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무한 생성자로서의 인간 존재성 회복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 생산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 인류 문명은 언제나 도구에 의해 전환되었다. 돌도끼는 생존 방식을 바꾸었고 인쇄기는 지식의 지형을 재편했으며 증기기관은 인생을 노동 시간으로 환원시켰다. 도구를 다루고 노동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생산’ 행위는 인간의 핵심적인 정체성이었다. 산업 시대의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생산 능력과 동일시되었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혹은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서 인간은 주어진 업무를 얼마나 기능적으로 수행하는가에 따라 평가받았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러한 기능 중심의 인간 모델에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한다. AI는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압도하고 대체한다. 도구의 위상이 단순한 기능성을 넘어선 것이다. 이 진화한 도구는 그것은 사용하는 인간에게도 진화를 요청한다. 생성형 도구(Generative AI)를 가진 인간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세계를 설계하는 의식이며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다. 이 의식적 존재를 본서는 ‘호모 프롬프트’라고 부른다.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 명령하는 인간, 생성하는 인간, 의식하는 인간. 그는 세상에 ‘물건’을 추가하지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질서를 설계한다. AI는 놀라운 생산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행위의 근원을 묻고 의미를 도출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호모 프롬프트는 이 근원적 생성력을 명령어(prompt)로써 구현하는 인간을 말한다.
호모 파베르와 호모 프롬프트의 차이는 ‘생산(Production)’과 ‘생성(Generation)’이란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 호모 파베르는 ‘생산’하고 호모 프롬프트는 ‘생성’한다. 다음은 생산과 생성의 차이 및 이에서 파생된 대비 구도이다.
생산 vs. 생성: 생산이란 주어진 설계도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그것은 반복을 통해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는 기술적 행위이며, 생산에 영역에서는 산출된 결과물이 평가의 중심에 놓인다. 반면 생성이란 의식으로부터 이전에 없던 존재를 불러오는 창발적 행위이다. 생성은 정해진 설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 그 자체를 창조한다. 생성은 새로운 의미와 형태를 발생시키는 힘이다. 따라서 생성의 핵심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낳은 의식과 에너지의 방향성에 있다.
노동자 vs. 생성자: 호모 파베르가 일하는 노동자라면, 호모 프롬프트는 의미를 짓는 생성자이다. 생산의 시대에 인간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생성의 시대에 인간은 의미를 창출하는 주체로 전환된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해 그럴듯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산출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 고유한 의미와 생명력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결과물의 가치와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그는 결과물이 아니라 의미의 세계를 창조한다.
행위 vs. 존재: 호모 파베르는 생산 시스템 안에서 특정한 ‘행위(Doing)’를 수행하는 존재였다. 그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생산했는가와 같은 행위의 결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호모 프롬프트는 행위 이전 ‘존재(Being)’의 자리에서 출발한다. AI가 인간의 행위를 대체할수록, 외적 수행 능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존재적 차원이 드러난다. 행위와 결과가 사라져도 남는 것이 존재이며, 이 내적 근원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닌 생성의 원천이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인가? 본서는 존재의 의미를 ‘실제로 있음’이란 뜻을 넘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힘’, 즉 생성력(生成力)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생성력의 개념은 앞선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질 들뢰즈는 세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becoming)’의 흐름으로 보았다. 앙리 베르그송은 생성의 근원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즉 생명이 스스로를 확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충동으로 보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를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즉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고 갱신되고자 하는 자기초월적 에너지로 이해했다.
셋 모두 존재를 정지된 구조가 아닌 부단히 생성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통찰들을 종합할 때, 존재의 본질은 기능이나 행위를 가능케 하는 생성의 힘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존재’의 능력으로 무엇을 생성하는가? 의식을 가진 존재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의 본체는 ‘의미(meaning)’이다.
