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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Apr 12. 2024

3. 10주년 결혼기념일

마지막 기념일조차.

2013.03.31.

부활절이었던 눈부신 일요일.

우리는 결혼을 했다.

신부가 결혼식날 너무 웃으면 안 된다는데, 사진 속 나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좋은걸 어떻게 해.

모두가 우리를 축복해주러 왔는데,

긴장이고 뭐고, 나는 그저 신이 났다.

정말 철이 없었구나.

정말 행복했구나.


언젠가부터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상간녀들이 침범했다.

처음 침범한 1번 상간녀,


2019년인지 2020년인지 모를 3월 31일.

그는 이날 강원도 영월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위해 면접을 다녀왔다.

하루종일 연락이 안 되다가 밤늦게 도착해서 나와 소주 한잔 씩 마시고 그냥 잤다.

아무리 영월이라지만 하루종일 전화도 톡도 안 되고, 새벽에 나갔다가 밤 11시  도착이라니..

1번 상간녀 같이 면접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월로 직장을 옮기면 우리 멀어질 수도 있다.. 헤어지자.. 얘기를 했을 수도 있다.


이때 나는 영월로의 이직을 속상해했고, 화장실에서 혼자 울다 걸려서, 그는 영월로의 이직을 포기했다.

떨어져 지내는 것도 물론 속상했지만, 더 싫었던 건 땡과 그의 불륜이 깊어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운전을 못하고(면허도 없었다.) 그가 서울로 와야만 볼 수 있는 거였다.

그가 아프거나, 강원도에 눈이 많이 온다거나 그러면 나와 동글이에게는 방법이 없는 거다.

그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땡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거다.

땡이는 운전을 잘하고 땡이가 영월로 왔다 갔다 하며 살림을 봐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나 끔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진짜, 겁쟁이였다. 그깟 땡.


2021년 3월 31일.

정말 갖고 싶던 반지가 있었다. 에르땡땡 반지인데 반지를 그 가격 주고 사는 건 우리 형편에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비슷한데 짝퉁 티 안 나는 반지를 찾았다.

3만 9천원.

나는 8주년 결기 선물로 이 반지를 주문하면서 얼마나 서운했고, 주문한 상품이 도착한 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는 내 계좌에 3만 9천원을 입금해줄테니 나보고 주문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 1번 상간녀 땡은 그와 휴대폰, 모든 사이트의 아이디 비번, 카드 내역까지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늘 내 선물을 그런 식으로 '주문시켰다.' 내 계좌로 돈을 보내면 주문은 내가. )

그래서 서운했다. 이게 선물인가???????

도착한 짝퉁 반지를 끼고 좋아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다음에는 짝퉁 아니고 진짜를 사줄게!! "

진품이 아니어도 좋았다.

짝퉁이라도 상관없었다.

진품이었다면 환불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주문하는 것이 아닌 그가 선물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기뻤다. 그렇게 말해주어서.


그리고. 몰랐다.

1번 상간녀 땡도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는 줄은.

1번 상간녀 땡과 두번째 외도의 결정적 증거를 잡은 후 여러 이야기를 하며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이 에르땡땡 반지를 빼며 말했다.

"내가 이 반지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걔 이제 이 반지 안 껴."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나는 내가 이 반지를 좋아했다고 말했지, 땡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다.

어느정도 일이 수습되고 나서야 보았다.

1번 상간녀 도 나와 같은 반지를 하고 있었다.

이 에르땡땡이 진짜인지, 그가 선물한 것인지, 본인이 산 것인지,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차에서는 에르땡땡의 반지가 들어갈만한 작은 더스백 파우치와 포장박스가 발견되었다.


2022년 3월 31일.

9주년 결기.

우리집 동글이의 초등학교 입학과 그의 바쁜 회사 생활이 맞물려.

그의 퇴근 후 케이크에 초 켜고 노래하고 후 불고 끝.

창문에 풍선 붙여놓고 그 앞에서 우리집 동글이 사진, 나 혼자 셀카.

