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달 Dec 13. 2024

상간녀의 미치도록 아름다운 고백

(부록) 못다 한 이야기

이 이야기는 부록으로,

중단된 브런치북의 뒷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

3월. 전남편은 이혼을 요구했다. 결혼한 지 10년, 친정아빠의 암투병 2개월 만이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 했지만, 전남편은 지금 당장이 아니면 죽을 것 같다며 매일밤 나를 들들 볶았고, 나는 무서움과 두려움 속에 눈을 닫고 귀를 닫았다. 장모님, 장인어른이 갑자기 와 계신 상황이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전남편을 위해 별거를 제안했다. 서류 넣는 날은 5월 초로 결정했다.

4월. 전남편이 집에 없으니 편했다. 주말부부처럼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주말마다 전남편이 아이를 보러 왔다면, 그랬을 것이다. 전남편은 여기저기 아프다는 핑계로 아이를 보러 잘 오지 않았다.

5월. 어린이날 잠깐 전남편은 왔다가 갔다. 회사에 일이 있다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우는 아이를 떼놓고 갔지만, 그날 오후 아이 친구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부도인데 아이 아빠를 봤다며. 여자가 있었다. 나의 촉은 빠르게 움직였고, 빠르게 증거들을 잡아 나갔다. 전남편은 내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집에 올 때마다 잠자리도 함께 요구했다. 그날도 그랬다. 할 얘기가 있다며 집 밖으로 나를 불러냈다. 잠자리를 원하는 추파를 내게 던졌고, 나는 거절했다. 그러다 무려 3번이나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전남편은 스팸이라며 받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전남편을 돌려보내고, 그 번호를 저장했다. 2번 상간녀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졌다. 같은 회사 직원.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여자. 한 달에 800만 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철없는 여자.


세 번째 외도였다.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2023년 8월 26일. (이혼 서류 제출 약 3개월 후, 이혼 확정기일 약 일주일 전)


동글이와 나는 시댁에 가서 전남편과 함께 1박을 했다.

시댁 어르신들은 평창에 가셨다며 전남편은 나와 동글이를 불러들였다.


토요일에 근처 쇼핑몰에 가서 고 난 늦은 오후 갑자기 "갈래?" 해서 되어 가는 것이었기에, 동글이와 나는 잠옷도 챙기지 못한 채 갔다.

매번 그렇듯, '이건 무슨 수작이지?' 싶었지만, 동글이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평창에 가시고 우리 가족끼리만 있는 거라 좋다며 가자고 했다.

가서 삼겹살을 구워 저녁을 해 먹고, 그러니 또 아무 일도 없었던, 오랜만에 만난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 예능을 보고 있는 나와 동글이에게 뭐 사 올 거 없냐고, 차를 다시 대고 와야 한다며 전남편은 나갔고,

나는 사과주 한 캔을, 동글이는 젤리를 부탁했다.


전남편이 나간 사이, '또 왜 저러지? 뭐지? 헤어졌나?' 궁금한 마음에 톡에 들어가 2번 상간녀를 찾아보았다.

충격적인 2번 상간녀의 프로필 사진에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사과주를 부탁하길 잘했지. 맨 정신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지 못할 정말 엿과 같은 기분이었다.


2번 상간녀는 나의 전남편과 다정히 마주 잡은 두 손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걸고 있었다.

프로필 메시지에는 '사랑해 XXX'이라고 나의 전남편 실명이 버젓이 적혀 있었다.

오 마이갓, 맙소사.

회사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실명을 저렇게 해 놓는담?

정말 아주 '미치도록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D-day표시에는  '너랑 나 D+186.'이라고 되어 있었다.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어림잡아도 전남편이 내게 이혼을 말하기 전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초록창 날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2023년 2월 21일 시작.

역시, 그랬구나.

전남편은 그즈음부터 밤에 늦게 들어왔다.

3월 1일 온라인 입학식을 앞두고 홍보 영상이 꼬이고, 일이 많아졌기도 했겠지만.

2번 상간녀와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러느라 더 늦었구나...

그러고는.. 뭐라고 했더라??

아버님께서 본인과 함께 있는 걸 불편해하시니, 자꾸 밤늦게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웃기지 마시라.

물론 친정 아빠가 사위 보는 데서 편찮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는 게 불편하셨겠지.

그래서 불편한 기색을 비치셨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 기색을 눈치챈 전남편이 더 불편하고 힘들었겠지만,

그보다 2번 상간녀와 밥 먹고 차 마시는 시간이 좋았겠지.

집에 들어와 어둡고 눅눅한 분위기에서 먹는 밥보다 (실제로 그렇게 어둡고 눅눅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 동글이의 쉴 새 없는 재잘거림과 당시 한참 집안 식구 모두가 미스터트롯에 빠져서 흥겨운 트롯 리듬에 몸을 맡기고 할머니와 동그란 손녀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분위기가... 마냥 어둡고 눅눅하진 않았을 테니까.) 어린 2번 상간녀와 먹는 밥이 더 활기찼겠지.