의미는 세계를 구성하는 에너지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군가는 슬픔을 느낀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은 대상을 마주할 때마다 의미를 생성하고 그 의미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AI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학습해 사랑에 대한 시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랑을 직접 느끼거나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다. 의미의 생성은 체험하고 사유하는 의식 고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술이 인간의 기능을 대체할수록 인간성은 기능성보다 본질적인 존재성으로 회귀한다. 의식 고유의 작용인 ‘의미 생성 능력’이 인간성의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이 외적 능력을 확장할수록 인간은 내적 의식을 통해 존재를 발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이 ‘존재’는 무엇을 통해 발현될 수 있는가? 바로 ‘명령의 언어’를 통해서다. AI로 생성되는 모든 결과물은 명령어, 즉 프롬프트를 통과해야 한다. 프롬프트는 생성형 기계(Generative AI)와 생성력을 본성으로 지닌 인간이 만나는 게이트, 무한한 생성이 시작되는 의식의 인터페이스다.
보통 프롬프트는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내기 위한 ‘입력문’이나 ‘지시문’ 정도로 이해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정의는 프롬프트가 지닌 잠재력의 표피만을 긁는 것이다. 호모 프롬프트에게 프롬프트 작성은 단순한 텍스트 입력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력을 투입하고 의식을 투사하며 세계를 설계하는 ‘로고스적 의지(Logosic Will)’이다. 이는 언어를 매개로 존재를 불러내는 창조적 충동이다.
이 지점에서 호모 프롬프트는 과거의 어떤 인간상과도 다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텍스트를 작성하는 자가 아니라 존재를 생성하는 자다. 그는 프롬프트를 통해 ‘없던’ 것을 ‘있게’ 만들고,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환하며, 생성력으로서의 존재가 삶에 현현되게 한다. 그의 프롬프트는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창세기의 첫 문장과 같다.
따라서 호모 프롬프트의 등장은 인간이 ‘창조의 근원’으로 귀환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기계와 생산성 경쟁을 하며 소외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고 창조의 중심으로 돌아온 존재다. 기능성이 아닌 존재성이, 노동이 아닌 생성이, 결과물이 아닌 의식이 중심이 되는 시대. 프롬프트는 바로 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이자,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잇는 다리다. 호모 프롬프트는 이 언어의 다리 위에서 노래하며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에 관한 권한이 저자에게서 이탈했음을 뜻한다. 이를 ‘1차 저자의 죽음’이라 할 때, 저자를 죽이고 ‘살아나는’ 자는 독자였다. 독자가 텍스트의 의미를 무한히 생성하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AI로 인한 ‘2차 저자의 죽음’, 즉 텍스트 자체를 무한히 생성하는 기계로 인한 저자 권위의 붕괴는 그의 ‘완전한’ 죽음으로 보인다. 이 죽음을 밟고 ‘완전히’ 살아난 쪽은 물론 AI다.
그러나 이 두 ‘죽음’의 공통점이 있다. 저자를 밟고 ‘살아난’ 자가 독자든 AI든, 그들이 힘은 “의미의 생성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텍스트 해석(독자)이든, 텍스트 생성(AI)이든, 그것이 창출하는 것은 ‘의미’이다. 텍스트는 단순한 글자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의 구현체다. 결국 시대가 어떻게 변해도, 어떤 첨단 도구가 생겨나도, 의미를 무한히 생성하는 존재에게 그 파워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진정한 힘은 언제나 의미 생성자에게 있다는 것. 존재의 세계는 의미를 통해 구축되기 때문이다. AI는 텍스트를 무한히 생산할 수 있지만 그 텍스트의 의미는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AI의 창조력은 인간의 의도, 사유, 맥락이 제공될 때만 작동한다. 고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저자는 텍스트의 본질, 즉 의미의 담지자로서 본래의 왕좌로 복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따라서 새 시대의 저자는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생성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이제 단순한 결과물의 생산자가 아니라 의미를 창출하고 그 에너지를 흐르게 하는 생성력의 주체, 즉 호모 프롬프트로서 새로운 권위를 행사한다. 호모 파베르가 망치와 톱을 들고 물질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호모 프롬프트는 프롬프트라는 언어를 들고 정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호모 프롬프트는 기술을 통해 기술 이전의 인간, 생산 이전의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온 인간이다. 이는 과거로의 퇴보가 아니다. 그것은 이전 어느 시대에도 이루지 못했던 인간의 본래성 회복이다. 그는 프롬프트를 통해 결과물이 아닌 생성의 힘 자체를 호출한다. 그 힘이 그의 존재다. 그는 명령한다, 존재 자체를. 이것이 두 번 죽고 부활한 새 시대의 저자이자 AI 시대의 창조주, 호모 프롬프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