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왕(輪王)이 붓다에게 물었다. 금, 은, 동, 철, 네 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윤왕의 옷이 번쩍거렸다. 그러나 보석보다 더 밝은 빛은 붓다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다. 붓다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 윤왕의 얼굴은 붓다와 똑같았지만 낯빛이 칙칙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여든 살의 붓다는 숲속 사라나무 아래 누워 있었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한자리에 뿌리내린 곳이었다. 붓다는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쳤다. 이제 영원한 정적에 들 시간이었다. 그때 그가 찾아왔다. 왕이 된 싯다르타. 다른 차원에 사는 붓다 자신.
“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윤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다. 바른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 만인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나의 백성들은 언제나 배불리 먹었고 어느 곳에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네가 가지 않은 길을 갔고 예언을 성취했다.”
붓다도 그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들었던 자신의 두 가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는 선인의 예언을 전하며 아들이 왕궁에 머물길 바랐다. 싯다르타가 속세에 남으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고, 출가하면 붓다가 된다고 했다.
“오래전 너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 절대로 병들지 않는 건강, 죽음을 초월한 생명, 이를 이루기 위해 집을 떠난다고.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나는 너처럼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다.”
윤왕의 당당한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붓다는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말과 침묵 사이에 고요한 빛이 흘렀다. 윤왕이 말을 이었다.
“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집에서 행복을 누렸다. 왕궁은 고통이 없는 세계였고, 나는 만인이 나처럼 고통에서 해방되길 바랐다. 그래서 온 세상을 행복의 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나는 나의 사명을 실현하는 데 젊은 날을 바쳤다.”
붓다는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다. 왕궁을 떠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시간들. 두려움과 의심과 절망을 뚫고 홀로 정진했던 나날들. 그 우주적 고독 속에서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하나의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그를 채찍질했다.
45년 전 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그림자는 나타났다. 보리수나무 아래서였다. 그림자는 싯다르타에게 지금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대는 무엇을 이루었는가?”
싯다르타가 대답하지 않자 그림자는 이렇게 말했다.
“비켜라. 거기는 내 자리다.”
그림자는 싯다르타를 그림자의 자리로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밀리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그림자여, 너는 나를 가짜로 만들어 내 존재를 훔치려 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이곳에 이르렀다. 여기는 내 자리다. 이 말에 그림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가 아는가? 증거를 대봐라. 나는 수백 가지 증거를 댈 수 있다.”
그러자 수백수천의 그림자 군단이 몰려와 그림자를 거대한 암벽으로 만들었다. 암벽에서 천지를 흔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네 차례다. 네가 진짜임을 증명해 보라!”
암벽이 된 그림자가 소리쳤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혼자였다. 자신의 정진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요청했다. 나의 수행이 결실을 맺었다면 크게 응답해 주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천둥이 울리고 땅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림자 군단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암벽도 온데간데없었다. 그림자를 물리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었다.
이후 반세기가 흘렀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다시 그것이 나타났다. 붓다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윤왕은 그림자를 보듯 붓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노쇠와 질병과 죽음을 극복한다더니 이렇게 늙어 죽게 되었구나. 네가 구하려던 중생도, 법을 전수받은 제자들도 너와 함께 늙고 병들어 죽어가니, 너는 개인의 목표도, 세상의 꿈도 모두 이루지 못한 것이다.”
붓다는 깨달았다. 그림자가 왕이 되어 부활한 이유를. 45년 전 자신은 대결에서 승리한 게 아니었다. 깨달음은 증명해 보일 수 없었다. 하늘도 땅도 신도 입증해 줄 수 없었다. 붓다는 이제야 비로소 목적지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것은 대각을 성취해서도, 세상에 불법을 전파해서도, 마음의 평온을 얻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제 너는 인정해야 한다. 네 삶의 결실은 보이지 않고, 너는 헛된 꿈에 빠져 생을 허비했으며, 무력한 노인으로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붓다는 침묵했다. 왕의 말이 고요 속에 스며드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다. 붓다는 두 그루 나무 아래 뿌리처럼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다. 그 몸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땅과 하나 되어 침묵하는 몸엔 환영도, 소리도, 색깔도 없었다.
“시간이 다 됐다.”
바람이 불었다. 윤왕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거대한 정적이 숲에 차올랐다. 붓다는 마지막 대결이 끝났음을 알았다.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도.
“싯다르타!”
윤왕이 이름을 외치며 사라졌다. 동시에 붓다의 눈이 감겼다. 윤왕의 것이자 붓다의 것인 그 이름의 의미는 이러했다. ‘목적을 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