그와 나 둘이 찍은 사진도, 다같이 찍은 가족 사진도 없는, 속상한 일도 없는 9주년이었다.


2023년 3월 31일.

10주년.

그는 몇주 전 이혼을 얘기했고,

나는 알겠다고 5월에 서류접수 하자고 대답했고,

그가 광명시댁에서 지내게 되었고,

제주도 출장을 다녀왔고,

친정 엄마 아빠가 10주년이라고 우리끼리 보내라며 친정집 광주로 자리를 비켜 주신,

우리의 마지막 결혼기념일.

손목이 다 헤진, 땡이와의 추억이 담긴 맨투맨을 아직도 입고 다니기에

반바지, 맨투맨 한벌 그렇게 선물을 준비했다.

노란색 편지지에 오랜 시간에 걸쳐 쓴 손편지와 함께.


"아빠 엄마 광주 가셨어. 집에 와서 잠이라도 자고 가."

라는 톡을 보고

제주도 출장을 다녀와서 11시 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준비했던 선물을 건네줬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했는데." 했고,

나는 "괜찮아. 그냥 생각나서. 그래도 결혼기념일이잖아. ^^" 라고 웃으며 답했다.

내 선물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제주도 출장이니, 아이 선물은 사 올 줄 알았다.

그 흔한 제주도 초콜릿도. 없었다.


오라고는 했지만 정작 무서웠다.

일정을 앞당기자고 할까봐, 우리집 동글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할까봐.

거실에 이부자리를 봐주고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거실에 아직은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를 골고 자고 있다.

내일 우리집 동글이가 눈을 뜨고 아빠를 보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그냥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이혼 얘기 흐지부지되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날 아침, 우리집 동글이는 아빠를 보자마자 안기고 너무나 좋아했고

함께 티비를 보며 거실에서 뒹굴거렸다.

그저그런 평범한 주말의 풍경이, 코끝을 시큰거리게 했다.

사위와 손녀가 바지락 칼국수를 좋아하는 걸 아는 친정엄마는 바지락 살을 다 발라 냉동실에 넣어놓고 가셨고,

칼국수 면이 없어 그는 칼국수 면을 사러 내려갔다.

나는 육수를 끓이고, 그는 우리집 1층에 있는 슈퍼에 갔는데,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육수는 쫄아들어 이미 짭쪼름한 걸 지나 물을 아주 많이 더 부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기억이 있었다.


2년 전 2021년 5월 어느날,

어버이날 낀 주말이었나? 다가오는 주말이었나? 오후에 광명 시댁에 가야하는 일정이 있었고, 오전에는 내가 속눈썹 붙이러 합정역에 있는 샵에 간다고 데려다 달라고 했던 토요일 오전.

과자를 사러 내려갔던 그가 1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았고,

뭐하나? 하고 내다봤던 창문 아래로 저 ~~ 아래로, 그가 종량제 봉투 속 과자를 들고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1번 상간녀 땡이와의 통화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땡이와 그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했으므로.


아찔한 기억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여자인가?

땡땡이는 다른 남자친구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다른 여자?

이혼하자고 했던 게 단순히, 우리집만의 문제는 아님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여자가 있을까? 라는 아주 작은 의심을 했지만,

장인어른이 그냥 편찮으신 것도 아니고, 기적 끝에 수술하여 암 투병중이신데,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여자라니. 그럴 인간은 아니라고 애써 믿었다.

그리고, 인생은 늘 그렇듯,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우리의 결혼기념일 10주년에, 바지락칼국수를 먹고 싶다던 딸을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하고는

집에 올라와 바지락칼국수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겼다며 길을 나섰다.

그래도, 마지막 기념일이었는데 말이다.


끝내, 나는, 마지막 기념일을, 맞이하며 쓴, 손편지는 전하지 못했다.

어떤 관계가 되든, 우리집 동글이를 보러 오는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다고 썼었다.

10년동안 그래도 나는, 행복했노라. 썼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마음이 뒤엉켜 전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의 마지막 기념일일까... 믿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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