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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의 습격, 창작 개념의 붕괴

AI가 폭로한 창작의 민낯과 글쓰기 노동의 종말

by 김태라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모니터를 비춘다. 텅 빈 화면 위로 커서가 외롭게 깜빡인다. 작가는 손가락을 키보드에 얹은 채 한참 동안 허공을 응시한다. 더 적절한 비유, 더 감각적인 표현, 더 매끄러운 문장.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창작’이라 불러온 풍경이다. 고독한 노동, 자기와의 싸움,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한 편의 글. 인간은 이 과정을 경외하며 ‘창작의 고통’이란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이 풍경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작가가 밤새 고뇌하며 쓰는 문장을 인공지능은 순식간에 수많은 버전으로 생성해낸다. 시, 소설, 칼럼, 보고서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 패턴을 학습한 기계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문체를 구사하기도 한다. 글쓰기의 진입 장벽은 사라졌고 창작 기술의 영역엔 알고리즘이 들어섰다.


이것은 단순한 도구의 등장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글쓰기’라고 불러왔던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인간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일자리 상실의 공포, 창의성 종말에 대한 불안.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인간이 할 일은 불안에 동요되는 것이 아니라 들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 그 쓰는 행위가 과연 진정한 ‘창작’이었는지 묻는 것이다.


기술이 된 글쓰기, 노동이 된 창작

AI의 등장 이전부터 인간의 글쓰기는 기술의 영역에 놓여 있었다. 문학 작품은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지어진 건축물에 비유되었다. 플롯의 구성, 시점의 활용, 문체 만들기 등 글쓰기의 모든 요소가 해부되고 체계화되었다. 작가는 영감을 받아 적는 시인이나 진리를 통찰하는 현자가 아니었다. 그는 문장을 다루는 기술자이자 의미를 조립하는 노동자에 가까웠다. 그의 주된 고민은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형식의 문제에 있었다.


모든 글쓰기 강의에서는 문장의 구조, 플롯의 공식, 캐릭터 유형 같은 기술적 요소를 가르친다. 신인상이나 문학상 심사에서도 작품의 구조와 유려한 문장 같은 형식적 완성도가 주요 평가 기준으로 작용한다. 서점의 글쓰기 코너에는 『매혹적인 문장을 쓰는 법』, 『독자를 사로잡는 플롯의 비밀』, 『팔리는 스토리의 공식』 같은 작법서만 진열되어 있다.


이 모든 현상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하나다. 글쓰기는 학습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영감이나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배우고 연습하면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이러한 생각은 글쓰기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창작의 본질을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글쓰기의 본질이 사유의 깊이나 세계관의 구현에서 점차 멀어지고 기술적 완성도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문인은 스스로 기능인이 되었고 비평은 형태적 결함을 지적하는 품질 검사 과정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글은 예술이 아닌 ‘생산물’이 되었고, 작가는 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되었다.


인간이 창작 행위를 기술로 축소시키면서 창작의 영역에 기계가 들어설 자리를 스스로 마련해준 셈이다. 법칙, 공식, 구조, 패턴. 이런 것은 알고리즘이 가장 잘 다루는 영역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해야 했던 글쓰기 기술, 즉 텍스트를 기반으로 적절하고 효과적인 단어와 문장을 조합하는 능력은 사실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간 두뇌의 신경망을 모방한 AI에게 이는 가장 손쉬운 작업이었다.


결국 AI는 인간이 수천 년간 쌓아 올린 글쓰기 기술의 결정체를 학습했다. 설득력 있는 논리 전개 방식, 감동적인 이야기의 구조, 감각적인 시의 운율. 그 모든 ‘잘 쓰는 법’을 데이터로 흡수하고 패턴으로 익혔다. 그리고 이제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더 능숙하게 그 기술을 재현해내고 있다.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묘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현실적 분위기까지. AI는 특정 작가의 스타일을 학습하여 놀랍도록 유사한 텍스트를 생성해낸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창작이 얼마나 ‘기술적’이고 ‘패턴화’된 영역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이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신성시했던 행위의 상당 부분이 숙련된 ‘기술적 노동’에 불과했다는 사실. 이것이 AI가 우리에게 폭로한 불편한 진실이다. 인간은 작품에 “영혼을 갈아 넣는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술이 된 글쓰기, 노동이 된 창작은 결국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운명이었다.