D-day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천천히 D+3'

아.. 정말 안 봐도 비디다.

전남편은 2번 상간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을 것이다.

"2번 상간녀야.. 내가 이런 상황이라 정말 미안해..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내가 온전히 혼자의 몸이 되고 너에게 갈게. 그때까지 우리 조심히, 조금만 더 기다리자."

'양다리', '바람', '불륜'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게 싫었을 테고, 당당히 시작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2번 상간녀에게 와이프가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자며, (나의 이야기를 몽땅 했을 테지. 1번 상간녀와 바람났을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그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이니까. 전남편은.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것 마냥, 자신은 그런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처럼, 합리화해서. 자신이 정말 백번 잘못한 건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진짜 시작'을 위해 잠깐 멈추자고 했을 것이다.

내게 올 때도 전 여친과 헤어지기 위해 그랬으니까.

1번 상간녀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얘기들이 나왔으니까.

이제 전남편의 레퍼토리가 된 이런 멘트마저도. 징글징글하다.


어찌 되었든 그날 전남편은 주차를 다시 하고  내가 부탁한 사과주와 동글이가 부탁한 젤리를 사들고 왔다.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동글이와 나는 샤워를 하고 전남편의 반팔티를 잠옷 삼아 셋이 커플로 나란히 입고 누웠다.

동글이가 잠든 후, 전남편과 나는 사과주를 한 캔 씩 마셨고, 전남편은 이 마당에 나와의 잠자리를 원했다.

사과주를 마셔서 다행이지.

나는 동글이를 사이에 두고 양 끝에서 자기를 원했지만, 전남편은 자꾸만 내가 그의 옆에 와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자기를 원했다.

정말. 사과주를 마셔서 다행이지.

전남편은. 새벽에 자다 깨서 자꾸만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아 정말이지. 사과주를 마셔서 다행이다.


다음날 아침,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샤워를 했다.

시댁에서 하는 마지막 샤워였다.

눈물이 났다.

처음 시댁에 와서 씻었던 기억이 났다.

연애 시절, 시댁에 와서 처음 자던 날.

빌라 화장실은 처음 쓰는 거였는데 추웠다.

당시 흡연 중이셨던 시아버지께서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셔서 옅게 배어있던 담배 냄새.

환기와 습기 제거를 위해 살짝 열려있던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차디찬 바람.

그리고 샴푸와 린스가 한 번에 되는 올인원 제품.

살짝 덜 마른 수건에서 나는 냄새.

모든 것이 낯설고 조금은 불편했지만, 정겨웠다.

이제, 안녕이구나.


준비를 마치고 리 예약된 동글이 미용실에 갔다.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며 동글이 머리가 다 되길 함께 기다렸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남편은 나와 동글이를 집에 내려주고 갔다.


그날 톡 프로필 노래에 Recless를 해놓았고

전남편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펄쩍 뛰며 그 노래는 뭐냐고 대낮에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노래가 좋아 해놨다고 했지만, 사실 전남편 보라고 해놓은 노래였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를 알리고 싶었다.


세상에.

내 남편(당시까지는 그래도 법적 남편이었으니)을 사랑한다는.

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고백을.

다른 여자의 카톡에서 보게 될 줄이야.

1번 상간녀도 이런 대담함은 없었는데.

2번 상간녀는 더 어려서 그런지 다르구나.

이게 엠지인가.

그래.

2번 상간녀야 많이 사랑하렴.

언젠가 그 사랑이 너를 배신하는 그 순간까지.

그런데, 너네 시작한 날이 내 남편이 내게 이혼하자고 말하기 전이더라.

그거 아니?

그런 걸 불륜이라고 하고, 그런 너를 상간녀라고 한단다.

너에게 천천히 시작하자고 했던 나의 전남편이, 이날마저도 내게 성급하게 들이댔고.

네가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고백을 했던 그 이름이, 이날마저도 내게 밤새 사랑한다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단다.




(그날 후의 이야기)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전남편과 나는 법원에서 다시 만나 판사 앞에서 엄숙히 '이혼'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약 열흘 후,

2번 상간녀의 뱃속에 아이가 생겼고,

그러면서도 전남편은 내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쏙 뺀 채, 동글이를 위해 다시 합쳐보자고 했고,

내게 거절당한 전남편은 2번 상간녀 뱃속 아이를 인지했고,

동글이를 계속 만나도 되는지 고민을 했고, 면접교섭이 지켜지지 않은 채 6개월이 흘렀고,

그리고 이 글의 두 번째 에피소드(잔인한 5월의 대설특보)로 이어진다.




그리고 현재 전남편은 2번 상간녀와 그들 사이의 아이와 살고 있으며,

한 달에 한번 동글이와 면접교섭을 이행 중이다.


나는 그들이 불행했으면 좋겠다가,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보다 나는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매일, 매 순간 바란다.


이렇게 나는 이혼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는 이혼을 보낸다.


안녕, 나의 '이혼'.

안녕. 나의 첫 번째 브런치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