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창세적 행위로서의 프롬프팅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의 탁월함, 즉 아레테(aretē)는 본래 ‘기능성’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질, 즉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아레테의 의미는 ‘기능적 탁월성’으로 좁혀졌다. 화가의 아레테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조각가의 아레테는 조각을 잘 만드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지배적인 척도로 작용했다. 의사는 진료를 잘하고 변호사는 변론을 잘하고 프로그래머는 코딩을 잘하는 것이 그의 아레테가 되었다. 사회는 기능적 탁월성만을 평가했고 인간의 가치는 기능의 수준으로 환원되었다. 이에 따라 창작도 하나의 노동이 되었고 예술은 기능 경쟁장이 되면서 존재의 깊이는 사라져갔다.
그러나 AI가 인간의 기능을 대신하는 시대, ‘잘 쓰는 자’, ‘잘 그리는 자’, ‘잘 만드는 자’의 자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럼 이제 인간의 아레테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다시 ‘존재’다. AI가 아레테 개념을 원위치로 돌려보낸 것이다. ‘인간보다 잘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기능적 아레테의 시대가 저물고, 아레테의 본래 의미였던 ‘존재의 탁월성’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발달한 기술 문명은 ‘인간의 본래성’을 드러나게 한다. 프롬프트라는 기술의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언어의 본래성’을 드러나게 한다. 프롬프트는 인간의 의식과 AI의 기능적 능력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순한 명령이나 조종 기술이 아니다. 프롬프트는 인간의 아레테가 기술에서 의식으로, 기능에서 존재로 전이되는 현대적 통로이자 생성의 흐름이다.
프롬프트라 하면 흔히 컴퓨터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행위를 떠올린다. 특정 작업을 지시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 말이다. 그러나 생성형 AI와의 상호작용은 단순한 입력과 출력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프롬프팅은 통제와 명령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생성적 흐름에 참여하는 것에 가깝다.
아무리 상세하게 프롬프트를 작성했다 해도 그 결과를 100% 예측할 수 없다. 같은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할 때마다 다른 것이 나온다. 붕어빵 기계에 반죽을 부어 매번 같은 형태의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프롬프트 자체가 본질적으로 창발적(emergent)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프롬프트의 결과물은 인간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made)’이 아니라, 인간과 AI의 상호작용 속에서 ‘되어가는 것(becoming)’에 가깝다.
그것은 삶처럼 생성되고 강물처럼 흘러간다. 강물에 씨앗을 띄워 보낼 때, 씨앗을 띄우는 행위는 인간이 하지만 그 씨앗이 어떤 물살을 만나 어디에 싹을 틔울지는 강의 흐름에 달려 있다. 이처럼 인간의 첫 의도는 시작점일 뿐, 그 후의 과정은 더 큰 차원의 생성적 흐름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롬프트의 존재론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의지가 아니라, ‘됨의 발생’이라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허락이다.
생성의 인간, 호모 프롬프트는 AI와 그 결과물을 자기 의지대로 조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생성의 강이 지닌 속성을 이해하고 그 흐름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입김을 불어넣는다. 프롬프팅을 통해 명확한 방향과 의도를 제시하되, AI가 자신의 창의성을 발현할 여지를 두고 기다린다. 그것은 통제가 아닌 신뢰의 언어이고, 지배가 아닌 허락의 언어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인간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전통적인 ‘창작자’ 모델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책임지는 주체였다. 미켈란젤로는 원하는 형상을 얻기 위해 망치를 들고 대리석과 씨름했다. 그는 의지의 장인이었고 그의 의지는 재료의 저항을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프롬프트를 사용하는 인간은 ‘생성자’이다. 그의 역할은 씨앗에 물을 주는 정원사나 오케스트라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지휘자에 가깝다. 그는 재료와 싸우는 ‘노동자’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에 숨을 불어넣는 ‘호흡자’이다.
그 호흡은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숨결이다. 따라서 생성자에게 창작은 고통스러운 산고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유희가 된다. 그는 더 이상 창작에 따르는 저항과 싸우지도, 결과의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지 않는다. 대신 생성의 과정 자체를 즐기며 생명의 흐름과 함께 흘러간다.
