이 ‘시현’(김시현)이다. 남다른 평정심으로 개인전 금메달을 따내며 양궁 3관왕에 오른 선수도 ‘시현’(임시현)인데, 시현(示現)은 보고 나타냄, 아바타의 현현을 뜻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러한 동시성 현상을 무위적으로 창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관 없는(듯 보이는) 것들의 연관성, 존재하지 않는(듯 보이는) 것들의 존재성이 허구의 예술을 통해 천연스럽게 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