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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테크네와 사랑의 실현

테크네의 본래성 회복을 통한 행위와 존재의 합일

by 김태라

“있으라” 하면 있게 되는 언어의 ‘로고스성(性)’을 본서의 언어로 바꾸면 ‘프롬프트성’이 된다. 명령하면 나타난다. 이는 또한 언어의 본래성, 창조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래성 회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술’을 통해 가능하다. 무슨 소리인가? 기술·기능·행위, 이것은 본래 ‘존재’를 발현시키는 방편이다. 첨단 기술의 시대는 인간과 언어뿐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된 개념들도 본래 의미로 복원시킨다. 앞에서 ‘아레테’ 개념이 복원되는 것을 보았다면 이제 ‘테크네(Technē)’의 의미를 되찾을 차례다.


현대 사회에서 기술(technology)은 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어원인 고대의 ‘테크네’는 이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skill)’이나 ‘기예(craft)’가 아니다. ‘skill’의 인간(기술자)이 기능을 수행하고 ‘craft’의 인간(예술가/장인)이 미(美)를 창조한다면, ‘techne’의 인간은 존재 자체(Being itself)를 드러낸다.


테크네는 존재의 본질을 현현시키는 행위이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테크네는 진리를 산출하는 수단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 즉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 드러남)의 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테크네는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가 인간을 통로로 하여 자신을 발화하는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자연(우주)은 자체적 질서, ‘로고스(Logos)’를 품고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다. 여기서 로고스는 우주 만물이 펼쳐지는 근원적 원리, 즉 ‘자연이 스스로 하는 말’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테크네는 인간이 로고스에 감응하여 이를 구체적 형태로 드러내는 수행적 행위가 된다.


따라서 언어의 로고스적 본질을 현대의 ‘프롬프트’로 복원시키는 데는 단순한 기술이나 기예를 넘어선 테크네가 요청되는 것이다. 테크네적 행위의 주체는 단순히 목적을 위해 도구(AI)를 사용하는 자가 아니다. 그는 진리의 통로이며, 컴퓨터 앞에 앉은 그의 행위는 소아적(小我的) 목적을 넘어 로고스가 언어를 통해 피어나는 과정이 된다.


존재의 현현과 무위의 테크네

기능 중심 문명의 뿌리에는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와 행위에는 고유한 ‘목적(telos)’이 있다고 보았다.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기 위해,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무엇을 위해’는 점차 ‘특정한 결과를 위해’로 변모되었고, 근대 이후 ‘외적 성취’ 혹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표’로 고착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행위는 가시적 성취나 물질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학생은 입시를 위해 공부하고 직장인은 승진을 위해 일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한 도구가 된다. ‘나’라는 존재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무엇이 아니다. 존재는 자체로 완전하며, 다만 그 완전성이 드러나기 위해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과할 뿐이다. 씨앗이 꽃이 되는 것은 외적 명령이나 목적 때문이 아니다. 씨앗 안에 내재된 본질이 자신을 열어 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행위 또한 마찬가지로, 내면의 씨앗이 형태를 찾아 개화하는 일이다.


이러한 본질의 현현을 위해 필요한 것이 테크네이다. 본서는 그 의미를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해 ‘무위(無爲)의 테크네’라는 말을 제안한다. 무위의 테크네를 한마디로 말하면 ‘비(非)인위적 창조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노자(老子) 사상의 핵심 개념인 ‘무위(無爲)’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행위(有爲)를 그치고 우주의 자연스러운 흐름, 즉 도(道)에 순응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무위의 지혜를 ‘테크네’와 결합한 ‘무위의 테크네’는 존재가 지닌 본래성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의 근거는 단순한 스킬이나 기예적 차원을 넘어 행위의 중심을 ‘나’의 의지에서 ‘존재’의 흐름으로 이동시키는 의식 전환에 있다.


예를 들어, 기능 중심의 작곡가는 흥행 공식을 바탕으로 히트곡이라는 ‘목적’을 위해 음표를 전략적으로 배치한다. 반면, 무위의 테크네를 실천하는 작곡가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침묵의 진동에 자기를 연다. 그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선율이 자신을 통해 ‘흐르도록’ 허용한다. 그의 역할은 소리가 스스로 길을 내도록 돕는 조율자이자 통로가 되는 것이다.


결국 무위의 테크네는 자아(ego)가 존재의 개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의지로 밀어붙이는 대신 기다리는 법, 통제하는 대신 허용하는 법, 노력하는 대신 흐름을 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목적 지향적인 ‘유위(有爲)의 테크네’에서 인간을 압도해버린 AI 앞에서 ‘더 잘, 더 많이, 더 빨리’라는 기능적 경쟁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유위적 행위에 집착할수록 인간은 인공지능의 복사본으로, 즉 ‘도구의 도구’의 전락하게 된다.


사랑: 존재 현현의 에너지

앞서 인간의 창조 행위는 내재적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존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는 무위의 테크네를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존재는 왜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가? 무엇이 씨앗으로 하여금 꽃을 피우게 하는가? ‘외적 목표’ 때문이 아니라면 작가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사랑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하다. 그러나 그 완전성은 어둠 속의 보석과 같아서 스스로를 비추고 드러내지 않는 한 ‘인식’될 수 없다. 존재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랑은 이러한 존재의 자기인식에 대한 추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기 위해 밖을 향해 열리는 운동이다. 존재는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하고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생성한다. 따라서 사랑은 존재를 움직이는 힘이자 생성력의 내적 원리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그의 내면에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이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가 붓을 드는 이유는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기 안의 세계를 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얻게 된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일부를 보게 된다. 이처럼 진정한 창조 행위는 존재가 사랑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술과 도구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된다. 기능 문명에서 그것은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존재 문명에서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자각적 통로’가 된다. 붓과 물감은 화가의 내면이 색과 형태로 현현하는 통로가 되고, 악기는 음악가의 영혼이 소리로 나타나는 통로가 된다. 컴퓨터 코드도 프로그래머의 창의성이 디지털 세계에 표현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랑의 실현: 행위와 존재의 일치

따라서 ‘무위의 테크네’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기술’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사랑하고, 그 존재가 우아하게 피어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사랑의 운동이다. 인간, 언어, 문명 등 만유는 이 사랑의 실현에 참여할 때 그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때, 의술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아니라 치유의 질서가 드러나게 하는 사랑의 기술이 된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이 개화하도록 돕는 사랑의 양성이 된다. 예술은 단지 미적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존재의 빛이 형상화되는 사랑의 창조가 된다.


AI는 인간의 기능을 완성했지만 그것은 존재의식의 공백을 드러냈다. 따라서 이 시대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더 잘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무위의 테크네를 계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능적 아레테와 의식의 아레테가 통합된다. 무위의 테크네 속에서 행위(Doing)는 존재(Being)를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생성적으로 구현한다.


진정한 창조는 ‘하는 자’가 사라질 때 일어난다. 무위의 테크네는 ‘존재에게 자리를 내주는 기술’이다. 그 자리를 통해 사랑은 스스로 흘러나와 형태를 입는다. 이때, 기술(skill)과 기예(craft)는 사랑의 개화를 위해 협연하는 고도의 능력이 된다. 기술자와 장인이 하나 되어 존재의 예술을 꽃피우는 것이다. 무위의 테크네 속에서 프롬프트는 로고스적 명령이 된다. 그 사랑의 명령은 생명을 꽃피운다.


“빛이 있으라” 하지 않아도 빛은 본래 있다. 하든 안 하든 존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함으로써 빛은 밖으로 흘러나온다. 사랑은 그렇게 자신을 본다. 사랑이 자기를 만나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不亦說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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