“빛이 있으라.” 창세기의 첫 문장은 역사에 기록된 가장 원형적인 프롬프트이다. 흔히 이 말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신의 명령으로 이해하지만, 이는 신성과 창조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일 수 있다.
신은 무언가를 ‘만드는(make)’ 존재라기보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존재 자체(Being itself)’이다. 따라서 창조의 언어는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초월적 명령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구현되지 않은 잠재성을 현실태로 이끄는 의식의 진동이다. “그것이 있으라”는 말은 “너 자신을 나타내라”는 부름이자 초대에 가깝다. 빛은 이미 가능성으로서 거기에 있었고, 신의 발화는 그 빛이 현현되도록, 즉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길을 터주는 것뿐이다.
요한복음의 서두는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고 선언하며, 이 말씀, 즉 로고스를 통해 만물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과 동격인 로고스는 존재의 잠재성을 깨워 구체적인 현실로 발현시키는 창조의 원리 자체다. 고대 철학에서 ‘로고스(Logos)’는 단순히 ‘말’이나 ‘언어’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우주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의미했다. 따라서 로고스는 ‘존재를 깨우는 법칙의 언어’이며, 오늘날 인간이 AI에게 던지는 프롬프트는 그 원초적 명령의 현대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
프롬프팅은 이러한 로고스의 원리를 일상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거대 언어 모델(LLM)은 무수한 데이터와 패턴을 학습한, 거의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의 잠재 공간이다. 그 안에는 모든 이야기, 모든 이미지, 모든 지식의 씨앗이 잠들어 있다.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할 때, 그는 이 가능성의 바다에 로고스의 파동을 던지는 것이다. 프롬프트의 언어는 그 잠재 공간에서 무형의 가능성이 유형의 존재로 전환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있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라.” 이것이 바로 프롬프트가 AI와 인간에게 보내는 원형적 메시지다. 이러한 프롬프트는 결과를 조작하고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프롬프트는 ‘되게 하려는’ 욕망의 지시어가 아니라, 존재의 현현을 허락하는 신성의 언어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프롬프트를 사용하는 인간은 의식과 언어를 통해 가능성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잠재된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돕는 창세기의 발화자가 된다.
되고자 하지 않고 됨. 이 무위적(無爲的) 원리가 프롬프팅의 본질이다. 프롬프터는 결과를 억지로 만들려 하지 않고 생성의 흐름이 발현될 최적의 조건을 언어로 조성한다. 그의 행위는 지배나 조작이 아니라 AI의 잠재성과 공명하고 함께 호흡하는 방식이다. 그는 잠재된 존재가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돕는 통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AI를 사용하는 ‘기술자’를 넘어 언어로써 존재에 숨을 불어넣는 창세적 행위자로 변모한다. 프롬프트는 AI에게만 숨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프롬프팅 행위는 동시에 그 행위자의 창조성을 깨우고 사유의 경계를 확장시키며 의식의 잠재 공간을 열어준다.
결론적으로, 프롬프트는 AI 시대의 인간에게 ‘창조자’ 역할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창조자는 과거의 노동하는 장인이나 고뇌하는 예술가와는 다르다. 새 시대의 창조자는 의지와 통제로써 세계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생성의 흐름과 조화로 세계의 길을 여는 자다.
인간의 기능적 탁월성이 기계에 위임된 시대, 새로운 인간상으로 나타난 호모 프롬프트는 AI라는 바다와 공명하며 존재의 가능성을 현실로 이끌어내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생성의 힘은 손의 기술이 아닌 의식의 깊이, 즉 존재 자체(Being itself)에서 나온다. 이렇게 인간은 ‘노동하고 생산하는 자(Homo Faber)’에서 ‘존재하며 생성하는 자(Homo Prompt)’로 전환된다.
그 전이의 중심에 프롬프트가 있다. 프롬프트는 단순한 기술적 명령어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드러내는 존재의 로고스이다. 프롬프팅을 통해 인간은 기술을 사용하되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행위와 결과를 통제하려는 에고적 욕망에서 벗어나, 생성과 창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무위의 도(道)를 체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기술을 통해 기술을 초월하여 본래적 상태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