알고리즘의 습격과 창작 개념의 붕괴

21세기 어느 날,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작가’를 맞이했다. 이 작가는 잠을 자지도, 고뇌하지도, 슬럼프를 겪지도 않는다. 수만 권의 책을 순식간에 읽고, 세상의 모든 문체를 모방하며, 한 줄의 명령어로 끝없는 텍스트를 쏟아낸다. 바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이다. 그 등장은 조용했지만 창작의 세계에 가져온 충격은 혁명적이었다.


이 사건은 더 편리한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는 글쓰기 역사에 있어 기술적 특이점이라 할 만하며, 기존의 창작 개념 자체를 붕괴시키는 사건이다. 이전까지의 기술, 가령 인쇄술이나 컴퓨터는 인간의 창작 활동을 ‘돕는’ 도구였다. 그것들은 인간의 사유를 더 널리, 더 빠르게 퍼뜨리는 역할을 했지만 그 내용 자체를 ‘생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AI는 다르다. AI는 인간의 언어 패턴과 지식 구조를 학습하여 스스로 새로운 문장을 ‘창조’한다. 이제 누구나 프롬프트 창에 “고전 미스터리 스타일로 탐정 이야기를 한 편 써줘”라고 입력하기만 하면 그럴듯한 글을 몇 초 만에 얻을 수 있다.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해주고, 막히는 곳의 문장을 이어주며, 심지어 책 한 권의 초고를 써주기도 한다. 창작을 위해 요구됐던 기술적 장벽, 즉 생각을 구조화하고 문장을 구성하는 능력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것이다.


이는 작가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수년간 작품 한 편을 위해 정진하는 소설가, 밤새워 마감에 시달리는 기자, 카피 한 줄에 모든 것을 거는 광고인. 그들의 핵심 역량이었던 ‘쓰기 능력’이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들이 지키고 있던 ‘작가의 성’은 AI의 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기계가 글을 써줄 수 있는 시대. 인간의 글쓰기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기존의 작가상은 힘을 잃는다.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고, 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하며, 독자를 사로잡는 테크닉을 연마해온 ‘기술자로서의 작가’는 이제 설 자리가 없다. 물론 AI가 생성한 텍스트엔 정신적 깊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의 질적 차이가 아니라, 창작의 ‘행위’ 자체가 기술적 수준에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AI가 폭로한 인간 창작의 민낯

AI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문명의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창작의 내부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다. 인간은 그 거울을 통해 그동안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인지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민낯, 즉 창작의 공허(空虛)를 마주하게 된다.


기술 문명의 거울 앞에서 인간 창작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AI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진짜로 뭔가를 ‘창조’한 적이 있었는가? 기존 사유의 틀과 언어의 형식을 반복하고 변주하여 글을 찍어냈던 건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창작자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창작 과정 역시, 경험과 학습이라는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예측과 조합 과정이라는 점에서 AI의 작동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로서의 창작이 붕괴되는 지점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창작의 존재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기계가 나의 생각과 문체를 흉내 낼 수 있다면, ‘나’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기계가 나보다 더 잘 쓸 수 있다면, 나는 왜 계속 써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기계가 대신 써줄 수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혹은 외형적 과시를 위해 글을 ‘써야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그 욕망은 ‘기능(function)’이 아니라 ‘존재(existence)’ 차원에서 온다. 인간은 기술적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세계와 관계 맺기 위해 쓴다.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고 흩어진 생각들을 정리하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결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써내려가는 ‘과정’으로서의 수행(遂行/修行)이 글쓰기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 노동의 종말’은 곧 ‘존재의 글쓰기’의 시작이 된다. AI가 기술적 영역을 완벽하게 수행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비기술적’ 혹은 ‘초기술적’ 창작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거울에 비친 인간의 초라한 민낯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화장을 지우고 진짜 얼굴로 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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