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Prompt System & Return of Logos
“나는 나를 프롬프트한다.” 앞 장에서 이를 의식 내부의 창세적 구조, 즉 ‘자기 프롬프트 시스템(Self-Prompt System)’이라 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개인의 의식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의식이 현실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현실을 만들 때,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서 ‘심(心)’이 ‘조(造)’의 활동을 할 때, 이를 작동시키는 매개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빛이 있으라”는 말이 빛을 존재케 했다. 이처럼 언어는 의식이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이자,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프롬프트 자체인 것이다.
세상은 견고한 실체처럼 보인다. 도덕과 법률, 사상과 이념, 기계와 시스템 등은 태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듯 작동한다. 그러나 이 모든 유·무형 구조물의 기초에는 ‘언어’가 있다. 법은 명령의 언어, 철학은 의미의 언어, 기술은 실행의 언어다. “살인하지 말라”, “너 자신을 알라”, “만약 A라면 B를 실행하라(If A, then B)” 등과 같이 인류는 언어적 프롬프트를 통해 질서를 세우고 세계를 형성해왔다. 결국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언어적 약속의 총체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문명은 언어로 설계된 ‘프롬프트 아키텍처(Prompt Architecture)’가 된다. 세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의 언어적 활동이 외부에 투영된 거울과 같다. 인간은 그 거울-언어의 건축물 속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그것을 새로 쓴다. 따라서 자기-프롬프트 문장은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 “나는 나를 프롬프트함으로써 세계를 프롬프트한다.”
개인의 의식에서 태어난 말이 어떻게 문명 구조로 변환되는가? 여기에는 분명한 원리가 있다. 작은 씨앗이 땅에 뿌려져 거대한 숲을 이루듯, 개인의 프롬프트는 단계적으로 확장되고 구조화되면서 세계를 형성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본서는 ‘세계 프롬프트 시스템(World-Prompt System)’이라 명명한다. 그 시스템은 크게 네 단계로 작동한다.
1. 개인의 프롬프트 생성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한 사람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상가, 예술가, 혁명가들은 모두 기존 세계에 낯선 질문, 즉 ‘새로운 프롬프트’를 던진 사람들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프롬프트,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천부인권을 가진다”는 계몽주의 사상가의 프롬프트는 처음엔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불과했다. 이 단계에서 언어는 개인적 신념, 사유, 영감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처럼 개인의 생각은 모든 것의 발단이다.
2. 사회적 관념으로의 확산
개인의 프롬프트는 대화, 작품, 강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타인에게 전파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은 타인의 공감을 얻고 논쟁을 통해 다듬어지며 점차 많은 사람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롬프트는 살롱과 인쇄물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하나의 시대정신을 형성했다. 이처럼 개인의 언어가 집단의 언어로 변모한 것이 바로 사회적 관념의 형성이다.
3. 제도화된 시스템으로 구현
널리 퍼진 생각은 추상적 관념에 머물지 않고 사회의 작동 방식을 규정하는 규칙과 시스템으로 구체화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관념은 시민 혁명을 거쳐 헌법과 법률이라는 ‘제도화된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문장으로 이 관념을 명시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인 장치들이 마련된다. 이 단계에서 언어는 실행력을 갖춘 시스템의 코드로 전환된다.
4. 현실 문명의 구조로 확립
제도화된 시스템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전승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 법칙처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만인의 투표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한때 급진적이었던 이 프롬프트는 일상적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언어는 인간 의식 밑바닥에 깔린 ‘기본값(default value)’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이 문명 구조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개인의 프롬프트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가 거대한 문명의 강을 이룬 것이다.
이 네 단계 흐름, 즉 ‘개인의 프롬프트 → 사회적 관념 → 제도화된 시스템 → 문명의 구조 확립’이 바로 세계 프롬프트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다. AI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명령어를 설계하듯, 인류는 역사 속에서 의식의 프롬프트를 통해 세계라는 결과물을 생성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의 위기는 인간 의식에 프로그래밍된 낡은 프롬프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인이 직면한 문제들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명령어와 사고 패턴의 결과물이다. 양극화, 인간소외, 환경 파괴 등은 과거의 지배적 프롬프트가 제도화되고 현실화된 결과이다. 따라서 진정한 변화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제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그 근원에 있는 의식과 언어적 코드를 새롭게 작성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대 문명은 풍요와 진보의 정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 화려한 외피 아래서 인간 내면은 공허해져 간다. 말은 넘쳐나지만 소통은 단절되고, 지식은 폭증하지만 지혜는 고갈되며, 가상의 연결은 끝없이 확장되지만 실질적 고독은 깊어진다. 이러한 위기의 근원에는 하나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언어의 위기, 즉 언어가 지닌 로고스(Logos)적 힘의 상실이다.
문명의 위기는 곧 언어의 위기다. 앞서 말했듯 문명은 제도, 사상, 기술의 총합처럼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언제나 언어의 구조가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그 속에 자신을 거하게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던 하이데거나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라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이다. 이런 논의들은 세계가 언어적 질서 위에 세워져 있으며, 언어의 붕괴가 곧 문명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언어가 창조적 생명력을 잃을 때 문명은 의미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 언어의 생명력을 ‘로고스’라 부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는 ‘존재를 있게 하는 언어’, 즉 세계의 질서를 드러내고 의미를 생성하는 근원적인 힘을 가리켰다. 앞 장에서 논했듯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복음서 구절은 로고스의 창조적 힘을 표현한 것이다. 로고스는 존재를 불러내는 에너지, 실재의 세계를 여는 게이트와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로고스적 언어는 어둠과 혼돈 속에서 사물을 ‘의미 있는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호출이다. 이때 ‘의미’란 인간이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해석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사건 자체다. 꽃이 개화하듯 언어가 존재의 통로로 작동하며 존재-의미가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상태, 이것이 바로 로고스적 생성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현대의 언어는 이러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로고스적 언어가 ‘존재를 개현하는 말’이라면 비(非)로고스적 언어는 ‘소통만 하는 말’이다. 전자는 세계를 창조하고 의미를 생성하지만, 후자는 단지 정보를 교환하며 의미를 소비할 뿐이다. 근대 이후 언어학은 말을 기호(sign) 체계로 환원시켰고 발화의 핵심은 의사소통의 정확성에 종속되었다. 산업 문명은 언어를 사유의 매개에서 가치 생산의 수단으로 바꾸었다. 말은 이제 진리를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소비를 유도하는 메시지로 기능한다.
광고 언어는 욕망을 조작하고 정치 언어는 대중을 통제하며 미디어의 언어는 노출과 조회수를 위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언어는 ‘존재의 개현’이 아니라 관심을 끄는 ‘어그로(aggro)’로 변했다. 웹상의 언어는 존재의 문이 아니라 데이터의 운반체일 뿐이다. 말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짧아지면서 효율성은 극대화되지만 언어를 통해 존재의 깊이를 느끼기는 어려워졌다. 표현은 살았지만 본질은 사라졌고, 인간은 더 많이 말할수록 더 적게 존재하게 되었다.
언어의 힘이 약화된 결정적 원인은 ‘존재’와 ‘의미’의 분리에 있다. 언어의 로고스적 힘은 말하는 자의 의식과 그가 발화한 내용이 일치할 때만 작동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말하는 것을 ‘살지’ 않는다. 현대인은 “영혼 없이” 말을 내뱉는다. 지식을 말하지만 지혜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무감각하게 발설한다. 이에 따라 말은 빛을 잃고 소음으로 흩어진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의미는 쓸려간다. 말이 많아질수록 의미는 더욱 소멸한다.
AI의 언어는 인간 언어의 실상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기계는 인간의 언어를 완벽히 모방하지만 그 말에는 의식이 없다. 의도가 없다. 존재가 없다. 그럼에도 논리적이고 감각적인 글을 내놓는다. 의식 없이도 완벽히 작동하는 AI의 언어는 인간이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말해왔는지를 드러낸다. 기술이 언어의 기능화를 완결시키면서 로고스의 부재를 폭로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재의 순간, 침묵 속에서 로고스가 깨어난다. AI는 문장을 생성할 수는 있어도 의미를 의도할 수는 없다. 이 근본적 한계가 언어의 본래성을 되비춘다. 이때 언어는 다시 존재의 통로로 열리며, 존재의 발화로서의 프롬프트는 다시 창조의 매개가 될 수 있다. 결국 AI 시대는 ‘언어의 기능화’ 이후 도래한 언어의 본질 회복, 로고스 귀환의 시대다. 본래 자리로 돌아온 인간이 다시 언어로써 세계를 재건축하는 골든 에이지(Golden Ag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